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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복음 1:12-18)

by 【고동엽】 2022. 9. 17.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복음 1:12-18)

어떤 시골 교회에 집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집에서 많은 돼지를 길렀습니다. 너무 욕심이 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에서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집사 님, 축하합니다.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다면서요? "그러자 그는 시무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여덟 마리가 뭐가 많습니까? 옆집의 돼지는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다는데요." 며칠 뒤에 그 집사 님이 기르는 돼지들 가운데 다른 돼지가 또 새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열 네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 님, 이제는 만족하시지요? 새끼를 열 네 마리나 낳았으니까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네요." "목사님, 열 네 마리가 뭐 그리 많습니까? 한 스무 마리쯤 되면 모를까?"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집사 님, 제가 보기에 집사 님은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돼지와 저를 비교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집사 님, 보세요. 돼지가 아무리 욕심이 많은 짐승이라 해도 구정물 한 통만 다 먹고 나면 만족할 줄 압니다. 그런데 집사 님은 도무지 만족이 없지 않습니까? 집사 님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집사 님이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을 수 밖에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 문에 물고기의 IQ는 0.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옆의 동료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치면서 끌려가는 것을 금방 보고도, 곧 물고기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 또 다시 입질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 나라의 정치인의 IQ도 0.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서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뒤돌아 서서 또 다시 뇌물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뇌물을 먹고 감옥에 끌려간 정치인은 10년 전에도 있었고,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내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정치인의 지능지수가 고작 0.3밖에 안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IQ는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조금 잘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쉽게 낙심해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풀어주고 계시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살도록 매년 삼대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18세기 영국에 존 뉴턴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불량한 청년이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영국의 해군에 입대를 시켰습니다. 그는 군대의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탈영을 해버렸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실컷 매를 맞고서 영창에 갇혔습니다. 그후 그를 아프리카 노예 선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그는 15개월 동안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섬에 갇혀서 노예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영국 무역선에 구조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바다 위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05장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죽는 그 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씀 가운데 "이 다음에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첫째는 그곳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없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고, 둘째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며, 마지막으로 나 같은 죄인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실 천국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리와 창기처럼 겸손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깜짝 놀라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이 쇠퇴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너무나 큰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님은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도 역시 큰 죄인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을 에벤에셀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몸은 큰 맨션 안에 살면서 영혼은 불행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평생 큰 집 마련하느라 고생하지만 그 큰집에서 얼마 못 살고 죽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비싼 집에 집 지키는 개 키우고 감시 카메라를 달고도 불안하게 살면 그게 무슨 복입니까? 최고급 아파트에 살아도 그 영혼은 아직도 판자 집이라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시편 기록자는 주안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했고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습니다(시 84:10). 이 말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하루의 삶이 믿음이 없이 사는 3년의 삶보다 낫다는 말이고, 믿음을 가지고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믿음 없이 큰집에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은 성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 자체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항상 은혜를 아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개 은혜를 아는 자가 될 때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부모님의 은혜가 참 고맙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철이 든 것이고, 나이가 많이 들어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으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님으로부터 계속해서 무엇을 얻을 것만 생각하면 철이 덜 든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더 얻을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은혜가 느껴지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때 은혜를 아는 철든 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받을 것만 생각하면 은혜는커녕 원망할 일만 많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러면 영혼도 망가지고 축복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하면 어찌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지만 다시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사고만치는 자식을 꺼내러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마음이 멍든 어머니가슴과 같습니다. 아마 훨씬 더 애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무슨 원망을 합니까? 이제 우리는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형제를 아프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약의 큰 사건이 두 번나옵니다. 하나는 출애굽의 역사요, 둘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요1:1, 12-18) 나오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에다 은혜를 더 쌓아 올린 것과 같이 온통 은혜라는 말입니다. 