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심방사역 (요한21:1-17)
한 성도가 구약성경을 읽다가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신혼 초기 남자는 군대 가는 것도 연기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님께서 대답을 하셨습니다. "집에서 더 무서운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치유가 필요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영적 도움이 필요없는 가정도 없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셀리더들이 그렇지만 김 집사님 역시 셀가족을 참 잘 돌보는 훌륭한 셀리더입니다. 셀모임때 마다 큰 은혜와 감동을 경험합니다. 셀가족을 잘 격려하고 세워갑니다. 그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치유합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정작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석 달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사장의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차 사장은 김 집사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도가 깊어가면서 주일도 출근을 해야 했고 밤이 늦도록 근무하기가 일수였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주일 예배에 오면 말씀은 은혜가 되지 않고 목사님의 따뜻했던 눈길도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셀모임에 가도 성령의 임재와 감동은커녕 셀 가족들의 무거운 얘기가 짜증스럽게만 들리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셀리더로서의 사역도 사명도 비전도 내려놓고 싶어졌습니다.
이 무렵 딸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속교회 목사님의 심방을 받고 김 집사님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셀가족들의 방문과 위로가 줄을 이었습니다. 아! 이게 교회구나. 아! 이게 셀의 힘이구나. 마침내 예배가 살고 감동적인 셀모임도 회복되고 셀리더로서의 자세도 새로워졌습니다. 이게 심방의 능력이요 상호 책임, 상호 방문의 중요성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여기 우리를 주목시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 후에' 라는 단어와 '또' 라는 단어입니다. 그 후에는 물론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을 말한다고 하면 그 전은 요한복음 20장을 일컫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후에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심방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시는데서 비롯되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귀한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이 거룩한 심방의 사역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할 때마다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심방사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까!
1. 부활하신 예수님, 제일 먼저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심방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드려야겠다 생각해서 향을 준비하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습니다. 무덤가에서 절망가운데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절망의 밤, 탄식의 밤이 예수께서 찾아오시자 환희의 아침으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사역은 슬픔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울고 있는 그 자리, 절망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기대하세요. 믿으십시요.
2. 두 번째, 제자들이 두려움에 젖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근간의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량으로 체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자들이라고 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십자가에 매달리는데 십자가 곁에도 가보지 못한 제자들은 부끄러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다락방 한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불안도 근심도 걱정도 자책도 눈 녹듯이 순식간에 녹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불안의 다락방이 감탄의 도가니로 바꿔졌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죄책감을 녹이고 불안 공포를 몰아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혼자 이 세상 한복판에서 두려워 떨도록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당신 곁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3.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하고 있던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를 심방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던져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 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울고 있을 때에, 집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삶의 현장에서 빈 그물을 들고 낙심해 있을 때에, 우리 예수님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절망이 환희로 바꿔집니다. 불안이 평안으로 바꿔집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집니다. 제자들에게 또 나타나셨던 예수님! 오늘도 우리를 또 찾아오십니다.
II.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교회의 심방사역이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담임목사로부터 위임받은 교역자나 셀목자가 교우를 방문하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세 번째 나타나신 본문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하니 일곱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 일행이 고기 잡으러 간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가 타락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갔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나 지금 제자공동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이 상황 속에서 저들에게 닥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 먹고 사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맏형되는 베드로에게 가장 큰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이 제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앞장서서 내가 한 번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고기가 전혀 잡혀 주지 않았습니다.
3절 마지막에 보면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죄 짐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이 우리 생계의 문제, 일상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못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베드로 일행은 차리리 안간 것만 못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고기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밤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엄습해 왔을 것이고 피곤에 피곤이 찾아왔습니다. 물고기조차 제자들을 비웃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슬픈 고백이지요. 예수 없는 인생의 허무를 얼마나 적절히 표현한 말입니까?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한 셀가족, 교우들에게 꼭 필요한 사역이 교회의 심방사역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짖눌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 꼭 필요한 사역이 심방 사역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교회를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해결해 주는 사역이 심방사역입니다.
로마서 1:11-12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심방은 주의 위로와 신령한 은사를 나누므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사역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 위하여 심방하기를 원한다" 여기 '나누다' 영어의 impart에서 임파테이션(impartion)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심방의 또 다른 이유는 임파테이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기름 부으심을 성도들 가정 가정마다 나누기 위해서 성령의 임파테이션을 위해서 우리는 가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된 교회에 주신 축복과 부흥의 몫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정마다 나누는 것입니다. 축복의 임파테이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과 비전이 있습니다. 이 비젼을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비젼의 기름 부으심, 비전의 임파테이션을 위하여 우리는 가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셀의 게으른 심방 사역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11:16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라고 말씀하므로 교회의 게으른 심방사역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심방 사역은 셀 안에서 없어진 자를 찾아내는 사역입니다. 흩어진 마음을 되돌리고 상한 심령을 고치는 사역입니다. 강건한 자에게 더 높은 비전을 주는 사역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자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사역입니다.
