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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 기적을 기대하라 (막4:35-41)

by 【고동엽】 2022. 9. 14.

예수 안에서 기적을 기대하라     (막4:35-41)

지난 한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며 제가 오랫동안 썼던 안경을 벗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교우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의견들 중에 제일 많은 의견은 세 가지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이 라식수술을 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어떤이들은 콘텍트 렌즈를 낀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목사님에게 병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의 은사가 나타나더니 당신의 나쁜 눈을 기적적으로 고쳤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라식수술을 한 것도 콘텍트렌즈를 낀 것도 아니고 기적이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안경을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졌습니다. 제 눈에는 아직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한해동안 한국교회, 우리 한소망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함께 부흥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믿음의 기적, 삶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의 제일 큰 유전중 하나는 텍사스에 있는 예이츠 유전입니다. 예이츠라는 사람이 살던 땅에서 발견되어졌다고 해서 예이츠 유전이라고 합니다. 예이츠는 이곳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사람이었고 그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여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극빈자에게 주는 구제금으로 살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바로 그가 죽은 그 땅에서 하루 12만 배럴이상 쏟아지는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돈 방석위에서 돈이 없어 그는 굶어 죽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믿음의 유전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유전을 파기만 하면 보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적의 씨앗을 주셨습니다. 그 씨앗을 심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유전을 묻어둔 채, 기적의 씨앗을 묻어둔 채 어리석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언제나 최선의 환경에서 최악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최악의 환경에서 최고의 평안을 누리며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 최고의 능력자 예수를 모시고 바다를 지금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II. 풍랑을 만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마가복음 4장은 씨뿌리는 비유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설교하시고 바로 그날 저물 때에 갈릴리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제자들을 종용하셨습니다. 그 밤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커지더니 물결이 배에까지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고 하는 너무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씨앗의 비유 다음에 예수님이 풍랑의 사건을 통해서 씨앗의 신비, 믿음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제자들에게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신비가 흐르는 바다입니다. 언제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 누구의 배를 삼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1. 본문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은 배를 젖는 저들이 애숭이라서 초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바람은 인생항해가 서툰 사람에게만 오는 것 아니지요. 건강하던 사람도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노련한 경영가들도 사업에 실패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능숙한 신앙인들도 시험을 만나고 유혹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2. 본문의 제자들, 요나처럼 불순종하여 도망하다가 만난 풍랑이 아닙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믿음대로 순종하여 살던 사람들도 시련,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를 모시고 가던 제자들에겐 일어났던 풍랑 마져도 멈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이 배 한가운데서 지금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이 난리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인생의 바다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파산을 겪습니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질병으로 신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무관심한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응답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때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야! 정말, 인생 모르겠다. 저희들이 어릴 때 어른들에게 인생에 관하여 물으면 어른들은 그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크면 알게 될거라고... 그러나 크면 클수록 더욱 모르겠는게 인생 아니었습니까?

여기, 분명한 한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다. 인생은 바람 부는 이 바다 한가운데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바다입니다. 이 인생의 고통은 누구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입니다.

어느 조간 신문에 이런 만화가 있었습니다. 한 뚱뚱한 아주머니가 약방에 들어갔습니다. "살빼는 약 주세요." 그래서 약사가 알약 한 병을 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알씩 먹을까요?" "이 약은 먹는 약이 아니요, 일어서서 방바닥에다가 약을 몽땅 쏟았다가 앉아서 다시 주워 담고 또 일어나서 약을 쏟고 다시 주워담고 하루종일 그렇게 하면 살이 빠질거요." 그리고 그 밑에 주석을 그렇게 달았습니다. 「약은 약사에게 살은 각자 자기가 빼자!」

실존주의자들이 볼 때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겁니다. 이 괴로운 인생의 바다에서 본문의 제자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신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한결같은 외침이 아니겠습니까?

III. 예수님: 풍랑속에 주무시다

1. 주무시는 예수님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시간에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깨워 일어나신 예수님,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마지막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것 보십시오! 제자들은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거기에 있는 것 아닙니다. 제자들이 진짜 놀라야 될 일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 주제 파악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 광풍속에서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인격! 풍랑, 비바람 가운데에서도 편히 쉬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의 그 믿음속에 우리가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셨다는 기록도 이 사건에만 나타납니다. 물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 밤이 되면 주무셨겠지요. 그런데 성경 상에 기록은 이 사건에서만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랑속에서, 질풍노도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 본문의 주무신 사건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상당히 의도적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아니고, 풍랑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든 더욱 거센 풍랑을 일으키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킬 수도 있고 하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산을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시며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풍랑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지난 주간에 어느 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하고 점심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나누면서 집사님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금 제가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잘 준비되고 완벽하게 준비되어 졌는데 그것이 안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정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고, 무너질 수 밖에 없고, 망할 수 밖에 없는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 있는데 거기서 결정적인 승리와 결정적인 축복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사건이 손바닥 뒤집히듯 너무나도 쉽게 역전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킬 수도 있는 분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할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환경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풍랑을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꾸짖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했는데 여기 꾸짖는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먼저 꾸짖으시고 그 다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먼저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시는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의 풍랑을 잠재우기 전에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다급한 인생의 바람을 끄신 다음에 내 마음의 풍랑을 치료해 주실 때가 있는 거지요. 아무튼 결론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꾸짖다"라는 이 단어는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이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귀신을 꾸짖으시되 이때 "꾸짖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귀신은 풍랑속에 있는 것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내 환경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꿉시다. "환경을 꾸짖어 주세요" 하기전에 "내 믿음 없음을 꾸짖어 주세요"

