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을 사회 (신23:15-25)
오늘 본문 안에는 다섯 가지의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으며 살 수 있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 첫 번째는 15-16절에 있는 대로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도피한 종은 타국에서 온 종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 계명은 착취와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생명의 보전과 자유를 찾아 도망쳐 나온 이들을 보호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 또한 한때 애굽에서 노예였음을 상기시키며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은 백성의 사회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이 계명은 그 당시 근동지역 나라들의 법률과는 정반대되는 계명입니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도망쳐 온 종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이웃나라와의 마찰과 충돌을 야기시킬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인권의 존중과 보호라는 상위가치를 따를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두 번째 계명은 17-18절에서 보는 대로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는 신전에는 그 신전전속의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신이라고 세워놓은 목상이나 석상은 실제로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신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좋게 말하면 여사제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전창녀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창녀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 신과 하나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창녀들과의 성관계는 농사에서의 풍요를 기원하고 약속 받는 의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에게 제사할 때는 제물을 바치듯이 사람들은 그 성전창녀들과 관계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했고 그 돈은 성전에 귀속되었습니다. "개 같은 자"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속한 남창입니다. 창녀들이 제사하러 오는 남자들을 상대하듯이 여자들을 상대하는 남창이 아니라, 동성과의 성관계를 갖는 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이방종교의 제사장노릇을 해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창이든 여창이든 이런 행위를 극히 증오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로 금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런 행위와 더불어 어떤 서원을 하든지 간에 그런 행위의 대가로 받은 돈을 성전에 용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이 가르치고 명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고 음란한 행위를 가증스럽게 여기시며 악한 재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수단방법까지라도 동원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든 의도를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고와 관습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려 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계명은 19-20절에 있는 대로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복을 형제 중의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물질의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여유는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거저 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감사를 표하는데 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특별히 이 계명을 준수할 때 뒤따를 하나님의 복주심의 약속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부를 더 얻기 위해 형제를 상대로 이기적 계산을 하지 말고, 남에게 돈을 꾸어줄 수 있으면 거저 꾸어주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의 복을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데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계명은 21-23절에서 보듯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한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약속으로서 흔히 제물을 함께 드렸고 제물 대신 돈으로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서원은 그 어떤 것이든 의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한 22절의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일단 자의로 서원을 했으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실행해야 합니다. 서원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정신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잘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진실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언어행실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가져야 하며, 그 정신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보면 종종 자기가 당면한 난국을 모면하기 위해 서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리라 여겨지는 것을 하겠노라고 우선 서원부터 하면서 이러저러한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간청을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시고 나면 서원한 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서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내든가, 잊지는 않았지만 실행하기는 싫어져서 서원한 것을 후회하며 한쪽 마음구석에 짐으로 안고 살든가, 언젠가는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미루면서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든가 합니다. 그러다가 된통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 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가볍게 이용하며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24-25절에 있습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한 것입니다. 이 계명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사고는 땅의 소산은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사람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누어야 할 것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남을 위하여 나눌 수 있어야 하되, 하나님께서 남에게 맡기신 것을 탐내고 뺏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유와 분배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는 계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듣는 계명들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합니다. 탈북자 문제, 외국인 근로자 문제, 성 매매업 단속 문제, 신용불량자 문제, 소유와 분배의 문제, 그리고 교회의 물질주의적 기복신앙의 문제 등 우리 사회의 현안들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착취와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생명의 보전과 자유를 찾아 주인에게서 도망한 종을 보호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어 평안하게 살게 하라는 계명은 이웃나라와의 외교적 마찰과 분쟁에 대한 염려보다 더 상위가치인 인권의 존중과 보호라는 대의를 따를 것을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탈북자들을 체포하여 북한으로 강제송환하는 중국정부의 행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중국정부의 처사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탈북자들의 문제에 있어서 오로지 김정일의 심기만을 살핀다면 대단히 비겁하고 부끄러우며 위선적인 일입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 또는 회피로 일관한다면 두고두고 크게 국제사회로부터 비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탈북자뿐 아니라 가난을 탈출하고자 본국을 떠나 한국에 온 외국인근로자문제도 있습니다. 이들의 인권이 악랄하고 비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거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악한 사회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시끄러운 문제의 하나가 소위 집창촌 폐쇄의 문제입니다. 성매매업에 종사해온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집단시위를 하며 그들의 생계대책을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일 만큼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생계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었고 그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무관심했거나 게을렀던 죄에 다 같이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고 보다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문란한 성윤리와 음란문화를 추방하는 일에 우리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자문제는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어두운 현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복을 형제 중의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 쓰지 말고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거저 빌려줌으로써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데에 사용하라는 오늘 본문에서의 계명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뜨거운 사회적 논쟁거리로 등장한 것이 소유와 분배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계명을 통하여 경제적 사고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땅의 소산 즉 모든 경제활동의 이익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꼭 필요한대로 나누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누어야 할 것을 개인적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벌어 재산을 축적한 사람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사람들을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내 것을 남을 위하여 나눌 수 있는 정신을 고양시키고 확산시키는 일은 좋은 일이나, 남의 정당한 재산을 억지로 빼앗아 나눠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도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어 온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면한 난국을 모면하고 세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와 행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많이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시기만을 구하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실 것만 재촉하지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를 힘쓰는 일은 등한히 합니다. 오늘 본문의 서원에 관한 계명은 우리의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비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모든 계명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계명들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며 형제이웃을 서로 존중하고 함께 나누며 살기를 힘쓰는 사회가 복 받을 사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사회 만들기 위하여 "경천애인"의 삶을 실천하며 삽시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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