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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19:11-18)

by 【고동엽】 2022. 9. 14.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19:11-18)

우리는 이미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와 악행이 극에 달했던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 시대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상대로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리기 위한 대결을 벌인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팔백오십 명의 거짓 선지자와 홀로 싸우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로 응답하셔서 바알 등의 우상은 거짓 신이며 당신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명명백백히 밝혀주셨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갈멜산에 운집해있던 백성의 손을 빌어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없앴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이 엘리야보다 더 대담하고 엄청난 일을 벌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정말 그때 엘리야가 보여준 결단과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후에 엘리야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를 무척 당황하게 하며 실망하게 만듭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패한 바알의 선지자들이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에 격분한 이세벨은 즉시 사람을 엘리야에게 보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고 보복선언을 했습니다(왕상19:1-2). 그 말을 전해 듣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저 남쪽 유다 땅 끝으로 도망쳤고(왕상19:3) 거기서 또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는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차라리 죽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19:4). 그만하면 큰일을 했으니 이제는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주신다면 이세벨에게 잡혀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쉬울 것이라 기대하고 한 간구였을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그 담대하던 선지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천사를 보내셔서 그에게 떡과 물을 먹게 하시고 힘을 내어 거기서 더 멀리 남쪽으로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 호렙산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호렙산은 옛날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 발에서 신을 벗고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학대로부터 구해내라는 사명을 받은 산이고(출3:1-10)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두 돌판을 받은 산인 시내산, 바로 그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산으로 가게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겁에 질려있고 의기소침해 있으며 자기의 사명은 이제 끝났다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엘리야에게 옛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특별히 당신의 임재를 직접 체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사명감을 되찾게 해주시기 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거기서도 여전히 두려움과 의욕상실과 자포자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곳 굴속에 들어가 머물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 이때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였습니다. 엘리야는 분명 포악한 군주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위대한 대결을 벌이고 사백오십 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처단한 영웅적 인물이었지만 호렙산 굴속에서의 엘리야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게 초라해진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본문 11절). 그리고 그 명대로 굴 입구에 나가 선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를 온몸으로 확인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 상징으로 일으키시곤 하신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과 지진과 불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엘리야와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때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목격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굴속에서 듣게 하신 말씀을 다시 듣게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본문 13절). 이 말씀은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느냐?” 하시는 물음으로 들릴 수도 있고 “네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이 마땅하냐?”는 질책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가 서게 하신 그곳이 바로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학대로부터 구해내라는 사명을 주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의 계명을 주신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엘리야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요한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면서 왜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있느냐 하시는 질책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큰 권능으로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떨며 네 사명을 저버리고 그만 살겠다고 하느냐? 너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 일어나라”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은 똑같은 소리의 반복이었습니다. 14절을 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여전히 지나간 옛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를 잃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 이하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엘리야에게 깨우쳐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와 악행에 빠지게 한 아합과 그의 가문을 응징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징치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실 이방나라 아람의 왕을 세우는 일도 있고, 아합의 집안을 멸문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에 다른 왕을 세울 일도 있으며,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킬 이스라엘 백성을 칠천 명 남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칠천 명의 신앙의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칠천 명의 동지를 남겨주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혼자서 판단하고 낙심하며 절망하고 실의에 빠져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스스로 마감하고 정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도 그의 생명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다시 살아 일어나는 힘을 얻습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호렙산에서 내려와 엘리사를 만나러 갔고 그를 자기의 수종자가 되게 했습니다(왕상19:19-21). 그리고는 다시 의로운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용감하게 수행했습니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가진 포도원이 탐나서 비열한 방법으로 그 주인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 왕과 그의 악독한 아내 이세벨과 다시 맞붙습니다(왕상21:1-16).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사마리아로 아합을 찾아가 이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왕상21:19-22). 엘리야는 이세벨에 관해서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왕상21:23). 또 아합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자 이방 족속의 신에게 자기의 병이 낫겠는지를 물어 보라고 사자를 보낸 일에 대해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에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시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왕하1:16). 엘리야가 전한 그대로 아하시야 왕은 죽고 말았습니다(왕하1:17).

   엘리야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신 말씀을 엘리사에게 성실하게 전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스승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메섹에 갔을 때에 병들어있던 아람 왕 벤하닷 대신 하사엘이라 하는 자에게 아람 왕이 될 것을 알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어 왕을 죽이고 그 대신 왕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왕하8:7-15). 또 엘리사는 그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예후라는 자를 찾아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게 함으로써(왕하9:1-10) 예후로 하여금 요람 왕을 배반하고 왕이 되게 했으며 이세벨과 아합의 가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알리셨던 계획이 다 그대로 이루어지게 했습니다(왕하9:30-37, 10:1-17).

   이렇게 한때는 선지자로서의 활동을 접고 죽기를 자청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다시 일어나 용기 있게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한 엘리야를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불러올려지는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을 갈 때 불수레와 불말들을 보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사가 소리 지르며 쳐다보는 가운데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신 것입니다(왕하2:11-12). 그뿐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먼 훗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셔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그 상대로 모세와 함께 택함 받는 영광 또한 누렸던 것입니다(눅9:30-31).

   엘리야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큽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한때 두려움과 비겁함과 낙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초라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비겁함과 낙망과 자포자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말고 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오직 하나님의 권능만을 의지하고 권능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한결같이 주의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며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주만물과 온 민족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때는 말씀과 기도를 힘쓰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시들해지고 냉냉해지며 교회 일에 무관심하고 비협력적인 사람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판단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이 교회에서 일 꽤나 했지” 하며 과거로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하나님의 물음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네가 지금 신앙생활 하는 자세가 마땅한 것이냐? 네가 왜 요새는 열심히 섬기지 않느냐? 네가 요새는 왜 바치기를 힘쓰지 않느냐? 네 책임은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충성해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각성하여 엘리야와 같이 다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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