앞에도 은혜요 뒤에도 은혜요 오른 쪽을 봐도 은혜요 왼쪽을 봐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즐거울 때에도 은혜요 고난의 때에도 은혜요, 성공할 때에도 은혜요 실패할 때도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깨닫고 감격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래 은혜란 단어는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여 더욱 그 뜻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또 어떻게 설명하여도 받을만한 자격이 전무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 위에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에는 먼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의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 합당합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수단도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잃은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인간들, 하나님께 불순종만 하고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는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들 가운데 보내셔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생명을 대신 할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은혜는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뵙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영광과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감격을 고백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고, 믿어 그 안에서 참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어떤 은혜도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은혜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충만 이란 단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수나 양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성된 상태로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빈곳이 없는 충만 이요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차고 넘치는 충만 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고 충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줄 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모두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충만"(플레로마)이란 말은 '가득 차 있는 것', '전체' 또는 '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보화가 충만하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지혜와 의, 그리고 거룩과 자비가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13). 그리스도는 이러한 충만한 중에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충만한 분이므로 온 인류에게 무한한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는 인류 전체가 아무리 많이 마실지라도 고갈되는 법이 없는 샘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청하십니다. 예수 님께로 오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그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여 항상 넘치기 때문입니다. 실로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오직 예수 님 안에 있는 충만한 것들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빈자리가 있으며, 그 어떤 빈자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로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미 그의 충만한데서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보면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이렇게 끝이 없는 은혜라는 말이요 아울러 무진장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처럼 은혜에 대하여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없다고 할만큼 충만한 은혜를 나타낸 것으로 이 표현은 '가장 큰 은혜', 혹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은혜'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끊임없이 은혜가 지속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의 시작 전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지속되는 은혜요 한 달만이 아니라 년 초부터 년 말까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풍성한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상황이나 분위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풍성하게 역사 하시는 은혜입니다. 좋은 때는 주시고 나쁠 때는 외면하시는 은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아 주시는 은혜를 다 감당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은혜를 더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고백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시편 23편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이 예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유대교라는 종교나 어떤 다른 종교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과는 다릅니다. 또 인간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 또는 권력이라는 우물에서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하신 바로 그 생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그 막강한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의 생활 전반에 아니 우리의 미래와 영원에까지 끌어들여 생명의 빛과 온기와 바람이 불어오게 하셨습니다. 정말 죄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자가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기쁨을 깨닫고 감사할 뿐 아니라 아직 이 진리를 모르는 이웃에게 전하여 함께 이 은혜를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희랍 신화를 보면 한 여인이 영원한 나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뱃사공이 말합니다. "영원한 나라로 가기 전에 레테 호수의 물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죠?"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녀가 좋아하며 "그럼 저는 이 물을 먹을래요"라고 하니까 뱃사공이 한 마디 더 합니다. "그런데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기뻤던 일도 동시에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여인은 고민하다가 레테 호수의 물을 먹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갑니다.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기억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며,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며 교회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아름답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삶에서 아름다운 기억이 없고 미움과 질투만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이 부서지는 아픔입니다. 서로 아껴주어야 하는 마음에 증오를 심어준 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 그런 영혼이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창고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84:1,6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면서 자기 영혼의 파괴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몸은 포로생활에 처해있어도 영혼은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니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찬460)우리를 향한 이토록 귀한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오늘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 결핍증보다 감사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발달된 물질문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말살시키고 있습니다. 부자는 배가 불러 하나님을 잊고,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파 하나님을 잊고, 배운 사람은 적은 지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기억치 않고, 무식한 사람은 무식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법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모르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세에는 머리를 숙이지만 하나님께는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머리도 입도 뒤틀리는 찬송시인 송명희씨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외치고 삽니다. 어느 날 방송국에 다니는 모 장로님이 딱한 사정보고 미국에 데리고 가서 치료하고 공부시키겠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대로 살겠어요!" 그 때 그 장로님을 그녀를 껴안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까? 조금 잃었다고 없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시편 69편 31절을 통하여 시편기자는 진정한 감사는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도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치 못하는 생활이 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봅시다. 그리고 하나 하나 감사합시다. 은혜 받은 기억은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은혜 받은 때, 은혜 받은 장소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대한 기억으로 포로 생활에서 그나마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런 좋은 기억들은 언제 주어집니까? 항상 기쁜 마음으로 희생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희생함으로 좋은 기억들을 만들면 그것이 얼마나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것을 '은혜' 두 글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2. 