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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축복, 성령의 임재(1) (행 4:13-22)

by 【고동엽】 2022. 9. 13.

놀라운 축복, 성령의 임재(1)   (행 4:13-22)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의 강림은 대단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무능을 보완해 줍니다. 인간이 지니는 가장 큰 불행은 무능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이 지치게 되고 낙오되게 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냉동차에 갇혔습니다. 얼마 후에 그 사람은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냉동차는 작동하지 않았던 상태입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얼어 죽을 것 같이 생각하여 지레 겁을 먹고 죽은 것입니다. 인간의 무능은 이렇게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또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인간은 무능도 약점이지만 무지가 또 약점입니다. 그래서 무지가 죄입니다. 모른다는 것이 죄를 만들고 불행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화를 당하게 만듭니다. 어느 환자가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서 진찰을 하였습니다. 의사가 소견서를 쓰면서 맨 밑에 소근 암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이 환자는 자신의 병이 소근 암에 걸렸구나 하고 직감했습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이 환자는 걱정되어 매일 밤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걱정하다가 의사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말해 주십시오, 저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소근 암이 어떤 암입니까,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의사께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더니 “소근 암은 제 이름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지의 소치입니다. 인간의 이 무지가 때로 큰 오해도, 죄도, 사고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부질없는 생각과 근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성령은 또 보게 하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곳을 보고 믿게 하는 능력을 행사합니다. 성령은 비전의 영입니다. 높은 곳을 보고 미래를 보고 영적 세계를 보게 하고 하나님을 보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미래지향적입니다. 소망적입니다. 온갖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이 미래와 비전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미래지향적인 삶에 소망을 더하시고 발전과 전진을 이루어 주십니다. 미래학자 토플러는 왜 일본은 발전하는데 영국은 쇠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후 그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서점에 가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서점에 가 보면 한결같이 미래지향적인 책들이 쌓여 있지만 영국의 서점에 가 보면 또 한결같이 과거 대영제국 시대의 화려했던 시대를 회고하는 책들로 진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나 개인의 삶을 이렇게 과거 지향적으로 살아가면 결코 전진하고 발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은 참으로 대단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 이 세상에는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증거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가는 곳 마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서 마침내 이 세상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현재 전 세계에 600만개의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오늘도 매주 2천개씩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이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라이언(David Bryant)이라는 학자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교회 신자 1억 명 중에서 50% 의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95%의 성도들은 성령의 인격도 사역도 모르고 있다고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 신자 중 2%만 현재 규칙적으로 전도를 하고 있다고 조사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비로소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과정에서 기사와 이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은 성령의 역사의 과정을 그대로 적어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령을 힘입으면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본문 13절을 보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만나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신학공부나 성경공부가 아니면 아무 소용없는 공부입니다. 이것이 오늘 신학공부와 성경공부의 문제점이고 약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게 하는 공부가 아니면 배워도 아무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남이 없기 때문에 감동이 없고 회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백도 없는 것입니다. 만나야 회심이 일어나고 감격이 일어나고 눈물이 일어나고 고백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힘이 내 안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 힘으로 나가 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평소 “범인으로 알았다”가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에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너무나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행 2장을 보면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그날 성령에 힘껏 취합니다. 그런 후 그들이 얼마나 변화된 역사를 일으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이 회심합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일어났습니다. 4장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 담대하게 복음을 간증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제자들이 평소 범인으로 알았는데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오는가 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니까 속에서 힘이 나타났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삶이고 그 힘으로 신앙의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느 전도자가 매일같이 간증을 다니고 설교를 하고 연설을 하고 집회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회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지치지 않고 정력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바로 내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영혼과 내 정신 그리고 내 육체에 에너지를 주셔서 성령 안에서 사역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 안에 들어가시면 그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힘을 입어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전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생김”

