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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믿음 (데살로니가후서 1:3-5)

by 【고동엽】 2022. 9. 16.
자라나는 믿음   (데살로니가후서 1:3-5)


제가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근무할 때 그 부대에 포악한 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사병 하나를 때려서 심한 성처를 입히고 정신병자를 만들어 버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그는 징역을 3년이나 살고는 우리 부대에 전입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못 걸려서 큰 낭패를 볼까 두려워 그를 슬슬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독 교회에 다니는 사병들에게 못되게 굴고 아예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회에 나갔다가 걸리는 날에는 구둣발로 채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있는 중대에서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그 중사를 만나 타일러보기도 했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가장 큰 기도제목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중대의 병사 하나가 그 중사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몰래 예배를 드리고 갔다가 들켜서 심한 구타를 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병사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 몸에 상처가 나서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중사를 그냥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사가 변화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사로부터 구타를 심하게 당한 병사가 매일 밤, 진흙으로 얼룩진 그 중사의 군화를 깨끗하게 닦아 놓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중사는 그 사실을 알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저도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대한 그 사병의 신앙 앞에 포악했던 중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이 자라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한 기간은 3주 정도로 매우 짧았습니다. 미처 복음전파 사역을 활짝 펼치기도 전에 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 그만 그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곳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일부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예배장소를 제공한 야손과 아리스다고, 세군도, 데마 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축출되고 나자,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의 사회를 소요케 한다는 이유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남아 있는 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자들이 들어와 교회를 소란케 하였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외부적인 핍박과 내부적인 이단사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때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편지입니다.
오늘날 혼돈을 거듭하고 제 갈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바울의 편지는 깨닫게 해 주는 바가 클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에게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받았던 성령의 감동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몇 십 년 전에 등반대가 세계 최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고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천후와 낙후된 기술로 말미암아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하고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등반대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짐을 운반하는 셀파(Sherpa) 중 한 사람이 에베레스트의 높은 봉우리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꼭 이기고 말 테다. 산들은 자라나지 않으나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성장한다.”과연 이 젊은이의 말은 옳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1953년 5월 29일,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는 세계 최초로 그 정상을 인간에게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영국의 힐러리와 함께 역사의 주인공이 된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가 있었습니다. 성장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바로 그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있지만, 그것은 미성숙한 신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인 부모의 양육에 의지하여 성장해 나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자라나는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작은 산에 가로막혀 절망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에베레스트 같은 산이라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는 몇 년이 지나도 그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배에 소홀하고, 십일조 생활도 잘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작은 어려움이 닥쳐도 실망하고 좌절하거나 급기야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신자는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도 아직 그 믿음이 어리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출석하고 헌금생활하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3주간 동안 전도활동으로 세운 데살로니카 교회에서 바울은,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그곳에서 쫓겨나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나름대로 바쁜 선교의 일정을 보내던 바울은 한편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정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 형편을 알아보도록 제자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서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정은 대체적으로 만족할 만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였는데(골 1:28-29),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자라나고 사랑이 풍성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소식은(살후 1:3-4) 바울을 뿌듯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2.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숙한 신앙의 증거로 '사랑'을 꼽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왜 바울은 믿음이나 소망보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임종을 지켜 보러 왔습니다. 임종을 맞는 기독교인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는 방금 막 나를 찾아온 세 친구를 만났다네. 그들 중 둘은 헤어졌지만 한 친구는 아마도 영원히 함께 할 걸세." "그들이 누구지?" "첫번째 친구는 믿음이었네. 나는 이렇게 말했지. '믿음이여 고맙네. 처음 예수를 믿은 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준 자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네.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것 같네. 이 는 자네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곳으로 가려는 중일세' 그리고 나선 소망이 찾아왔지. 그에게도 이렇게 말해 주었지. '잘 있게. 소망이여. 자네는 전쟁터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여러번 나를 도와주었지. 하지만 이제는 자네의 도움이 없어도 될 것 같네. 이젠 소망의 결실이 맺어지는 곳으로 갈테니까' 마지막으로 사랑이 찾아왔네. 나는 이렇게 말했지. '어서 오게, 사랑이여. 자네도 나의 좋은 벗이야 자네는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의 관계를 맺어 주었지. 내 모든 인생 여정에 자네는 언제나 기쁨이 넘치게 해주었지. 자네만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남겨놓고 갈 수 없네. 왜냐면 자네는 나와 함께 천국문을 지나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가야 될테니 말일세. 사랑이란 하늘에서 비로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야."
이처럼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을 가장 큰 은사로 꼽았던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도 성숙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남이 어려우면 함께 아파하고, 기쁘면 같이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바로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만 잘 되고 자기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이 잘되는 것을 축하해 주기보다는 시기하고 깎아 내리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주로 '무엇을 해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면 '무엇을 같이 할까'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면, '무엇을 해 드릴까요?'라고 묻습니다. 이처럼 성장의 증거는 외모의 변화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나면 사랑이 풍성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도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했습니다(살후 1:3).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무디가 말하기를 "사랑은 죄인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우리는 죄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고 나서야 그리스도의 편이 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게 해야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웃사랑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3.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환난 중에 '인내'하는 것을 성숙한 믿음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이웃 사랑의 길로 내려가는 것은 고난과 역경을 각오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겪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인내를 통해 믿음이 더욱 자라나기를 바란다고 권면합니다.
기독교인의 잘못된 편견 가운데 하나는,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없이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신앙적 태도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도 시험, 환란, 고난, 역경이 다 있습니다. 문제는 시련과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록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노구를 이끌고 고향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이나, 평생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 어린 나이에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려, 청춘의 대부분을 노예로, 죄수로 보낸 요셉,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평생을 광야에서 보낸 모세, 그밖에도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숱한 역경과 절망스러운 삶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내하고 이겨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의 집에 100세가 된 노인이 찾아와서 식사 한끼만 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라, 식사를 차려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식사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노하여 당장 그 노인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말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참아라. 그 노인을 내쫓지 말아라. 내가 그 노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100년이나 기다렸노라."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인내하지 못한 자기의 조급함을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시련과 고난, 시험과 역경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보다 더한 시간을 기다리시고 인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요, '부족함 없는 삶'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견딜 수 없는 로마의 권력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핍박, 그리고 이단자들의 공격 등 사면초가의 괴로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잘 참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 위로하며 인내해 나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에는 분명히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난 속에서 신앙은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그런데 현대인들은 조그마한 어려움도 참지를 못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위기가 닥쳐오면 그만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루더포드(Rutherford)목사는 그가 있던 감옥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왕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체험과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시련이나 고난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좌절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 바로 설 수 있기를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나, 풍파나, 역경이나, 시험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다 이겨나가시길 바랍니다. 사업실패, 실직, 가난, 질병 따위 때문에 주님을 떠나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것에 무릎 꿇기에는 여러분은 너무나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처럼, 그 어떤 환난 풍파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자라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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