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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생명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민 14:26-38)

by 【고동엽】 2022. 9. 14.

 생명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민 14:26-38)

오늘 말씀은 지난주일 생각했던 말씀을 되새기는 것에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말씀의 제목은 <애굽에도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였습니다. 애굽은 노예의 땅, 고통의 땅이었지만, 거기도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있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임하던 밤에 짐승의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애굽 사람이 죽던 그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살려주시고, 재앙 중에서 보호하시고, 시련 중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넘치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참 두렵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말씀과 반대입니다. 본문은 백성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세요. <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충격적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못 읽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32절을 보세요.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한 번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는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시더니, 이제는 죽인다고 하십니다. 언제는 보호해주시더니, 이젠 버리십니다. 언제는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시더니, 이제는 죽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변덕스러워 보이는 하나님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애굽의 맏아들이 죽던 밤에만 그들을 살려주신 게 아닙니다. 그 후에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습니다. 홍해 바다에서 죽을 사람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쓴 물이 단 물 되게 하셨습니다. 늘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랬던 그 분이 왜 살려주셨던 사람을 이제 와서 죽이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들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합니다. 34절을 보세요.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라! <난 너희가 싫다. 내가 싫어하는 자에게 오는 결과가 무언지 아느냐? 죽음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을 싫어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게 오늘 말씀의 관건입니다. 왜 싫어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주시고 보호하실 때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그들을 죽게 하실 때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물론 달라진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때는 애굽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광야입니다. 그 때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인입니다. 이런 점들도 다른 것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싫어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보호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을 기꺼이 모든 것을 던져 전진하고자 했습니다. 움직이고 달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나안으로 가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와 보면 그들은 변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되돌아서려고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미 잘 아시지요?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시십 일 동안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탐을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요, 결정된 바입니다. 정탐을 가는 목적은 <어떤 길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갈 것인가>를 알기 위한 전략적 정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을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가나안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신장이 크고 성읍은 높고 견고하다. 우리는 거기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가나안으로 갔다간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차라리 노예로 살더라도 애굽이 더 낫다. 돌아가자!> 이 보고를 받은 백성들은 모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더 이상 가나안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빠져 안주하고 있습니다. 모험심 따위는 다 사라졌습니다. 이게 바로 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은 두 가지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객관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다>고 할 것입니다.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유식하든지 무식하든지, 어른이든지 어린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모든 생명은 다 동일하고, 다 귀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가지는 역동성과 열매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정말 위대한 것을 이룹니다. 그런 생명은 반드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생명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합니다. 사형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회는 사형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생명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사회적으로 동의하여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형제 폐지 운동은 앞에서 말씀드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데 근거한 것이라면, 사형제도는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한 것은 아니다>라는 나중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생명이 다 가치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생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존엄성을 가지고 존중되려면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서 생명을 주신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 가지 큰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를 누리게 하려고 살리신 것입니다. 둘째는 가나안 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풍요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배후에 더 큰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와 땅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실 때 그들은 <자유를 얻자, 땅을 얻자,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자. 자 일어나라. 앞으로 가자. 어떤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모두 전진하자!>,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셨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이런 목적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살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가려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포기하고 되돌아설 때 하나님도 우리를 포기하십니다. 그 순간 우리 생명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려고만 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 같습니다. 아이가 공부에 대한 집념이 강합니다. 비록 성적은 오르지 않지만,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밤을 새우고, 살을 꼬집어가면서 공부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부모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치려고 애를 씁니다. <끝까지 해 봐라.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널 밀어줄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녀석이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할 생각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그저 빈둥댑니다. 