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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롬12:14-16)

by 【고동엽】 2022. 9. 17.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롬12:14-16)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옛날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장애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소경의 등에 업혀서 소경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자신들의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거지였고, 또 장애자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배불리 얻어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서 움막을 나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매우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일순간 소경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경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의 몸도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눈 위에 꽁꽁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꾀를 부리면서 그 행복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너'의 소중함을 무시했던 '나'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의 죽음이라는 공멸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찌기 고대의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는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웃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불어서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경우를 우리에게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핍박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를 핍박을 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14절입니다.
둘째로, 우리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경우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축하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축하해 주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의 마음을 다해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15절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했을 경우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높은 데 두지 말고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기대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들이 언제, 어떤 사람에게라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화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가 핍박을 당했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4절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런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민요가운데 아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무슨 뜻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님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갈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저주의 노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명하셨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눅10:5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평안은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일단은 그 가정에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그 가정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그 가정에 복이 머물게 될 것이지만, 그 가정이 복이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복은 복을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원리를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면 그 저주는 그에게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으면 그 저주는 저주를 한 사람에게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경우에서도 남을 저주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주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아주 해로운 잡초의 씨앗을 구해서 그 농부의 밭에 왕창 뿌려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밭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번식력이 강한 잡초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후에 그는 그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딸에게 결혼선물로 그 밭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몇 년동안 그는 그 밭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그 해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두고 보라지, 잘 되는가 한번 보자!' 라는 말은 우리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늘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직장인은 자기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심했습니다. 그의 상사는 아주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사가 보기 싫어서라도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로부터 좋은 조언을 얻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체험에서 터득한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마다 그 상사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의 마음에 평안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사는 조금도 변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상사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축복기도를 하는 그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꾸중을 들어도 상사가 미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상사를 대할 때도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그의 상사도 그를 대할 때 친절한 모습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애꿎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축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우리를 핍박하던 사람도 결국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경우입니다.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때대로 우리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의 무관심을 질책을 하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1:17입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피리를 붑니다. 그러면 함께 즐거워 하면서 춤을 추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 우리 이웃에게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애곡합니다. 그러면 함께 울어주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일에 무관심하지 말고 관심을 기울여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시기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왜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왜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아우 요셉을 미워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까? 왜 사울 임금이 자기의 신하요, 자기의 사위였던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면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즐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친구 욥이 엄청난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말로 욥을 책망하면서 오히려 욥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는 자로 함께 울어 주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종이에 빽빽하게 적은 것을 목사님에게 건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사실은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그 교인이 주는 종이를 받아서 보았습니다. 그 종이에는 목사님이 고쳐야 할 것 50여가지가 조목 조목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읽고 나서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리고 그저 한 마디만 나중에 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교인이 돌아가고 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사님은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고서 그 교회를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비판하면 그 사람이 쉽게 변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가 쉽습니다. 일할 의욕을 상실시키고, 좌절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에 우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입장에 맞추려고 하지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줄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야,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 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어떤 아주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제자에게 일렀습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거라.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크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제자야, 똑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거울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만 볼 수 있겠느냐? 그것은 거울뒤에는 은칠이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있는 은칠을 벗겨버려야 하느니라. 투명해져야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편견의 은칠을 먼저 벗겨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의 은칠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쉽게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우리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했을 경우입니다.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왜 모임이 자꾸 힘들어집니까? 서로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서로 같이 해 보세요.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2)"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3)"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세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하나되지 못합니까? 그 배후에 교만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을 우리가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교만은 천사를 마귀로 만들었다. 그러나 겸손은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할 때, 우리는 천사와 같이 온화한 모습이 됩니다. 저절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서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교만한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 마귀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연히 화목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는 앞마당에서 수탉 몇 마리가 처절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세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힘이 세고 억센 놈이 승리를 했습니다. 이긴 수탉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울타리에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야! 세상에서 나보다 힘센 놈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해!"
그러나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공중을 날고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그 수탉을 채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큰소리치는 사람, 잘난 척 하는 사람,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화평이 깨지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생각에는 자기 아내의 청각에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해야 겨우 알아듣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 모르게 아내의 청각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아내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멀찌감치 앉았습니다. 일부러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아내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넌지시 아내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역시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아내 등뒤로 바짝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보! 이제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요?"
그러자 아내는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들린다니까요! 당신은 내가 이미 똑같은 대답을 세 번씩이나 하는데도 모르고 계세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누구 청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남편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기 아내가 제대로 듣지 못한다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왜 세상이 온통 붉지?"
사실은 우리가 붉은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마십시다. 누가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족하게 보입니까? 우리는 더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라도 우리 자신을 낮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그 모임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이 모습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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