14절을 보면 “또 병 낫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평소에는 별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평소는 비슷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사시에는 믿음으로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유사시에 유감없이 신앙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평소 제자들을 범인으로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언변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전파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 나은 사람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보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하려고 온 유대인들이 고백하기를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의 함께 하심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성령이 주십니다. 혈루병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께 찾아와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옷에 손을 대어도 구원받으리라 생각함이라”고 증언합니다. 이 믿음이 그 여인을 자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중풍병자가 네 명의 사람들에 들려져 예수께 찾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중풍병자도 예수께 가기만 하면 고침 받을 줄로 믿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 받았으니 이제 침상을 들고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이 병자가 그냥 앉아 있었으면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중풍병자가 얼어나 가라고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믿고 일어나려고 했을 때 즉시 고침 받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하면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무한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라는 큰 다리가 있습니다. 높이가 227메타나 되고 다리의 꼭대기 탑에서 늘어트린 두 줄의 케이블에 매달린 다리의 총 길이가 1,280메타나 됩니다. 그 다리를 놓을 때 시공 일 년 만에 23명이 바닷물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인부들이 두려움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건설회사가 궁리 끝에 다리 아래에 안전하도록 그물망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한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었고 일의 능률도 20%나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제는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때로 기적을 불러 오고 용기를 불러오고 담대함을 불러 옵니다.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믿음을 발휘하게 합니다. 그 역할이 성령이 하시는 역할입니다. 제자들이 아무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었지만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활동했습니다. 그것을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중심의 삶을 세우심”

본문 16절을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이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전도를 방해하려고 와 보니까 제자들이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그 변화된 모습을 한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박해하려고 왔던 바리새인들도 고백하기를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들이 함부로 그 제자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는 사람이 표적이고 이적이고 기사입니다. 쉬운 환경에서 인정받고 살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조금만 어설프게 살아가면 얼마나 비난이 큽니까. 우리나라는 다원적 종교사회이기 때문에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몇 년을 한 부서에서 근무를 하면서 자주 회식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서로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무안해 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 부서의 직속상관이 장로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에 알고 보니 그분이 교회의 장로더라고 합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기독교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정체성을 떳떳하게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훌륭한 직분 자가 사회에 나가서는 전혀 다른 신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교도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제자들이 그 시대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망설임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성령의 힘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이 시대에 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 힘으로 내 신앙을 유지시키고 나가서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심”

본문 21절을 보면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확신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전파하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처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놓아 주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입니까. 그러니까 방해자들이 전혀 접근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확신 있게 자신감 있게 능력 있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성령이 주시는 이 자신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자심감이 영적인 자신감이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인간적인 자신감 일지라도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감이 있으면 어느 정도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험불비 라는 꿀벌이 있습니다. 이 꿀벌은 날개에 비해서 몸통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기체 역학적으로는 도저히 날아다닐 수가 없는 구조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꿀벌이 잘 날아다닙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조사해 보니까 그 이유는 자신감 때문이라고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험불비 라는 꿀벌은 “나는 꿀벌이니까 자유롭게 날 수 있다“하고 생각하고 공중을 나니까 유유히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닭은 충분히 날아다닐 수 있는 큰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닭은 날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닭이니까”라는 생각 때문 입니다. 그런데 닭도 공중을 날아다닐 때가 있습니다. 개에게 쫓겨 다닐 때입니다. 그때는 닭도 지붕위로 날아 올라가고 장거리 비행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개가 떠나 버리면 이 닭은 다시 땅을 걸어 다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닭이니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곳 마다 기적과 이적과 변화와 섭리가 나타납니다. 거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나가서 입을 열어 말씀을 간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변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 성령이 함께 하시는 곳에 사랑이 실천되게 하시고 나누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이 성령이 임하시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2천 년 전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여 회개의 기도를 할 때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자신들의 무능을 고백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릴 때 그곳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때 오신 성령이 제자들로 하여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평양에서도 똑같이 모여 회개의 집회를 가질 때, 참회의 기도회를 가질 때, 자신들의 무능과 교만함과 죄를 고백할 때, 2천 년 전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 같이 평양에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모두 엎드려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할 때,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참회의 기도를 드릴 때, 그리고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성령의 임재하심을 사모할 때, 그때 여러분들에게도 그 성령의 임재하심이 임하실 줄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3가지입니다. 하나는 먼저 나를 변화 시키는 변화입니다.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 모든 집단, 모든 문제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세상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내가 있는 이 세상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입니다. 그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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