실패의 빈 그물을 들고 좌절감에 젖어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 이제는 깨끗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에 나를 도와줄 아무런 사람도 내가 찾지 못할 때에 마지막 벼랑에 서 있다고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서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 셀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교회 심방사역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III. 예수님을 영접하라(심방준비)
이 본문은 5절 말씀으로 이어져 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퍽 재미있습니다. "얘들아!" 얘들은 눈앞에 누군가 있으면 있다고 하고 없으면 없는 줄 압니다. 눈앞에 있으면 나를 도와줄 수 있고 없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군대 장교생활 할 때에 두 아이를 얻었는데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봅니다. 아이가 아빠 얼굴을 알아 볼 때쯤 되어서 아빠 얼굴을 알아보고 생글생글 웃으면 간장이 녹지요. 그런데 아이를 쳐다보다가 장난을 칩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이가 울먹울먹 울려고 합니다. 금방 눈앞에 있던 얼굴이 온데 간데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손바닥을 치우면서 까꿍! 그러면 깔깔대고 웃지요.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금방 눈앞에 있던 아빠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빠 어디 갔지?' 다시 울려고 합니다. 손을 떼면서 까꿍! 그러면 아이는 깔깔대고 웃습니다.
아이들은 이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손바닥으로 가리기만 해도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줄 압니다. 이게 얘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지금 제자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얘들 생각이고 얘들 신앙수준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죄 짐을 담당하셨습니다.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부딪힐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장 엄청난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그분이 안보인다고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분인양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들 생각, 애들 신앙입니다.
물고기 잡으러 간 것 잘못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노력하며 땀흘리며 일하고 공부하는 것 잘못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 없이 하겠다는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애들 생각을 버리십시오. 실패의 밤을 지내고 계신 분 계십니까? 사업의 빈 배를 안고 목놓아 울어야 하는 분이 계십니까? 얼키고 설킨 문제 때문에 울부짖으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나오신 분 계십니까? 실망과 좌절의 밤을 보내는 빈 그물을 들고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깨끗이 포기하고 이제는 내 살 길이나 찾자고 생각하고 계신 분 계십니까? 바로 그 생각이 얘들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잡힐 줄 알았습니까?「이제는 내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심방사역의 가장 큰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제 애들 신앙을 벗어나 믿음의 성장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애처럼 젖이나 먹이고 기저귀나 갈아주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대심방을 통해 교회에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신앙 성장단계 즉 성공의 사다리를 점검하고 다음 단계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각자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여러분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 삶의 비전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인지, 예배 생활은 건강한가? 셀 생활은 행복한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 가는 복음전도 사역의 비전이 확실한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사역은 건강한가? 가정은 행복한가? 점검해 드리고 다음 단계로 안내해 드리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심방받는 가정에서는 마르다처럼 접대에 지나친 신경을 쓰기보다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심방을 받을 때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멋진 태도가 아닙니까? 할수만 있으면 심방이 약속된 시간에 많은 가족이 모여 있으면 좋습니다. 복된 사람은 복받는 자리를 지킬 줄 압니다.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기다리듯 가정 분위기를 예배 분위기로 준비하고 예물을 준비하고 찾아오시는 목사님과 심방대원들을 기다리면 예수님을 영접한 복을 받습니다.
IV. 심방의 목적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심방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 왜 찾아 오셨을까요? 아직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빈 그물을 들고 새벽바다 저어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파도소리만 출렁 출렁 들려오는 갈릴리 바다에 고아들처럼 버려둘 수가 없어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외로운 제자들, 절망으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을 그냥 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찾아 오셨습니다. 교회의 심방사역은 우리가 힘들 때도 기쁠 때도 주님은 나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세러머니입니다.
