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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의 사역 (사도행전 9:26 ~ 31)

by 【고동엽】 2022. 9. 25.

격려의 사역   (사도행전 9:26 ~ 31)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26-31

   여섯 살짜리 아들과 네 살짜리 딸을 둔 엄마가 어느 날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네 여동생을 잘 돌보고 있어라” 하니 “네, 잘 돌볼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돌아오실 때까지 동생을 어떻게 잘 돌볼지 궁리하던 아이의 눈에 여러 색깔의 잉크병이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동생을 앉혀놓고 붓에 잉크를 묻혀 동생 얼굴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리다보니 빨간 잉크, 노란 잉크, 여러 색 잉크가 사방에 튀고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와 보니 집안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림 하나를 번쩍 들더니 “야! 너 화가구나. 이게 네 동생 얼굴 아니니?”하고선 아들을 안고 키스해주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후에 18세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된 벤저민 웨스트입니다. 그는 왕실의 역사화가로서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까?” 물으면 그는 “우리 엄마의 키스가 나를 화가로 만들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런 때 어떻게 반응하셨겠습니까? “아휴, 이럴 수가 있나. 애 좀 보라고 했더니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 그걸 그림이라고 그렸냐?”하고 아이를 책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격려의 키스를 해 주었어요. 지혜로운 어머니의 격려의 키스를 잊지 못한 아들은 자라서 위대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격려가 필요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에 설교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이 낙심에 빠졌습니다. 공원에 나가 ‘이제는 다 그만 둬야겠어’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지나가며 “아, 목사님이시군요. 제가 목사님 설교 때문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아십니까?”하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자서전에서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앞에서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새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는 그 한마디에 헤매던 목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 전에는 공기를 안 마셨나요? 칭찬을 받고 세상이 환해지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기가 얼마나 맛이 있는지, 살아나서 그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격려를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들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사울을 누가 격려해주고 싶었겠습니까? 오히려 죽이고 싶었겠지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전에 너무 못되게 굴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요,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게 관심이 없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남을 자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자주 비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언젠가 여러분도 비판할 것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늘 비판합니다. 오랫동안 비판을 연습해서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 잘하는 사람, 언제나 옳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함도 있고 가끔 실수도 있는 사람이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하며 편안하게 여길 텐데, 실수 한 번 없이 언제나 완벽한 사람은 겁이 납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늘 굳어있어요. 또 옳아야 되고 또 잘해야 되고 틀리면 안 되니까 늘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긴장하게 만듭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느 남편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제 아내가 하도 제 잘못을 지적해서 숨이 막혀요.” 집에 가면 또 무슨 지적을 당할지 몰라 때로는 정말 도망가고 싶답니다. 아내가 언제나 옳은 말만 하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자기만 옳은 사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만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힘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제가 학생 때 다니던 교회에 저보다 열 살 정도 위인 분이 계셨어요. 그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분인데, 특별히 훌륭한 것은 말을 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만 오시면 모임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어요. 그분이 하도 말을 잘하니까 다른 사람은 말을 해봤자 본전도 못 찾아요. 우리는 그 분을 참 똑똑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제가 미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근 40년 만에 그 분을 다시 만났는데 여전히 말이 많으셨어요. 똑똑할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혼자서 독점하면 정말 재미없지요.

   비록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도 억센 사람이니까요. 그가 구원 받기 전에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400리를 쫓아다니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400리라면 지금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를 타고 금방 가겠지만, 2천 년 전에는 걷거나 당나귀를 타고 갔을 텐데 도대체 몇날 며칠이 걸렸겠습니까! 이렇게 악하게 살았던 사울이었습니다. 예수 믿어 변했다 한들 과거에 그렇게 악질이었던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서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 건드렸다간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혹시 스파이인지도 모르지.’

   모두 사울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 36절을 보면 본래 이름이 ‘요세스’ 또는 ‘요셉’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는 골로새서, 갈라디아서까지 성경에 17번 정도 나오는데 본명은 딱 한 번 나오고 계속 바나바라 불리고 있습니다. 격려를 잘 하는 그의 특징을 따라 사도들이 본명 대신 바나바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말이고 ‘나바’는 격려라는 말로 “격려의 아들” 즉 격려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별명은 그저 한두 번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늘 습관적으로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소개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는 참 나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뜨게 된 일, 이제는 변하여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고 다니는지를 말하면서 사울을 받아주도록 설득했습니다. 바나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서로 화해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언급한 성경을 보면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좋지 않은 성품을 가졌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께 드리시면서 “예수님이 치료해서 새롭게 만들어 돌려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보다 예수님을 먼저 믿은 사람입니다. 사울을 도와 사도들과 만나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사귀도록 해주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선교사로 맨 먼저 뽑힌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경에 “바나바와 사울”, “바나바와 사울”, 이렇게 바나바가 리더로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4장부터 “사울과 바나바”로 리더십이 바뀝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질투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질투하지요. ‘내가 먼저 믿은 리더인데 사울의 이름을 앞에 붙이다니!’ 그런데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서 그런 사소한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사울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사회에는 사람을 마구 내리 누르고 무시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마에 부모의 키스를 받기는커녕 뺨을 맞고 자란 아이들이 많아요. 그 가슴에는 인정받지 못한 상처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40대 초에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 전역을 다니며 청소년 수련회 강사로 사역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 나이의 목회자 중에 영어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거기서 놀란 것이 있는데, 설교를 마치고 기도시간이 되면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기에 저렇게 통곡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대화를 해봤더니 통곡을 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부모님에게 야단만 맞았으니까요. 잘 할 때는 입을 다물고 계십니다.

