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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경건성과 역동성 (시149:1-5,요 4:21-24)

by 【고동엽】 2022. 9. 17.

 예배의 경건성과 역동성   (시149:1-5,요 4:21-24)


교회가 쇠퇴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배보다 회의가 많습니다. 예배나 기도회 등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회의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보다 기관이 발달합니다. 교회는 힘이 없어지지만 교회를 배경으로 한 기관은 발달합니다. 그리고 상징과 의미의 극대화 현상이 나타나고 균형의 상실이 드러납니다. 한편에서는 상징은 강조되고 의미는 죽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의미는 강조되고 상징을 무시합니다. 주5일 근무제가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주5일 근무제를 앞두고 교회는 비상입니다. 주5일 근무제를 대비하는 핵심 과제는 성수주일에 대한 철저한 가르침과 예배의 역동성과 중요성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아무리 주5일 근무제가 되어도 주일 성수하는 것을 잘 가르치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는 예배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말은 구약에는 ‘아바드’입니다. 이 말은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굴복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며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프로스퀴네오’란 단어인데 ‘경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라트레이아’(latrei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섬김’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예배의식’(liturgy)이란 단어의 어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깊이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그 핵심적 목적은 제사 즉 예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애굽에서 나온 후에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마음껏 하나님께 제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예배하게 하려고 구속하셨습니다. 성막은 출애굽의 또 다른 은총입니다. 성막은 막연히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성막을 중심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은 제사 중심, 성막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은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삶을 원하십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10가지 재앙이 있은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공동체적 경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공동체에 주신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한 장소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공동체적 경험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교회가 교회 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야말로 전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핵심이며 전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배는 교회의 현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의로운 자입니다. 아벨은 예배를 통하여 인정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배로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이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무지 가운데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믿습니다. 그들은 선지서를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편을 아예 읽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 지식이 제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열광주의적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부분적 진리를 고수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예배에 대하여 예수님은 올바른 예배를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리라는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in truth)라는 말입니다. 성령이나 진리가 아닌 자기 만족의 예배, 자기 위안의 예배, 이런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리가 살아있고 전파되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예배는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영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만나는 예배입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영의 하나님이 육적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 만남이 예배입니다. 있을 수 없는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을 예배를 통하여 가능하게 하십니다. 예배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영이 살고, 말씀이 살고, 살아 움직이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예배는 경축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축입니다. 예배는 영접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접입니다. 예배는 드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며 사는 생활 자체가 예배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오순절의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바람같은 성령이 온 방에 가득했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이미 바람같은 성령은 이 방에 가득하십니다. 이제 물같은 성령이 여러분 각자 위에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신비한 체험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이 신비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과 불은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은 바람이 있으면 더 활활 타오릅니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예배는 이러한 바람과 불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감동의 시대입니다. 감동의 시대는 감동을 주어야 사람들이 움직이고 변합니다. 이런 감동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감동을 잘 안받습니다. 신령한 말씀에 대하여는 감동을 받지 않고 엉뚱한 데는 감동을 받습니다. 예배는 감동을 받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는 감동을 받습니다. 성경공부나 기도회는 감동을 받지 않고, 건강강좌는 감동을 받습니다. 저는 대장금을 보지 않습니다. 보지 않는 이유는 잠 자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보니 시청률이 50%가 넘었습니다. 최근에는 대장금의 인물과 현 정치의 인물들을 비교하여 흥미를 고조시켜 굉장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더니 “대장금을 꼭 봐야 요즘 정치를 이해한다”고 저에게도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저는 볼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정치를 이해할까봐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가끔 저는 자신의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드라마에도 빠지고, 인터넷에도 빠지고, 유행에도 빠지는데 왜 예배에 빠지게 하지 못할까 하는 자책입니다. 세상의 생명도 의미도 없는 것들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데 생명의 말씀으로 왜 감동을 주지 못할까 하는 서글픔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만나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비 콕스는 말했습니다. 우리 개신교가 축제성을 상실한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감동이 상실되고 역동성이 없는 예배 때문에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독교의 상징의 부재입니다. 상징을 너무 치워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한 상징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교회 전통과의 지나친 단절입니다. 종교개혁 후에 교회의 전통이 가진 좋은 것들도 너무 많이 버렸습니다. 성례전을 배제한 말씀중심의 예배로 인한 예배의 건조함입니다. 상징을 배제하고 의미만 강조하다 보니 결국 건조한 예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편 149편의 찬양과 예배는 완전히 축제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역동성이 있는 예배로 예배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역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는 경건해야 합니다.
참 예배는 진리의 예배입니다. 진리는 말씀입니다. 철학에서는 진리를 예나 지금이나 동에서나 서에서나 변치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고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에는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압니다. 요한복음 8:31절 하반절에서 32절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예수님께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가 경건성이 있는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18:38에는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앞에 두고도 진리를 몰랐습니다.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가 경건한 예배입니다. 경건한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입니다. 참 예배는 모든 예배의 순서가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의 해석이어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행동이 예배입니다. * 고든 맥도날드는 말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지적 굶주림을 충족시킬 만큼 사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강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의 피곤함과 실패에 응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룹 치료강의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진실로 예배는 열정과 비전을 불어넣는 생명력으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가 늘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첫째, 본체적 영광이 있습니다. 본질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해나 달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효과적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영광입니다.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받으십니까? 하나님을 인정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의 하나님 임재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홀로 도망하다 벧엘에서 밤을 지냅니다. 혼자 허겁지겁 도망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거기까지 따라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의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예배는 인간편의 행위에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느끼는 것이 예배입니다. 존 스토트는 예배를 “두 세상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늘과 세상 사이에서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십자가 복음에서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예배는 예배의 자리에 있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졸 때도 있습니다. 머리 속이 복잡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정서를 동반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임재 경험, 사죄 체험, 구원 확신이 소망하는 가운데 우러나는 거룩한 기쁨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산 교제가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 예배의 찬송, 기도, 봉헌, 설교, 교제, 광고,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 체험입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임재 없이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예배는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집니다.

