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 17 - 20)

by 【고동엽】 2022. 9. 13.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 17 - 20)

프랑스 사이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랜드 암스트롱이라고 하는 청년입니다. 경기에는 언제나 그 누군가가 금메달을 얻겠지요마는 이 이야기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3기 암 환자로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이 엄청난 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25세에 고환암이라고 하는 사형선고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존 가능성까지도 희박했습니다. 폐와 뇌에까지 전이되어서 너무나 쑤시고 아파서 식사도 잘 못하고 신문은 물론 텔레비젼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머리가 터지게 아프고 괴로웠답니다.

그러나 그는 사이클 경기에 나갔습니다. 물론 실패했죠.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My son, you never quit" 내 아들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권면했습니다. 열심히 사이클을 훈련을 했습니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있었던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왕을 알현하는 그런 기쁨도,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힘이 들어서 선수생활을 접어 두었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는데 자기가 가는 길에 환한 빛이 나타나면서 길에 글이 쓰여졌습니다. 그 글은 역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입니다. "My son, never quit."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장애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장애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열심히 탔습니다.

그리고 1999년 프랑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환영했고 그리고 2001년 5월호 가이드포스트에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발표해서 모두가 다 같이, 세계사람이 축하했습니다마는 본인은 1등이냐 2등이냐 금메달이냐 그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그는 암투병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 불행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만이 가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만이 가지는 나만이 아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참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흔히들 '참 기쁨' 하면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고 많이 알고……. 소유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합니까? 그렇게도 소중한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건 근심만 더할 따름입니다. 또한 충족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가지는 욕구 충족,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욕구 충족할때에 그 충족되는 기쁨을 누립니다마는 그야말로 허무한 것이올시다. 또 하나는 정신적으로 성취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뭐 하나를 만들어 낼 때, 뭐 하나를 이루었을 때, 스스로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것 또한 무상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씀은 성경이 그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들을 열거해보면 여러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는 농부의 추수의 기쁨을 대표적인 기쁨으로 말합니다. 한 여름동안 땀 흘려 일하고 가을에 추수할 때, 그 추수할때는 남의 밭에 가서 추수하면서도 축제의 기분입니다. 어쨌든 가을 추수는 온 동네가 그렇게 큰 축제처럼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땀 흘려 얻은 결과를 놓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농부의 추수의 기쁨,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데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에다 가득 채워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쓸 것이 있으니깐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 사람은 그것 밖에 몰라요.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런 수준 이하의 동물적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마는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전쟁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전쟁이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살아 남기가 어려워요. 많이 죽고 그런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살았어요, 승리했어요, 이겼어요, 그리고 전리품을 나누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누리는 극치적인 기쁨에 하나다. 그래서 전리품을,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 이렇게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으로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기쁨. 의를 위하여 고난당할 때, 뭐 이런 비방 저런 오해 이런 많은 핍박이 있어도 잘 참고 견딥니다. 말 없이 견딜 때 나만이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나만이 누리는 신비로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의 기쁨,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쁨은 또 다른 의미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파송해서 주님의 역사를 대행하려고 했던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병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어서 파송해서 두사람 두사람씩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런 때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70명 정도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70명을 보냈습니다.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는 고치고 귀신은 내쫓고 능력을 나타내면서 역사하라" 그랬어요. 주님이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귀신보고 "나가라!" 