때려도 달래도 안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부모도 포기합니다. <저 녀석 뒤를 밀어줄 바에야 나나 먹고 마셔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그 자녀는 죽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데는 다 목적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가게 하려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가려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생명을 도로 거두실 것입니다. 이미 가치가 없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밥만 축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생명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게 아니라, 치워야 할 오염물질처럼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축복받은 생명이 되길 기원합니다. 축복된 생명은 단지 숨쉬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을 향해 나가고자 몸부림칠 때, 그 생명은 축복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가슴에 가나안이 있습니까?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계십니까?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가나안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는 오직 가나안 땅만 바라봅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앞만 봅니다. 주님도 말씀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작은 일 따위는 다 초월해서 삽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자나깨나 가나안뿐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먹어 입을 즐겁게 할까, 어떤 옷을 입어 맵시를 낼까, 이런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가나안 땅에 대한 집념이 흐려지자, 엉뚱한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당장 먹는 음식에 불평이 많았습니다. 고추와 부추 같은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당장 잠자리에 불평했습니다. 눈앞의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별 가치가 없는 것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에 바쁘고, 무엇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까? 또한 고대 그리스 시대에 극형에 해당하는 죄수들에게 내리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물통을 놓고 물을 번갈아 옮겨 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왜 가장 힘든 형벌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을 지속해야 하는 고통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매일의 삶 속에서 목적과 의미를 찾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위해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들이 백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쇼핑을 하고, 길거리를 걷도록 하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앞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자유진영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세계 청년대회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오늘의 청년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대두된 고민은 우리가 예상했던 바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나타난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놀랍게도 자기 목숨과 젊음과 청춘과 정열을 던질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젊음을 바칠 수 있는 대상, 내 삶을 활활 불살라 버릴 수 있는 대상, 마음놓고 정말 의미 있고 정말 진지한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서 내 삶을 던져 투쟁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들은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가슴이 섬뜩한 말입니다만, 그들의 목표는 전세계의 공산화였습니다. 자유민주국가의 젊은이들보다 공산주의국가의 젊은이들의 목표가 더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는 영도를 복음화해야 합니다. 부산을 복음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나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불편함도 감수해야 합니다. 과감한 투자도 해야 합니다. 희생도 해야 합니다. 남보다 먼저 나서야 합니다. 남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사람이 지도자라면 우리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구자입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가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겨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맞히지 못할 것이다!>란 말을 아십니까? 성공은 성공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만 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밤에 조용한 장소에 앉아서 다음날에 대한 계획을 대충 잡아 봅니다.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그것을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해 본다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추측하면서, 바라면서 인생을 살아가지 마십시오. 오늘, 목표를 다시 정하고 그것을 위해 일하십시오. <겨냥하라, 그러면 적중시킬 수 있다!>
부디 위대한 것을 겨냥하시길 기원합니다.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다그 함마슐드>의 수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나가는 콜럼버스의 배에 탄 한 선원이 항상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구두수선공인 그는 늙은 주인이 죽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가게를 인수할 수 있을지 염려했습니다.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려는 위대한 항로에서 그는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초라한 꿈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전진하는 인생이라면 선원은 뒤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위대한 꿈은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1776년의 정신(The Spirit of 1776)>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있고, 두 번째 사람을 북을 치고 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자기의 머리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화가는 미국을 건설해 나가는 데에는 늘 세 개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피리를 부는 사람은 지금까지 선배들이 구축해 놓은 자유와 물질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는 것을 상징합니다. 북 치는 사람은 옛 군대의 전진 신호로서 쉬지 말고 전진하라는 개척 정신과 근면, 노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물인 근심하며 생각에 잠긴 사람은 백 년, 이 백 년 후에 살아갈 미국의 후배 시민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남길 것인지를 늘 반성하고 비전을 갖는 정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피리만 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긴 미래를 내다보면서 꿈을 꾸고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1월 1일에 계시던 자리에서 좀 더 앞으로 전진하셨습니까? 가나안이 조금 더 가까워 지셨습니까? 아니면 제자리에 서 계십니까?
우리 나라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선배들이 이룩한 경제 성장의 바탕 위에서 피리 불고 춤만 추는 젊은이들이 많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백 년을 내다보는 꿈이 있어야 하고,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6.25 전쟁 와중에서 우리를 살려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살려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이 기회를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전진해야만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무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달팽이에게 말했다. <너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사과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러자 달팽이가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본문에는 축복된 생명의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모두가 죽는 와중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생명입니다. 그 주인공은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전히 가나안을 향해 나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모두 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김운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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