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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167쪽에 있는 글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3장 9~18절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목회를 해온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계십니다. 길가에 있는 신문팔이 아이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주부, 학생, 세계적으로 알려진 연예인, 사업가, 심지어 저명한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의 메시지를 좋아하여 귀를 기울였습니다. 저는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그의 교회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보았습니다.
첫 시간에 그 목사님은 자기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주말마다 사용하던 노천극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 그는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첫 예배를 드리던 주일에 나는 유명한 빈센트 필 목사님을 모셔서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서더니 하시는 말씀이 '만일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신다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여러분을 향해 죄인이라고 부를까요? 천만에요. 그는 평생 어떤 사람을 앞에 놓고 그렇게 부르신 일이 없었으니까요'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크게 까달은 바가 있어 나도 강단에서 절대로 죄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설교자가 입에 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기를 끈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금방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똑바로 직시하며 "너는 죄인이야"라는 말씀은 하신 일이 없지만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시면서 분명히 우리 모두를 죄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예수님은 분명히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셨고 죄인으로 다루셨고 죄인으로 알고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러 목사님은 사람들의 귀에 아첨하는 말만 골라서 들려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기를 끄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자 칼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까지 박혀 있어서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언사를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 굉장히 기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청중들 앞에서 인간성을 가장 듣기 좋은 말로 찬양하면 그의 말을 사람들이 경청하고 그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은 일이 없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을 하고 기분을 맞추어 주는 아첨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모여들게 되어 있고 칭찬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 1장 17절부터 시작하여 여러 시간을 공부해 오면서 분명하게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듣기 좋은 말씀만 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를 고무시키고 칭찬하는 말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마치 우리의 기분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냉정하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벌거벗겨 놓고 악한 것, 부끄러운 것만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의 처지가 좋은 말을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닌 것입니다.
병원에 가 보면 의사가 씩 웃으면서 "별거 아니네요. 이 약 일주일만 먹으세요" 라고 하는 기분 좋은 말을 듣고 돌아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제발 안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비슷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주 듣기 싫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그러시겠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을 이처럼 모독한 다른 사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얼마나 심한 모독입니까? 목구멍은 무엇 같다고 했는지 보세요.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열린 무덤이 어떤 곳인지 조금만 상상을 해보면 "세상에 이럴 수가!'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계속 읽어 보세요. 기가 막혀 머리가 돌 정도로 심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하나님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결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참담한 처지에 놓였는가를 다시 한 번 보여 주는 것입니다.
9절 초두에 "그러면 어떠하뇨"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엇이라고 할까?'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나으뇨?"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유대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 믿는다는 우리는 안 믿는 자와 비교해서 나은 데가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대답은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간은 본질상 그 밑바탕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조금 차이가 있긴 해도 그것은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오늘 제가 전하는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죄는 단수입니다. 죄들이 아니고 죄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죄'를 단수로 사용할 때와 복수로 사용할 때의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 복수의 개념이 약간 애매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정확하게 구별이 됩니다. 로마서에서 죄를 복수로 사용할 때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여러 가지 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저것 잘못하는 것들을 두리뭉실 모아서 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죄를 단수로 쓸 때에는 보이지 않는 죄의 세력, 즉 죄의 실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부릅니다(엡 2:2). 권세 잡은 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사람을 지배하는 어떤 세력이 틀림없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사탄, 마귀, 악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강한 실체가 배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하는 죄는 마귀와 비교되는 무서운 실체입니다. '죄 아래'의 '아래'라는 말은 헬라어 전치사 중의 유명한 전치사입니다. '휘포'라는 전치사인데 이 말이 디모데전서 6장 1절에도 나옵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라는 말에서 '아래'라는 단어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멍에 아래 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쇠사슬에 묶여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 종살이하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비교해서 생각하면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무서운 힘을 가진 죄의 손아귀에 꼭 잡혀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예외 없이 죄의 권세 아래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무서운 죄의 굴레
우리가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 전반에서 독버섯처럼 고개를 쳐드는 범죄를 막아보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온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경찰의 수가 자꾸 늘어가야 합니까? 왜 파출소가 점점 많아져야 합니까? 왜 첨단 기계를 도입해서 범죄를 예방해야 합니까? 죄가 자꾸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누르면 처음에는 조금 효과가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경찰이 많아지는 것만큼 범죄도 많아지고, 장비가 발전하는 것만큼 지능범은 더 늘어나는 답답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발자취입니다.
왜 범죄를 근본적으로 퇴치하지 못합니까? '죄들'은 다소 막을 수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죄'의 실체를 처리할 수 없다는 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뭔가 잘못할 때는 단순히 마음을 나쁘게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자기 배후에 자기를 조종하는 강한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죄의 세력을 처단하지 못하는 이상, 사회의 범죄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찰 수를 늘리고 최첨단 장비를 끌어들여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열이 나서 두통이 심한 사람의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합니다. 얼음주머니가 병 그 자체는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죄의 세력을 꺾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권세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우리가 꼼짝할 수 없는 힘입니다. 숨도 못 쉬게 우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제 마음대로 끌고 가는 죄의 세력이 우리의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지배 아래 속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 무서운 죄의 굴레를 벗지 못합니다. 그 죄는 우리 몸을, 우리의 인간관계를, 우리의 사회생활을, 심지어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하면서 파괴하고 있습니다.