    사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 하면 칭찬을 잘 하지 않고 ‘그래, 저게 내 자식이야!’ 그저 대견스럽게 바라만 보십니다. 칭찬해주는 습관이 안 되어있어요. 우리가 칭찬받고 자라난 적이 없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 형제는 아홉이었으니까 부모님들이 칭찬하기 바빠서 칭찬을 별로 안 하셨어요. 그런데 한번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모인 곳에서 어머니가 저를 칭찬하셨어요. 제가 마당 저쪽 구석에 혼자 있는데 저에 대해서 막 칭찬을 하시는 겁니다. 일생에 딱 한 번 들었는데, 어머니가 칭찬을 너무 잘 해주셔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신이 납니다. 자긍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우리 한국 부모님들은 자식 칭찬은 아끼면서 잘못했을 때는 반드시 지적합니다. 그 미주의 교포 아이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칭찬과 사랑의 표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잘못할 때는 늘 야단을 맞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쁜 놈!”하고 자기를 책망하는 말만 귓가에 맴돈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마음을 잡고 기도하세요. “하나님, 저를 바나바로 만들어 주옵소서.” 잉크가 쏟아져 엉망이 된 방을 보더라도 “네 동생 얼굴을 참 잘 그렸구나!”하고 키스해주세요. 부엌에 가서 혼자 한숨을 쉬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격려가 필요합니다. 바나바처럼 격려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격려를 안 해본 사람이 있으면 예배 끝나기 전에 꼭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응답이 됩니다. “하나님, 제가 그 동안 격려에 인색했습니다. 제 입술과 마음과 태도를 변화시키셔서 바나바처럼 격려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오늘도 누군가 한 사람을 격려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어느 기업의 회계사가 자살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회사 돈을 빼돌리다가 걸렸나’ 하고 자세히 조사했지만 회계장부는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정말 깨끗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부책 사이에서 쪽지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간단하게 이렇게 적혀있었어요. “나는 30년 동안 격려의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제는 지쳤다.” 30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회사의 재정을 잘 돌보았고 빈틈없이 정리했건만 자기를 한 번이라도 격려해 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누군가가 격려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누구를 격려해 줄까?” 격려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바나바의 격려를 받아 드디어 사도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달라졌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용기를 내어 밖에 나가 예수를 전했습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9절). 사울은 본래 전투적인 사람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추격하며 죽이고 가두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고 나서도 처음에는 여전히 전투적이었어요. 예루살렘 길거리에 나가서 철학을 좋아하는 그리스계의 유대인들과 입에 거품을 물고 논쟁을 하였습니다. 사울이 말로 싸움을 얼마나 잘 했던지, 그 사람들이 사울을 너무 미워하여 죽이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논쟁은 도움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논쟁을 잘 해도 논쟁에서 이기면 사람을 잃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너무 똑똑한 척하면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신앙의 간증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예수 믿고 어떻게 변했는지, 기도해서 어떻게 은혜를 입었는지, 하나님께서 내 병을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간증하면 다 듣습니다. 여러분이 심하게 논쟁을 하면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욕하고 죽이려 할런지 몰라요. 논쟁은 하지마시고 간증을 하거나, 전도폭발훈련을 받아서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울은 본래 싸움을 잘 하던 억센 사람이니 아직 그 성격이 성화되지 않아서 옛날 모습이 마구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이 사람이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바나바가 나서서 제자 몇 명과 협력해서 사울을 북쪽 해변의 사사리아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사울의 고향 다소의 자기 집으로 보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다가는 생명이 위험합니다. 고향에 가서 쉬면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으며 지내시오.” 사람을 돕고 살 길을 찾아준 것이 역시 바나바의 특징입니다.

    사울처럼 논쟁적인 사람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없어지니까 교회가 편합니다. 31절을 보세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똑똑하고, 말 잘하고, 논쟁을 좋아하고, 언제나 옳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눈뜨고 못 보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 하나가 떠나니까 “교회가 편안해지고 점차 왕성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가 있고 믿는 사람의 수가 많이” 증가했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오늘부터 바나바의 은총이 시작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교회가 평화롭고, 여러분 때문에 교회가 왕성해지고, 여러분 때문에 성령의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분이 믿는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우리 모두에게 바나바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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