그러니까 다 나가주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자기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이런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자기들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쫒겨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돌아와서 지금 보고대회하는 것입니다. 그 성과를 놓고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희한한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일을 자랑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 "그거 별로 기뻐할거 없네. 참으로 기뻐할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 외에는 그리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주 신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치평가 기준이 몇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애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The Revolution of Hope 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치 기준은 첫째, 시장성이라는 거죠. 상품화되고 있다는 거죠. 목적은 돈입니다. 그래서 물건만 시장성이 있는게 아니라 상품화 되는 것이 아니고 기술도 지식도 노력도 젊음도 정보도 다 돈으로 환산합니다. 다 상품화 되고 있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인생을 가장 유리한데 투자하겠다고 듭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 투자하고 있습니다. 궁극 목적은 무엇입니까? 돈이었더라구요. 자본주의 사랑. 돈에 미쳐가지고 거기다가 몽땅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일은 없어요. 그래서 시장성 혹은 상품화 이것이 현대인의 가치관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적응성입니다. 얼마나 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 내가 적응되고 있느냐. 적용되고 있느냐하는 평가에 기준하는 것입니다. 창조나 자율이 아니라 얼마나 쓰여지느냐 얼마나 바로 쓰여지느냐 거기에 있다는 것이죠. 요새 우리 아이들이 수능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아이는 자기가 본래 생각했던 기준이 있어요. 이만큼 성적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하고 이 재수생이 일년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스스로 평가해보니까 생각했던 거 보다 20점이 떨어졌어요. 요 20점 떨어졌다고 해서 아파트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했습니다. 아직 발표도 안 나왔는데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문제는 사회와 부모님의 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인생을 질적으로 인도하지 않고 양적으로 인도했기 때문이요. 그래서 보세요. 옛날 어른들은 가르킬 때 "착한사람이 되라. 정직한 사람이 되라" 이랬어요. 그 두마디 밖에 없었어요. 착한 사람이 되라. 요새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 유능한 사람이 되라." 유능하지 못하니까 죽어야지. 않그렇습니까? 아무리 봐도 유능하지 못해. 그래 우리 어머니들이 참 조심해야 됩니다. 그저 유능한 사람이 되라, 까지만 말해도 좋은데 못할바엔 죽어라, 그러니까 죽지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유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회에 적용되는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 유능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교인 가운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주 일류대학을 나온 분이 고등고시 시험을 보다가 몇번 보고도 잘안되서 국민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렇게 지내는 분이 있어요. 아이가 둘 있는데 국민학교 지금 1학년, 3학년인데 아 전부 100점 맞아야 되요. 99점만 맞아도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거예요. "그것도 틀렸냐!" 또 때려요. 그리고 하는 그 다음 말은 "나는 너희 때 100점만 맞았다" 이러고서 때렸다구요. 어머니가 말리면은 "당신은 삼류대학을 나와가지고 워낙 무식하니까. 난 어디가서 당신 내 아내가 대학 나왔다는 말도 못해요 챙피해서." 아, 이러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가 아무말도 못하지. 또 어느날도 또 90점 맞았다고 때리는거야. 그러니까 애가 "다음에는 꼭 100점 맞을께요" 하고 우는 겁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어머니가 그만 이성을 잃었어요. 벌떡 나와가지고 문을 확 열고 "그래 100점 맞은 네가 잘된 게 뭐냐?" 한바탕 내 쐈는데요 벌벌벌벌 떨더랍니다. 새파랗게 돼서 말도 못하고 엉엉 울더랍니다, 남편이. 그 다음부터 안 때린답니다. 여러분 다시 물어보세요. 뭘 했다는 얘기요? 그래 똑똑해서 뭘 한거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하세요.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경쟁성입니다. 아, 경쟁 무섭습니다. 지식에서 경쟁하죠, 체육에서 경쟁하죠, 자본에서 경쟁하죠, 사업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 이거야. 그 그 싸움이란 정말 처절합니다. 그 경쟁속에 우리는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국엔 궁극적 가치나 절대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나갔다고 병자를 고쳤다고 자랑할 거 없다. 왜요? 그 후속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이 있어요. 그 속에는 예수님께서 병고친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됐을까? 뭐 그것에 대한 그저 생각으로 만든 좀 우스꽝스러운 소설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보니까 알콜 중독자가 있더래요. 술이 만취돼가지고 돌아다녀요. "너는 왜 어떻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알콜중독자가 됬냐" 그러니깐 "내가 본래 절름발이였는데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절름발이 때 내가 거지로 살았는데 하도 오랫동안 거지생활을 해서 뭘 할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요. 기술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직업이 없어서 내가 그만 자포자기 해서 알콜중독자가 됬습니다." 또 가다보니까 창녀가 하나 있더래요. "너는 어떻게 창녀가 됬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나를 귀신 내쫓아서 맑은 정신을 만들어준 건 사실인데 귀신들렸던 사람이라고 누가 거들떠 보질 않아서 아 그만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창녀가 됬습니다." 아 그거 말이 되더라고요. 또 그런가 하면요 또 한사람은 조폭이 됐어요. 그리고 "넌 어떻게 조폭이 됬냐?"하고 물었더니 "저는 본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주님께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건 좋았는데 눈감을 때는 몰랐는데 뜨고 보니까 보기 싫은게 너무 많아요.

