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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87쪽에 있는 글입니다.
5.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한 죄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장 19~25절
로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의해서 읽어 보면 그 내용이 매우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그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거벗기십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그의 제단 위에 올려진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이와 같은 네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벌거벗은 인간
18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요, 죽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이토록 진노하실까요? 도대체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이 시간 우리가 펴 놓은 본문 말씀에는 이 질문에 대한 소상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발가벗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나 악하면 내가 진노하겠는가? 똑똑히 보여 주지." 라고 하시면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사정없이 벗겨 놓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면 대개가 몹시 들어가기 싫어하는 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엑스레이 촬영실입니다. 무엇인가 몸에 이상한 병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이 우리로 하여금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게 만듭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엑스레이 촬영 기사로부터 "속옷까지 다 벗어요" 라는 거북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 못하고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몸에 이상이 있나 없나 세밀히 찾아내야 병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병을 찾아내기 위해 옷을 벗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우리의 죄악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벌거벗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이 우리를 벌거벗기시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내가 이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하고 스스로 태연스레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자연인의 자리로 되돌아가 인간 본래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입버릇처럼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사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요?
자기 자신에 관해 정확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으로 더욱 바싹 다가가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모든 경건치 않은' 죄입니다. 경건은 원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경건치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경건을 영어로 'Godlessness' 라고 합니다. 참 묘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라는 'God'에, 없다는 의미의 'less'와 명사형 접미사인 'ness'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 53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말씀이 뜻하는 내용이 바로 불경건과 같은 것입니다. 불경건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다음 말씀이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21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불경건입니다. 불경건이란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죄가 특별히 고약한 까닭이 있습니다. 21절 초두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고 저지른 죄는 비교적 추궁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에 나쁜 줄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고약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짓는 죄는 알고 짓는 죄에 비해서 죗값이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
옳습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호적의 기록이 잘못된 관계로 재판을 청구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애쓴 결과 원하는 대로 호적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의 재판 기록을 슬쩍 들여다보니 "이 자는 원래 무식한 까닭으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기록이 되어 있더랍니다. 그는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으로 결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식자 행세를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모르고 저지른 실수라고 해야 정상참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면 공문서 위조범으로 몰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차라리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른 체하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됩니다.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이 주제를 놓고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칼 바르트와 부르너의 논쟁이 유명합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은 워낙 그 마음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고 아예 부정해버렸습니다. 반면에 부르너는 인간이 아무리 부패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마음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에서 분명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위엄을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을 심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칼뱅은 아주 아름다운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을 늘 새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신선한 물방울을 우리 마음에 떨어뜨려 주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는 미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혜택과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신을 찾는 종교의 씨앗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서 역사가 시작되던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없는 부족이나 도시,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
칼뱅은 또 말하길,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의식은 인간의 골수에까지 깊이 박혀 있어서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차라리 천성을 바꾸는 편이 더 쉬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지적입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적으로 자기의 아빠 엄마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20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 위에 자기의 영광을 보여 줄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도 못 보았다거나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시편 104편을 기록한 저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라는 매우 문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빛이 가득하고, 그 빛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 가득한 빛으로 화려한 복장을 만들어 입으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 같은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온 우주 안에 하나님의 빛이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돌릴래야 돌릴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계시는 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궁전을 거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궁전 안에 사는 사람이 궁전에 계시는 왕을 모른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심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삼라만상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지닌 신비스러움도 창조자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큰 증거가 됩니다.
칼뱅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는 입과 눈에서부터 시작해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 몸에 가득하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솜씨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 흐르는 창고를 가지고 있다." 참 멋있는 표현이지요. 우리의 사지백체를 보아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 만물을 보나 우리 자신의 몸을 보나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창조하셨으므로 그것을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고 지혜로 다스리시며 선으로 보존하고 계십니다. 무더운 여름을 쫓아버리고 가을날 길가에서 애교스럽게 인사하는 코스모스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찮은 미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마음속에서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19, 20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신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불신론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이 삼라만상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분을 영화롭게 못했다는 논리는 절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도 섬기지 않을 뿐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불경죄를 범하는 이유
그러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불경죄를 범할까요?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절).
