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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교회 (시편 96:1-13)

by 【고동엽】 2022. 9. 13.

바람직한 교회  (시편 96:1-13)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48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48년 동안 주님의 몸 된 우리 교회를 이끌어오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을 감당해오신 여러 장로님들과 신앙의 선배 되신 어른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미래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우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시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가져야할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이며 어떠한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며 찬양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감동되었을 때에는 영혼의 필수적인 응답으로 찬양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편교회에는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라 함은 구원받은 자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찬양의 가장 원천적이며 절실한 제목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도 결코 고갈되거나 싫증나지 않는 감격을 안겨주는 기쁨이 되는 영원한 노래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찬양하고 또 찬양해도 항상 감격적인 영원한 노래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는 자가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면서 즐거워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시편교회는 시와 찬미와 감사와 감격과 춤의 축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시149:3에서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라고 했고, 시150:4에서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할 참 모습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의 시가 있고, 감사찬미가 있고, 구원의 감격과 춤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시30:11에서 시편기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구원 얻은 자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춤과 기쁨이 없습니다. 외국에서 유명한 예배 학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교회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소감을 묻자 그 학자가 대답하기를 "마치 장례식예배에 참석한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쁨이 없고 축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찬양과 춤과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천국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은 잔칫집으로 비유됩니다.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신부 교회는 혼인 잔칫집과 같은 곳입니다. 즐거움과 기쁨과 미소가 있는 곳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은 다릅니다.

교회는 잔칫집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어둡고 힘들어도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잔칫집의 모습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시편교회는 구원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도둑의 고백

어떤 사람이 60세가 되도록 도둑질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만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도둑질을 시켰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자식들이 빈손으로 들어오면 사정없이 마구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여느 때와 같이 무엇인가를 훔치기 위해 길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가다가 신학교 학생이 전해주는 작은 전도책자를 받았습니다. 전도책자를 버리려던 그는 왠지 읽고 싶어져서 그것을 읽었고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해 못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 새 사람이 된 도둑의 말입니다.“내 나이 60인데 이제야 올바르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 때문에 하신 일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합니다. 한데 내가 60이 되도록 아무도 내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가르쳐주고 인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은 인류와 만물의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한 독립국가를 이루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시고, 그 후에는 히브리민족을 통한 인류구원을 계획하시고,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게 하시고, 메시야을 통하여 인류와 만물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여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노래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의 놀라움과 행적이 어떠한 것인지는 담고 있습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선포입니다. 시편교회는 찬양을 통해서 열방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파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라고 하고 시98:1에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자기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할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찬양으로 만방에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노래하는 표정도 중요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표정으로 노래하고 선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표정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표정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에 나타난 교회는 합당한 예배가 있는 교회였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시편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여기서 경배하라 함은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경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으시는 것 가운데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사 백 년 동안 살았지만 예배를 몰랐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조건을 저들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거기 까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배를 가르쳐 주셔서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너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애굽에서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 너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았다" 라는 고백이 없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나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셨다, 이 큰 은혜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감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에서부터 끝까지 우리가 평생 드려도 그 예배의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지난주일 예배와 오늘의 예배가 다릅니다. 내가 평생 드릴 예배가 항상 새로운 신비로, 새로운 거룩함으로, 새로운 신령한 은혜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무한한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움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신비한 것을 부정합니다. 신령한 것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학만이 신비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류 역사에 오늘날까지 신비한 예배를 신령하게 드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신령한 은혜를 통하여 예배에 은혜를 받은 민족이 과학적으로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온 세계 경제, 문화에 최고의 민족은 신비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과학자 가운데도 개인적으로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처럼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기도 많이 하고 예배드린 사람이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음악가 가운데도 신앙적으로 훌륭한 음악가가 있는데 메시아 칸타타를 작곡한 헨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메시아 칸타타를 많이 들으면서 그 장엄함과 그 감격과 그 은혜를 우리는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 나아가게 됩니다. 헨델은 성경 가운데도 마가복음을 많이 읽었고 좋아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신 고난 당하신 예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나의 주님을 마가복음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헨델은 이 마가복음에서 받은 은혜와 감격과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음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원히 우리를 다스리시는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그 감격이, 그 신비함이 사람들에게 음악적으로 뒤떨어진 음악이 아닌 최고의 음악이요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감동을 주는 최고의 작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비한 은혜를 받은 화가들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화가들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그 걸작품이 너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과학이 전부가 아니고 과학이 신비한 것 아닙니다. 신령하고 신비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정상적인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훌륭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신비한 예배를 드려서 신령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더 정상적인, 더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깨우는 소리, 하나님의 소리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에 보면 주인공 파우스트는 인간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고민합니다. 허무함에 빠지고 허탈감에 빠져서 걷잡을 수 없는 파우스트는 자살하려고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 때에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땡, 땡 하면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교회 종소리는 신령한 소리요 영적인 소리입니다. 머리나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 울리는 종소리요 하늘의 종소리요 내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요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파우스트는 깨달았습니다. 그곳에서 찬송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는 교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놀라운 삶의 의미를, 새로운 삶의 의미를, 새로운 마음의 기쁨을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감사와 소망을 마음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이 행하는 최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몸과 마음이 하나님 앞에 최고의 가치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기뻐하시고 만남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새 힘을 얻어서 능력 있는 삶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싱가폴에 볼거리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고기 수족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 공원이라고 합니다. 공원 전체가 새들로 가득 찼다고 하는데 대체로 다른 나라에 있는 새 공원은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기는 그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새들이 그 공원을 떠나서 날아가는 새들은 한 마리도 없고 다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훈련을 시켜서 그 안에 그냥 있을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꼬리를 다 뺐어요. 옆에 날개는 있는데 꼬리를 빼 버렸어요. 그러니까 위로 날 수는 있고 점프는 할 수 있는데 나가지는 못합니다. 방향을 꼬리가 잡는데 갈 수가 없으니까 그냥 내려앉는 것입니다.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날기는 하지만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야할지 가는 곳으로 이끌어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제일 큰 병은 모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잠이 안 오는데 왜 안 오는지 본인이 모르고, 집이 싫은데 왜 싫은지 몰라 가정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요. 아프기는 분명히 아픈데 왜 아픈지 어디에 병이 있는지 본인도 모르고 병원에서도 모릅니다. 아무리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녀도 병명을 모르는 환자가 그렇게 많습니다. 왜 살기 싫은 지도 모르고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릅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울한데 왜 우울한지 모릅니다. 공부하기 싫은데 왜 싫은지를 학생들도 모릅니다. 공연히 어머니가 싫고 부모님이 싫고 남편이 싫어요 그리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두 몰라요. 그래서 길거리에 헤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은혜와 힘과 가치와 시간과 모든 생애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중요하고 요긴하고 아름답게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 시편 100편 2절에 "기쁨으로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기쁨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모두가 다 기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먼저 1-3절은 온 땅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과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행적을 노래하고 찬양하게 합니다. 4-6절은 세상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 하나님만이 천지를 지으신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7-9절은 온 땅, 만방의 족속들이 아름답고 거룩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0-13절은 여호와가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시어 사람과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생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미래의 장을 열고 행복과 기쁨을 노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안에 있다