세상에 못볼 게 많더라고요. 그래 화가 나서 조폭이 됬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말이 되잖아요. 여러분 가끔 이런 말 들으시죠?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달라 그런다고. 사실이죠, 보따리 있어야 살잖아요? 건져주는 것만 가지고 삽니까? 자, 예수님 많은 병자를 고쳤어요. 많은 좋은 일 했지마는 그거 별 거 아니다. 여러분 또 구제생활 한다죠? 구제, 구제 다합니까? 아무리 구제한들 그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게. 우리가 늘 북한을 위해서 전국 고아들을 지금 5백명을 지금 기르고 있습니다마는 식량은 3천명분을 보냅니다. 3천명의 고아를 지금 먹이고 있는데 그래봤자 나라를 상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치 않아요? 그래 3천명 먹인다고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이거예요. 아 그거 낙심스럽죠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거 뿐입니까.

우리가 한계가 있어요. 우리의 선행이나 봉사라는 것이 사실 생각하면 맹랑한 겁니다. 그러나 의미가 다릅니다. 또 하나는 이런 선한 일이라는 것이 오해 받을 때도 많아요. 무슨 딴 목적이 있지 않나 오해를 당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별별 오해와 비난도 있기 마련이에요. 예수님의 선행은 더더욱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래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냐하는 오해도 사실로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합니다. 오늘 병 낳았다고 뭐 좋은 일 한번 했다고 해서 좋아할거 없네. 자, 성취도 인기도 능력도 자기 과시도 아니요. 오로지 기뻐할 것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사업에 내가 협력을 했어요. 여러분,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것도 없답니다. 아무것도 없답니다.

제가 직접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한사람, 오늘 내일 합니다. 그 순간에 절더러 그러대요. "목사님, 제가 교회 봉사한 게 하나도 없어요." 너무 마음이 괴로운데 자기 아내보고 "여보, 그 통장에 얼마있소?" "3천만원 있습니다." 그거 찾아다가 몽땅 갖다 드리라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래저래 뭐 장학금이다 뭐다 해서 좋은 일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 사업을 한 일이 없어."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니까 딱 걸린다는 거예요. 사실이죠.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 그것만을 기뻐해야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그 일로 인해서 기뻐하라' 라고 말합니다.

빅토 프랭클(Victor E. Frankl)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The Doctor and the Soul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인간 실존의 필수조건을 말합니다. 현대인으로서 인간실존의 필수조건 세가지 잘 기억하십시오. 첫째가 Spirituality, 영성입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요. 이 세대 이 순간만 가지고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영원지향적으로 살 것이고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살아야됩니다. 둘째가 Freedom 입니다. 자, 여러분 내 마음을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얼마나 자유하십니까? 물질로 욕심으로 명예로 시기 질투로 우리 마음은 얼룩져 있어요. 자유가 없어요. 무엇엔가 매여있어요. 게다가 교만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내 영혼이 완전히 자유한 만큼 높은 가치의 생을 사는 것이요.

또 하나는 Responsibility, 책임성있게 살아야 합니다.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도 내가 지고, Responsible member 모든 것에서 책임을 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그것이 실존가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것으로 기뻐할 것 없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나님이 나를 쓰셨어요. 하나님이 나를 고용하셨어요. 나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어요. 그 거룩한 역사에 내가 조금이나마 보태며 살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그걸 기뻐하라 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 내 앞에 면류관이 보인다. 그런고로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줄리아 카메론이라는 사람의 '아주 특별한 즐거움'이라는 재미있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말이 있어요. 완벽주의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뭘 완벽하게 하려고 할 때 오히려 더 안되는 것이죠. 전체 시를 망칠 때까지 한 줄을 고치고 또 고치는 사람이 있다. 시 한편을 쓰는데 한 줄을 또 지우고 또 지우고 하루종일 고쳐요. 그림을 그리는데 한 획이 마음에 안들어서 종이가 찢어질 때까지 다시 그려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글을 써야겠는데 한페이지 첫장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걸 고치고 고치니까 다음 장을 못쓰고 죽는대요.

여러분 얼마나 완벽하려고 하십니까? 잊어버리세요. 오직 초점을 분명히 하세요. 초점을 하늘나라에 맞추고 그리고 불완전한 가운데에 그대로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세요. 내 삶의 의미의 근거가 어딨습니까? 내 일의 참 가치는 어디두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나게 마련이에요. 생수를 마셔야 됩니다.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기뻐하라. 그러한 가치 그러한 영원한 것. 그리고 오늘을 살 때 그에게 능력과 감사와 지혜가 함께하는 것이 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온 정력 다 기울이며 힘써 살아왔습니다마는 별로 얻은 것도 없고 되었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주시사 이제부터 남은 생이라도 하늘에 기록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을 하며 조용히 주님을 향하여 살게 하옵소서. 주의 음성에 응답하며 살게 하시고 주님의 손에 들려진 주님의 손에 의해서 쓰여지는 영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