우선 그 첫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욕망의 잡초가 마음을 온통 뒤덮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그분을 영화롭게 할 만큼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2절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가 뭡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거짓 지혜를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것보다 순종하지 않는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멀리 떠날까? 어떻게 하면 그의 간섭을 덜 받을까? 어떻게 하면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 이것을 궁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찾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상입니다. 23절부터 25절에서 우상 숭배 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의 눈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참된 지혜를 거부하고 자기의 지혜대로 살겠다고 택한 길이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에는 본질상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섬기기에 편한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편한 방향으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에게 있어서 창조자 하나님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생활을 가르치시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 엄하게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요구는 부패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 대단히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 부담스러운 하나님이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결국 도피처로 찾게 되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인데 비해 우상은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불상 앞에 서서 회개하고 통곡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천성으로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멀리 하기를 원합니다. 부담스러운 하나님 대신 편리한 신을 찾아다니다 얻은 것이 우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상은 인간의 허망한 생각과 공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고대인들은 형상을 가진 우상을 선호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이나 일월성신이나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현대인의 우상은 형상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현대인들은 상당히 수준이 높아서 뭘 만들어 놓고 절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가 섬기기에 편리한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상 숭배 안에 감추어진 본질상의 특징은 그것이 마음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24절).
정욕은 쾌락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정욕은 특히 금지된 쾌락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악착같이 하기 싫어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기어이 하고 싶어 하는 부패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할 때 더욱 쾌감을 느끼는 못된 근성이 있습니다. 간혹 자기의 배우자가 멀쩡히 있는데도 외도를 즐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는 금지된 쾌락을 추구하는 더러운 욕심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24절 중간을 보면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성적 타락과 결부시켜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성적 타락은 우상 숭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나 고린도는 우상의 도시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도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겉으로는 신을 섬긴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쾌락을 즐기기 위해 무서운 죄를 범하는 남녀가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면 할수록 현대인들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우상 숭배 안에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이 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기독교 문명이 쇠퇴해 가면서 동양에서 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를 위시해서 불교, 도교, 유교 등 모든 동양 종교가 혼합된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으로 범신론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신이요, 신은 곧 사람이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모두 신이다' 라는 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 만물 안에 편재해 있는 신의 숫자가 무려 3,300만이 넘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역사상 나타난 우상 숭배 중에서 가장 지독한 우상 숭배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라는 우상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을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관심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신이라고 생각할 때에 자연히 인간은 신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을 하게 됩니다. 이 잠재력만 개발하면 누구나 굉장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공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이 뉴에이지 운동에는 자기를 신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고안해 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면술, 마인드콘트롤, 강령술, 예언, 점성술, 요가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여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상 숭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 안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가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절).
여기에서 '바꾸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과 바꾸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25절).
이 말씀에서 보다시피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만큼 무서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상 숭배 문제를 놓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삼총사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풀무불에 들어가서 타 죽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라고 하면서 결사 각오로 대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이 강제적으로 천황을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자 피맺힌 절규를 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을 섬김으로 정절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일본 신사에게 절을 못합니다. 드리리이다 . 드리리이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이다." 그는 정절을 깨뜨리지 못한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감옥에 끌려가서 6년 동안 고생하며 갖가지 고문을 당하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의 본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를 모르고 살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좋아할까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천만에요.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드리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 뻔합니다. 좀더 내 욕심대로 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내가 하나님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며 살아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 놓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우상 숭배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비참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소개하자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자신에 관해서만 생각하라. 내 자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라. 가능한 한 '나'라는 말만 사용하라. 칭찬받기를 기대하라. 지나치도록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지 않았다면 이런 사람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이 자기 자신만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아직도 '나' 라는 우상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상은 그의 영광과 존귀를 전부 자기가 받으려고 하는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그 우상은 하루 빨리 깨뜨려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예수 믿는다면 헛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황금만능주의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까? 하루 빨리 깨뜨려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비결
우리 중에 많은 분들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쉴 새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영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보거나 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헤면서 그분의 지혜, 그분의 전능하심을 항상 감탄하고 찬송할 수 있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문에 게재된 기사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 자매가 어떻게 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하 자매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자기 아이 덕분에 정 모 집사를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던 정 집사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떨려요."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하 자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볼 때는 그저 무미건조한 하늘일 뿐, 그렇게 가슴 떨릴 만큼 감동스런 하늘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예수 믿으면 무언가 다른 데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 자매가 교회 나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하늘을 보아도 하나님을 알게 되고, 땅을 보아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를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 행복의 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5절 끝을 봅시다. 사도 바울이 소리 높여 무엇이라고 찬송하고 있습니까?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날마다 바울처럼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행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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