나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년도 달력 한 장을 남기고 살아왔지만 정말로 경제적으로 힘에 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어려운 일만 기억을 하고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외적인 환경입니다. 조금이라도 일이 잘 되면 그럴만한 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거나 환경에 돌립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하는 잘못된 습성입니다.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거기에 합당한 영광과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수한 고난 끝에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 장관이 되고, 미국의 10대 재벌에 든 사람이 되고, Y.M.C.A 창설자가 된 죤 위너 메이커씨가 100만 달러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서서 감사 예물을 바치는데 집이 너무 가난했던 나는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끝나고 오후에는 벽돌 굽는 아버지 공장으로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레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사택을 찾았습니다. 잠버드 목사님은 내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만 달러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말로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하면서 울었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이런 기쁨의 눈물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안에는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많은 것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있는 것으로 드릴 수 있음이 복된 일입니다. 드릴 수 있다는 것 바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3. 이웃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50대 중년남성 무명씨가 구세군 자선냄비에 3752만원 기증했습니다 요즘 불법 대선 자금을 밝히면서 수 백 억대를 거둔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입니다. 신명기 16장 11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맥추 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노비, 고아, 과부, 객 등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 빠짐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짝 믿음 가정은 온 가족이 하루 빨리 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다 함께 감사 제단을 쌓을 수 있도록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집에 욕심 많은 주인과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동이 트자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머슴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저 녀석이 산에 가서 빈둥거리며 놀기만 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뒤를 한번 밟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 중턱쯤 머슴을 좇던 주인이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못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기겁을 하고 달아나려 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바라보는 곰을 보는 순간 빌고 또 빌었습니다. "목숨만 건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곰이 기우뚱하며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하인이 곰의 등을 도끼로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곰은 죽었고 머슴과 주인은 다리를 절며 마을로 내러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회복된 주인은 환한 얼굴로 그 곰의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갖고 장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은 빛이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도끼자국 때문에 반값도 채 못 받지 않았느냐?"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계가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세상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가며 끝없는 욕심을 채워야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 인생이란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로 평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합시다. 있는 것으로 감사합시다. 더불어 나누며 삽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찾으시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주 예수를 깊이 사귀고 믿으며 그들을 체험하고 아는 삶 속에는 참으로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직한 사람들 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 특히 죄의 문제에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깊이 앎으로 은혜를 풍성하게 받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받되 풍성하게 받아야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3:24, 딛3:7). 은혜를 받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느9:17). 은혜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행15:11) 은혜를 받아야 위로와 소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살후2:16). 은혜를 받아야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을 조사하다가 큰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은혜와 무엇'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14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이 나오고 느헤 미야 9장17절, 다니엘서 1장9절에는 은혜와 긍휼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밖에도 은혜와 영화(시84:11), 은혜와 권능(행6:8), 은혜와 자비(욜2:13 욘4:2), 은혜와 사도의 직분(롬1:5), 은혜와 의의 선물(롬5:17) 등 많습니다. 이것을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진리가 따라온다, 은혜를 받으면 자비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은혜가 뒤에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평강도 누릴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진리도 깨달을 수 있다' '은혜를 받아야 긍휼도 입을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서 축도의 원형을 제시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같이 은혜를 먼저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다른 좋은 것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는 기쁨입니다. 은혜를 헬라말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는 '기쁨'을 말하는 '카라'에서 왔습니다. 은혜는 기쁨인데 일반적인 기쁨, 인간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입니다. 거저 주시는 기쁨입니다. 진정한 기쁨, 인간이 추구하는 참 기쁨, 그리고 평강,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씀의 숨은 뜻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 이것은 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남달리 봐주고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에게는 그런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이유 없이 곱게 봐주고 대우해 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소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받은 은혜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면 안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감사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저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해야 합니다(시145:7). 은혜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보답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해야합니다(고후9:8).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엡1:6). 이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십니다. 은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나가서 좋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응답하시고 돕는 은혜에 이르게 하십니다. 드라마 사극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저것은 하나님께나 쓸 수 있는 말인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은(聖恩)은 '거룩한 은혜'라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진심으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생활을 할 때 은혜 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사시는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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