결론
토니 컴팔로우목사님은 미국 동부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한번은 하와이에 강의차 갔습니다. 동부와 하와이는 5시간이나 시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밤에 잠이 잘 오질 않았습니다. 그는 새벽에 어느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데 어떤 두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모습으로 봐서 그들은 창녀가 아니면 그 비슷한 유의 업종을 가진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두 여인이 앉아 얘기를 주고 받다가 한 여인이 자신을 푸념하기 시작합니다. “내일이 나의 생일인데 생일잔치해 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온 여인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여인은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토니 컴팔로우 목사님은 바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여인들이 매일 옵니까?” “예, 이 시간이면 반드시 들렸다 갑니다”. 그 때 목사님은 바텐더에게 내일 아그네스의 생일잔치를 해주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때 바텐더는 “내일 케이크를 하나 사 오시면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2시에 목사님은 케이크를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 식당에는 온동네 창녀가 다 모여 있었습니다. 깜깜한 실내에 장식을 하고 아그네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그네스가 들어오자 실내의 불이 켜지고, 폭죽이 터지고 생일축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그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케이크에 불을 끄고 난 아그네스는 그 케이크를 잘라 먹을 수 없다며 자신의 집 냉장고에 고히 보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그네스가 집에 잠시 간 사이에 바텐더는 목사님께 한마디 말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별로 할 말도 없고 준비도 없어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바텐더는 “당신은 목사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입니까?” “새벽 2시에 생일잔치 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잔치해 주는 교회의 목사입니다”. “세상에 그런 교회 없습니다. 세상의 교회는 담이 너무 높았습니다. 너무 높아서 우리가 갈수가 없었습니다”. 토니 목사님은 가장 좋은 교회,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교회의 벽이 너무 높다고 합니다. 교회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배는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참 예배는 영혼을 사랑합니다. 참 예배는 사람을 위로합니다. 참 예배는 사람을 구원합니다. 위로와 임재가 있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항상 예배할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역동성과 경건성을 갖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상징과 의미가 조화된 예배이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례가 조화된 예배이어야 합니다. 영상예배가 아니라 영성을 돕는 영상이 있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축제와 경건이 조화된 예배이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회중이 함께 참여하고 창출하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배가 이런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이 제물이 되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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