미국에서 출판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슈월츠 모리는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브랜디스 대학의 사회학 교수입니다. 이 노 교수에게 찾아온 병은 ALS라는 발가락부터 서서히 죽어 가는 불치의 병입니다. 자기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집에서 요양 중인 모리 교수를 그의 제자이면서 미국의 유명한 컬럼니스트인 미취 앨봄이라는 작가가 매주 화요일마다 모두 14번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찾아갈 때마다 나누었던 죽음, 두려움, 나이 먹음, 욕심, 결혼, 가족, 사회생활, 용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화를 그대로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70세란 사실 잠깐 지나가는 세월입니다. 이 짧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물론 모든 것이 다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이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는 심지어 "사랑이 아니면 죽음" 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파도들의 대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파도를 수영하는 사람들이 즐기다가 얼마 못되어 바위에 부딪혀 깨어져 사라집니다. 첫 번째 파도는 두 번째 파도를 보고 너도 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슬픈 기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파도는 나 자신이 깨어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나 자신이 이 거대한 바다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들 파도가 이처럼 일어났다가 깨어지고 이것을 거듭하는 동안 바다는 아름답고, 물이 생동감을 얻어 많은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고 모든 식물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요, 새로운 미래로 향하여 나아갈 길입니다. 이제 지난 우리 삶을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조명하고 오늘을 말씀 앞에 새롭게 결단하므로 희망찬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선한 청지기가 많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을 선한 청지기라고 합니다. 악한 청지기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가지고 있는 줄을 착각합니다. 이런 자는 교회에서 꼭 행세를 하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칭찬 받기를 좋아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청지기는 자기가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청지기는 시간, 재능, 보화를 감사함으로 주님과 이웃과 자신을 위해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교회에는 의외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내가 써야겠습니다"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을 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칭 노랭이라고 하는 사람이 교회엘 갔습니다. 교회 문을 들어서는 순간 교회건물이 자기 회사 건물에 비교해 조잡하고 추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교회 의자에 앉았는데 앞뒤의 간격이 좁아서 다리도 꼬고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몸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기다란 의자에 옆 사람과 바싹 붙어 앉는 것은 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것인가? 너무 불편하다. 이 교회를 새로 짖는데 얼마나 들까? 이 교회는 돈 있는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한 주 두 주 교회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의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움켜쥐었던 노랭이의 손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과 주머니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아내와 자신과 자녀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내 회사를 위해서는 그렇게 좋은 자재를 써서 건물을 지었으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건물이 이렇게 수준이 낮아서 되겠는가? 내가 나만 위해 돈을 깔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돈을 써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하고 그는 목사님에게 가서 교회를 건축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있지만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건축하는데 자기가 일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갑자기 교회당을 짖게 되었고 그는 자기의 많은 재산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앉는 의자로 앞뒤 간격이 충분한 안락한 교회를 지어서 바쳤습니다. 이 사람이 시카고의 윌로크릭 교회의 릭[Rick]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후에도 그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4000여명의 교회 봉사자들을 위로하는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날마다 잘 되었습니다. 우리 영암교회도 앞으로 이런 선한 청지기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은 바로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바람직한 교회의 참 모습은 시편교회와 같이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잔칫집 교회이며, 그 구원의 진리를 선파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와, 진실하시고 공의로운 심판자를 기다리는 소망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 영암교회가 이러한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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