존 헨리 조웨트라는 신학자는 이 무서운 죄의 세력 밑에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는가를 아주 웅변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죄는 파괴적인 존재이다. 모든 선한 힘은 죄의 파괴적인 힘에 의해 위축되고 시들어버린다. 모든 영적인 섬세함은 죄의 저주스러운 접촉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맹목적으로 일하도록 만든다. 죄는 청각을 마비시켜 사람들을 귀머거리로 만든다. 죄는 미각을 왜곡시켜 쓴 것을 단 것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혼돈시켜버린다. 죄는 촉각을 마비시켜 과거의 느낌만을 갖도록 만든다. 죄는 영적인 모든 좋은 감각을 막아버리고 질식시킨다. 우리는 죄에 의해서 무감각해지고 둔감해지며 우리가 반응하는 범위는 축소되어버린다. 죄는 무감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영혼을 짓밟음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의 세력입니다.
이와 같이 잔혹한 죄의 발 밑에 짓밟히는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고 악한지 바울이 구약성경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10절에서 18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당시에는 구약성경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양피지에다 굵직굵직하게 기록해서 말아 놓은 것이 책이니까 만약에 시편을 들고 다니라고 하면 아마 지게에다 지고 다녀야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편의 두루마리 성경을 개인이 가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편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중에 어느 본문을 하나 찾으려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줄이 읽어 내려가야 했습니다.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 기록한 구절은 성경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인용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전에 읽었던 말씀을 기억나는 대로 대강 정리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같은 방법을 랍비들은 구슬꿰기를 한다고 합니다. 대단한 기억력을 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기억력 역시 성령의 영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로 시편과 이사야에서 인용을 했는데 시편 14장 1, 3, 5절과 10장 7절, 140장 3절, 36장 1절과 이사야 59장 7,8절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이 진단하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다시 정리해 놓은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이렇게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아주 무능하다, 아주 부패했다, 아주 절망적이다.
인간의 무능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11~13절).
어느 정도로 무능한지 아십니까? 깨닫지도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어 자기에게 선한 데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정도 무능합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절).
이 말은 인간이 본능적인 신(神) 의식마저 갖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막연히 "신이 있겠지" 하는 생각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찾는 자가 없다는 말은 신명기 4장 29절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우리에게는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찾을 만한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로마서 1장 2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이것이 무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알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만큼 철저한 무능이 어디 있습니까?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무익하게 되었다는 말은 우유가 쉬어서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쉬어버린 우유처럼 우리의 영과 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표준에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세상을 구석구석 다 살펴보아도 자기 뜻에 맞는 선을 행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능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생각도 못하고, 해서는 안 될 일에는 천재성을 보일 정도로 비정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선은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데는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빛으로 나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날갯죽지 부러진 새와 같습니다. 날갯죽지 부러진 새는 날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날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능해진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예수 없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일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능자입니다.
인간의 부패
두 번째로 사람은 아주 부패했습니다.
13절부터 15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13~15절).
옛날 사람들은 목구멍, 혀, 입술, 입을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이비인후과에 해당하는 부위들이 모두 다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목구멍이 열린 무덤의 출입구 같다면 무덤은 틀림없이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양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열린 무덤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장례 지낼 때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덮어버리지 않습니까? 짐승들이 파헤치지 않는 한 시체가 다시 노출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덤은 석회암을 파서 만든 자그마한 동굴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 동굴 하나가 한 집안의 공동 매장지로 사용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서 대대로 매장지로 삼은 것과 같습니다.
