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를 주옵소서 (요 4장 10-17절)
물을 달라는 사람
병(病) 중의 병은 병명도 모른 채 죽어야 하는 병일 겁니다. 가장 불쌍한 인생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 채 동물처럼 반사적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여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사마리아인으로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에 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이 소중하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잊혀진 채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처럼 지성인이며 종교적으로 성숙한 신앙인만 만나주시는 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사마리아의 천한 여인도 만나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와 비교도 안될 만큼 이 여인을 정중하게 만나주셨고, 애정과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여인은 기대하지 않았고, 어쩌면 예수님도 기대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여행 중에 피곤하여 우물가에서 쉬고 계실 때, 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서로 약속했거나 계획 된 게 아닙니다. 때로 우리에게 우연이란 것이 하나님께는 필연입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한 첫 말씀이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게 여인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요,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천한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반응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에 대한 해묵은 편견입니다. 오랫동안 무시당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상처입니다. 우리도 그런 본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다른 하나는 여인에게 남자에 대한 편견과 상처가 있었을 겁니다. 여인은 ‘남자는 다 도둑들이다’라는 마음 깊은 배신감과 불신으로 비뚤어진 남성관을 형성했을 겁니다. 여인이 가진 두 가지 편견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정중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천한 여자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과 애정으로 정중하고 겸손하게 만나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여인에게 충고하거나 설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생각한 대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낮추십니다. 이 여인은 지적, 종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낮에 물 길러 온 여인을 대해주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만난 예수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의 눈높이에서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 사람의 눈높이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충고하거나 야단치거나 설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의사는 환자가 찾아오면 그의 눈높이에 맞춰 의자를 조절하고 진찰합니다. 억압하는 자세로 환자를 돌보지 않고 손을 만져주며 안심시켜 줍니다. 저는 그 의사가 목회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0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알아듣기 쉽게 구원을 설명하십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알아듣기 어렵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거듭남’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여자여,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이라며 시작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 예정, 섭리라는 말은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은 알아듣지만,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면'이라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접근하십니다.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이 메시아나 구원자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여인의 마음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물 좀 달라 하는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구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비밀은 구하는 데 있습니다. ‘구하다’는 말은 ‘찾다’, ‘두드리다’, ‘바라보다’, ‘소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눈을 떠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바라보고, 소망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속’입니다. “네가 그에게 구했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생수’는 우물물과 다릅니다. 이 여인이 생각한 것은 ‘물’이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은 ‘생수’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네게 줄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즉시 반응합니다. 어느새 예수님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과 상처를 잊어버리고 ‘생수’라는 말에 빨려 들어갑니다.
■진짜와 가짜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여인은 생수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구원에 관심이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면 정말 마시고 싶어합니다. 천국이 있다면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원할 뿐이지 막상 거절하고 맙니다. 왜냐면 마음의 상처와 편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정말 그런 게 있냐고 묻습니다. '생수'란 개울물도, 고인물도 아닙니다. 시냇물, 호숫물, 바닷물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늘 가짜 진리와 모조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진짜를 만나본 경험이 없습니다. 사람도 진짜 사람을 만나면 충격을 받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만나면 그 이야기에 빠지고 맙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랑과 진리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 여인은 생수에 대해 듣고 순간적으로 기뻤지만, 세상에 그런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가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인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 물은 자신뿐 아니라 조상이 마셨던 물이요, 그 후손과 짐승들이 마시고 살아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성경을 보면 우물이 구원과 관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6절과 7절 말씀에 아브라함의 몸종 하갈이 사래에게 구박을 받고 도망갑니다. 도중에 천사를 만나는 곳이 우물입니다. 창세기 24장에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얻을 때 사환을 보내는데, 그 사환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소가 우물가입니다. 우물가는 아주 로맨틱한 장소입니다. 이삭과 우물은 인연이 많습니다. 창세기 26장에 이삭이 땅을 팔 때마다 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은 창세기 29장 1절부터 3절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도망하여 간 곳이 본문에 나오는 우물입니다. 야곱은 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수가 마을의 여인은 본능적으로 조상들이 마셨고, 그 후손과 자신이 마시는 이 우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샘물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아브라함의 우물, 이삭의 우물, 야곱의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른 것이 공통점입니다. 우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상들이 팠던 우물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종교는 다시 목마른 종교라고 합니다. 율법의 종교입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율법을 먹는 자는 목마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킬만한 의로운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순간을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목마르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해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림의 떡이다." 그림의 떡은 먹음직스럽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먹을 수 없습니다. 조상들이 주었던 우물은 순간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지만,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물은 조상들이 마신 물과 다르고,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 것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모릅니다. 이런 걸 ‘타고르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타고르는 하나님과 가깝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실체가 잡힙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어찌 만날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됩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이 여자가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을 위한 빵이 있지만 영혼을 위한 빵도 있습니다. 육신을 위해 마시는 물이 있지만 영혼을 위해 마시는 물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오라
이 말씀에서 생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생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가서 퍼오면 됩니다. 그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솟아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은 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를 모릅니다. 예수는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이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피와 살이 되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경험에 항상 목말라 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명상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영원한 ‘생수’와 ‘신앙’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 경험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첫째, 생명수는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둘째, 중요한 특징으로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공짜로 ‘누구든지’ 제한 없이 주십니다. 셋째,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해마다 소나 양을 죽여서 피를 흘리며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주셨습니다. 단번에 갈증이 해소되며 율법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고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샘물은 계속 솟구쳐 나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점점 빨려 들어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 상식적인 눈에서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학문과 사고 방식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만 대상을 보려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관점에서 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자리에서만 맴돌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사고로 생각해 왔기에 믿음으로 잘 가다가도 뒤돌아 서 원상태가 됩니다. 15절에서 이 여인은 굴복합니다. 어떤 굴복인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이 좀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거부하다가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다음 단계로 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허를 찌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여자를 묶고 있는 과거가 올무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은 미래는 없습니다. 여인은 병의 근원을 숨기고 외과적 현상만을 말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미열이 나고 피곤할 때 해열제를 먹는다고 병이 낫겠습니까? 내 안에 폐병이 있는데 그 현상을 없앤다고 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그 현상의 근본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치유하기 원하셨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신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회개가 일어나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다면 여인은 도망갔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그분에게 회개를 받으십시오. 과거를 치유받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을 마시고 구원의 축복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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