메리큐스 마네라는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은 사업에 부도를 내고 어디론가 몸을 숨기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다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되어 길거리로 나 앉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가 문방구에서 연필 하나를 훔치다 들켰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깨끗이 죽자! 아이들을 재우고 가스를 켰습니다. 가스가 스며 나오는데 정신이 몽롱해져 옵니다. 이웃집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그래 내가 죽을 생각을 하면서 왜 기도할 생각은 못했는고?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가스를 잠궜습니다. 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데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빈 집 하나를 얻어 새 삶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훗날 자녀들은 모두 멋지게 성공을 합니다. 그의 자서전적인 글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 마지막 결론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용기로 바꾸어 보십시오!" "백 번의 탄식보다 한 번의 기도가 당신에게 기적을 가져다 줄 것이요. 백 번의 절망보다 한 번의 믿음이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 줄 것이요."

IV. 예수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고난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마다,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를 캐묻고 다닙니다. 그러나 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그와 같은 고생을 해야 했는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1. "그 시련, 풍랑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시련을 당할 때에 고독한 인생길을 걸어 갈 때에 고아와 같이 너희들을 버려 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너희를 혼자 두지 않는다. 늘 동행하신다. 우리 인생 항로에 동행하신다. 당신의 고난의 배 위에 동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내 인생의 선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여행을 하는 인생 바다라 하면 너는 평안할찌어다!" 마지막에 배가 뒤집혀져 죽으면 제자들만 죽습니까? 예수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선장 되십니다.

어떤 한 소설가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섭게 바람이 몰아쳐 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하나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깡총깡총 뛰어놀며 재미있게 갑판을 오가지 않겠습니까? 아이의 손을 꼭붙들고, "얘야, 너는 무섭지 않니! 얘야, 너는 저 풍랑이 무섭지 않니?" "아저씨, 제가 지금 선장실에서 나오는 길이예요. 우리 아빠가 선장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빠의 얼굴을 보니 아빠의 얼굴이 편안했어요, 아무일 없을 거예요 아저씨!"

여러분 두려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라. 주님의 얼굴이 평안하시거든 여러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아무 일 없다 말씀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 마침내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단어가 하나 나오고 있습니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크다고 할 때, "빅(Big)"이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좀 더 클 때, 영어로 "그레이트(Great)"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너무나 엄청나게 클 때는 "메가톤(Meg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오늘 본문에 메가톤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 메가톤급 광풍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사 아주 잔잔해졌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메가톤급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메가톤급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메가톤 광풍을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메가톤 고요가 흘렀고 그 엄청난 사건을 보고 제자들은 메가톤 감격, 메가톤급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입니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에는 숫자나 장비에 따라서만 결판이 나는 것 아니지요. 뜻밖의 편이 승리 할때가 있는 겁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미디안의 수십만을 무찔렀습니다. 군대에도 숫자나 장비를 초월하는 "사기"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의사들도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신념과 의지가 중요하답니다.

난소암으로 투병하는 소녀에게 아빠가 문안을 왔습니다. 딸아이의 손에 조그마한 돌맹이 하나를 꼭 쥐어 주었는데, 아빠의 글씨로 그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딸아! 예수님과 함께 기적을 기대하자!"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과 함께 기적을 기대하자! 매일 아침 그 돌맹이를 붙들고 기도하는 소녀를 바라보고 약을 투약하러 왔던 간호사가 말합니다. "기적은 매일같이 일어난단다. 오늘도 기적은 일어 난단다." 용기를 가지고 꿈을 가지고 기도했던 이 소녀, 이 투병생활에 승리하고 퇴원하게 됩니다.
상황이 불리해 보입니까? 여러분이 타고 있는 배에 풍랑이 일고 있습니까? 예수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믿음에는 이적과 기사가 있습니다.

V.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살자

미국 어느 주에 여러달 동안 비가 오질 않았습니다. 땅은 뽀얀 먼지로 가득차 있었고 식물들은 하나 둘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시내 모든 교회들이 어느 토요일 아침 광장에 모여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교회들은 영감을 줄 수 있는 믿음의 징표를 가져오도록 교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나온 사람, 기도서를 들고 나온 사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십자가 하나씩을 들고 나왔습니다. 묵주를 목에 걸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마리아상을 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아예 커다란 예수님상을 온 가족이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회가 마쳐질 무렵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비가 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가져왔던 믿음의 징표들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입을 맞추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광장을 10살쯤 돼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조용히 빠져 나가며 자신이 들고 나온 징표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펴들고 비를 맞으며 조용히 광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의 믿음이 비를 오게 한 것이지요, 어린 꼬마 아이 하나, 비오게 기도하자고 할 때에 이 비가 온 것처럼 우산을 들고 기도의 광장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시37:9)
믿고 구한 것은 이미 얻은 줄로 믿으라!
예수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이미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본문의 엄청난 기적 앞에 제자들의 마지막 물음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마지막 결론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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