그 굴에는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여러 대의 자손들이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무덤이 하나의 동굴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 입구는 큰 돌로 막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도굴자가 침입하면 입구가 열린 채 방치되기 쉽습니다. 자연히 그 앞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악취가 진동하는 열린 무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명쾌하게 묘사한 자가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예수님께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부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세수하고 거울 앞에 앉아서 신경을 써가며 열심히 화장하는 것이 일입니다. 이것은 여성이 가진 고유한 일이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얼굴은 꾸밀 수 있어도 마음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 독사의 독 같은 저주, 욕지거리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패한 마음은 말만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더럽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우리의 전인격이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 끝까지 죄로 인해 더러워졌다는 말입니다. '피 흘리는 데', 이것이 꼭 살인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웃을 향해서 해를 끼치는 모든 언동을 가리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하여 부패한 결과,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전부 적대 관계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의 관계'는 살벌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의 역사는 형이 동생을 쳐 죽이는 살인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인간의 발자취는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거짓말하시나요? 성경이니까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써놓았나요? 그는 진실하신 분입니다. 피에 굶주린 이리 떼처럼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성 때문에 '너와 나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사람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히 이웃과 갈등이 빚어지게 됩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다른 사람은 져야 합니다. 지는 사람은 언젠가 기회만 있으면 복수를 하려고 노립니다. 자연히 승자는 항상 불안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언젠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따라잡지 않을까,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덤벼들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은 경쟁 관계에서는 승자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서로 간의 경쟁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기 바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릴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무엇이나 자기 좋은 대로 판단해 버립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경쟁자요, 위협자라는 전제하에 이웃을 대면하는 불행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의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그 발이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하는 것은 죄로 부패한 인간의 행동 성향이요, 태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절망
세 번째로는 인간은 아주 절망적이라고 했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6~18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자신이 가는 길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60~70년 살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인생을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나님이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 앞에는 각자의 죗값을 지불해야 할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파멸과 고생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평강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다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뿐입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절망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운명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무지입니다. 아마 이것만큼 무서운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모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창조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떨 줄을 알아야 작은 소망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을 향해 눈을 치켜뜨고 냉소를 할 정도이니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냐 말입니다.
우리 모두의 혈관에는 착하고 의로운 동생을 들판에서 잔인하게 돌로 쳐 죽인 살인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다음에 하나님이 따졌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무릎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릅니다. 내가 무슨 동생을 지키는 보초병인가요?" 얼마나 건방집니까? 얼마나 안하무인입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인의 피가 지금도 사람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떨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의 권세 아래서 포승당한 채 끌려다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무능한지요. 얼마나 부패했는지요. 얼마나 절망적인 실존인지요. 이것은 바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의 사상도 아닙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의 어떤 주장도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구약에 있는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
누가 선언하였습니까? 이 선언은 누구의 선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고 올바른 믿음을 갖기를 원하면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뱅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알면 자신을 믿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예수 앞으로 나오는 데 있어서 필수 요건이요, 믿음을 바로 갖기 위한 절대 요건이요, 우리가 믿음생활 하기 위한 불가분의 요소입니다.
제가 수 년간 목회를 하면서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사람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은 자들이요, 자기가 소경인 줄 깨닫지 못한 채 어두운 밤길을 더듬거리다 망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녀도 그렇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죄인과 내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다" 라고 했습니다. 묘한 말입니다만 사실입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너무 간사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입으로 죄인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입으로 쉽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죄인으로서의 자기 실존에 눈을 뜨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교회를 10년 이상 다녀도 진정으로 죄인 의식을 못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이 판사를 향해 죽을 죄를 지었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사정을 한답니다. 그러면 판사가 그 사람을 내려다보고 죽을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들어가서 몇 개월 살다 나와야 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죽을 죄인이라는 말은 싹 없어지고 자기가 언제 그렇게 악한 일을 했느냐는 식으로 불평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마음으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이 집사는 될 수 있습니다. 세례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자리까지 오려면 은혜 안 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를 않으면 아직도 나라는 자존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야말로 의로우려고 그 절망적인 노력까지도 포기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선하려고 하는 것까지 죄라고 인정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의로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철저한 절망 후에 소망이 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우리의 영혼을 향해 임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지 않습니까?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안전하게 끌어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서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접근하다가는 같이 죽습니다. 힘이 넘치는 사람을 물에서 끌어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경험 많은 구조원들은 이런 사람을 안전하게 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머리를 쳐서 실신을 시켜버립니다.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짓을 그만둘 때 안전하게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래도 선하다. 내가 뭐 잘못한 것 있어? 나만큼 양심적인 사람도 흔하지 않아. 그런데 왜 교회만 오면 듣기 싫은 죄인 소리는 자주 하는 거야?"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불평입니다.
이런 불평은 하나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종종 우리가 차를 몰다가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줄을 모르고 휙 지나가버립니다. 가슴이 섬뜩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두리번거리면서 누구를 찾나요? 경찰관입니다. 두리번거리다 교통 순경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마치 교통 순경이 안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죄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 부재가 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통 신호 위반을 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철저하게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고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70년대의 인기 가수 중에 이종용 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가 부른 히트곡은 '너', '겨울아이', '바보처럼 살았군요' 등입니다. 이 사람이 대마초 사건에 걸려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3개월 가량 징역을 살았는데 거기서 어느 사형수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진지한 전도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때 사형수가 "당신은 곧 나가게 되겠지요.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다한 몫까지 하면서 살아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이종용 씨는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만 해도 자기가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리에 떨어지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었습니다. 대마초에서 해방을 받았던 것입니다. 출감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사형수가 판사보다 구원받기 쉬운지 아십니까? 사형수는 자기에 대해 절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감옥 밖에 있을 때보다 안에 들어가서 예수 믿기가 쉬운지 아십니까? 감옥 안에 들어가면서 자기에게 절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시는 그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진지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무능하고 아주 부패하고 아주 절망적인 우리의 실존을 확인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손을 붙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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