고독한 분이 있습니까? 망망한 바다에서 흔들리는 배 한 척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 줄이 없어 외로워하시는 분들! 안심하십시오.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2. 우리 예수님이 왜 베드로를 심방하셨습니까?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실 때 모닥불가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베드로의 실수나 잘못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십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세 번에 걸쳐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는 모두 베드로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 심방을 해야 합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받은 상처, 자신의 실수와 약점 - 이 모든 것들을 치유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만남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3. 왜 찾아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있어야 하는 자리는 갈릴리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성령 받아 거기서부터 복음운동 즉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해야 됩니다. 주님은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방황하고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내가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내가 비전을 상실하고 세상에만 붙들려 있을 때 예수님 날 찾아오십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 전도하고 있을 때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로마를 잠시 떠나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교인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로마 시가지를 벗어나 교외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새벽녘 로마 언덕을 넘어가고 있을 때에 아침 햇살을 타고 예수님께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야, 네가 버리는 양 무리를 돌보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또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위하여 로마로 내려간다. 거기서 베드로는 자신의 망명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순교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명을 회피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4. 왜 찾아 오셨을까요? 축복하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패한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빈 그물 들고 살아가는 모습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 빈 그물 채워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찾아오신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 이름은 구원의 이름입니다. 회복의 이름입니다. 축복의 이름입니다. 권능의 이름입니다. 때문에 심방을 받을 때 성도들은 기도로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 대심방을 통해 은혜의 빈그물이 채워지고 텅빈 마음이 말씀으로 채워지고 실패했던 사업의 빈 그물이 만선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V. 오른편에 던지라(피심방 가족의 결단)
목사님의 심방에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내 믿음이 향상 되어야 합니다. 성장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이어지는 6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이 무엇입니까? 우선 시간적으로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고 공간적으로 고기가 있는 곳을 찾아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며, 정신적으로 보면 말씀에 순종하여 던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른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갈라 세우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양은 오른편으로 염소는 왼편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여기서 오른편은 구원의 편이요, 왼편은 멸망의 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왼편 강도는 멸망을 받았고 오른편 강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전도서 10:2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혜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가 우편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자리가 좌편이요 좌익입니다.
시편 16:11에 보면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기 영원한 즐거움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세상은 좌편이요 천국은 우편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언제나 오른편을 예수님편 구원의 자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주님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은 네 생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사명도 버리고 천국도 버리고 예수님도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른편에 던지라] 이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주님께 돌아 오라. 너의 사명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인생의 주사위를 예수님편에 던지라!」 말씀중심, 신앙중심, 순종중심으로 살아가라, 생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울어야 하다보니까 건강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신앙도 그만두고 기도도 그만두고 말씀을 의지하는 것 깨끗이 포기하고 내 재주대로 세상 방법대로 한 번 살아보자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바로 거기가 왼편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있는 고난의 자리를 오른편의 삶으로 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삽니다.
인생의 오른편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커다란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주어진 이 상황을 오른편으로 돌릴 절호의 찬스, 기회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입니다. 이번 대심방 기회를 통해 모든 가정들이 오른편으로 돌아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한 사람은 열심을 내십시오. 절망한 사람은 꿈을 가지십시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할렐루야!
VI. 축복 만선! 153마리(심방의 결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순종하여 던졌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았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고 하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마리라. 153마리! 여기에 신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요. 153마리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숫자였다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면 불가능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능이 능력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여러분의 인생의 신기록이 수립되기를 축복합니다. 사역자들의 심방을 통하여 예수님의 방문을 경험한 이후 여러분 인생에 대기록이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오른편으로 돌아온 사람의 복입니다.
옛날 신앙생활을 잘하던 문구용품제조 사업가가 도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큰 위기 앞에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를 하는데 자신의 허물과 실수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하나씩 하나씩 주마등처럼 생각이 났습니다. 주일을 범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십일조를 도적질했습니다. 깊이 있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성경 읽고 성경 읽다 기도를 하는데 오늘 본문을 읽다 말고 153이란 숫자에 눈이 멈춰섰습니다. 그래서 만든 제품이 「모나미 153」인데 이쁘지도 별로 편리하지도 않은 이 볼펜이 자그만치 50억 자루가 팔렸답니다. 지금까지 다른 볼편의 기록은 몇 천만이 고작이었답니다.
여러분 주님의 방문을 통해 단위가 다른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본문 1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입니다. 고기가 153마리가 아니라 1,530마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물이 찢어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그물이 찢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그물은 고기가 잘 잡히지도 않거니와 걸핏하면 잘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져 불행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에 큰 축복을 받고 건강의 그물이 찢겨진 사람, 행복한 결혼을 하는 듯 하였으나 사랑과 가정의 그물이 찢어져 슬피우는 사람, 세상적으로 성공하는가 싶더니 인격과 행복의 그물이 찢어지고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출세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신앙이 찢겨진 어리석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른편에 던진 그물, 주님께 순종한 그물, 예수님의 명령대로 산 그물, 신앙대로 말씀대로 산 그물, 그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합니다. 오른편으로 돌아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그 복으로 순종함으로 얻은 복은 그물이 찢겨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가족 여러분,
이번 대심방 기간을 통해 심방하는 사역자들도 행복하고 동행자들은 날마다 심령의 부흥의 맛볼 뿐만 아니라 가정마다 주시는 새로운 복을 자신도 누리고 특별히 심방 받는 가정 가정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한없는 복을 받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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