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209쪽에 있는 글입니다.
11. 자랑할 데가 어디뇨?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장 27~31절
지금 우리가 펼쳐 놓은 말씀 초두에서 중요한 질문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있을 수가 없느니라"라는 단호한 대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간에 읽은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로마서 전체 내용을 절반 정도 터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구원의 가장 큰 걸림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가려는 사람은 아주 교만한 자입니다. 예수 믿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을 들라면 교만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교만이야말로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고 믿음을 병들게 만드는 무서운 독소인 것을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이 최초로 범죄할 때부터 교만은 빠지기 쉬운 함정이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창 3:5) 되고 싶어 했던 하와의 교만은 비참한 인간 타락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4) 하고 뻐기던 천사의 교만은 사탄의 출현을 알리는 팡파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만을 가장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교만에 관해서 참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은 팔을 걷어붙이고 다루신다. 탐심에 대해서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시지만 교만에 대해서는 열 배로 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실감나게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온통 죄악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내세우며 자랑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모순입니까?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흉하고 사나운 꼴이겠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어떤 형제를 만나기 위해 특별 면회를 신청해 놓고 장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면회가 허락되어서 제 생전 처음으로 교도소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한참 복도를 걸어가는데 벽에 붙여 놓은 어떤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내용이 아주 인상적이라 인용해 봅니다. '행동은 낮게 가지고, 이상은 높게 가져라.' 처음에는 행동을 낮게 가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오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기가 죽어버리는데 거기에다 또 행동을 낮게 가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이 표어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교도소에 들어왔다고 다 허리를 굽히고 고분고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의 사회 경력을 가지고 거만을 떠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는 잘못이 없다며 큰소리를 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행동을 낮게 가지라는 충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해도 형무소 안에서는 그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과거 경력을 내세우면서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운다면 교도관이 보기에 얼마나 눈꼴 사납겠습니까? 일단 죄수복을 입었으면 죄수답게 처신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죄수복을 입은 죄인답게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거드름을 피우고 거만하게 으스댄다면 하나님인들 그런 죄인을 어떻게 가만히 두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교만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뇨"(27절).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29절), "율법을 폐하느뇨"(31절). 이 세 가지 질문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논리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전체를 끌어가는 주제가 같기 때문에 별개의 내용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주제는 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는지라"(24절).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27절에서는 오직 '믿음의 법'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법'은 방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자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결국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는 말씀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할 수 없도록 세 가지로 안전장치를 해 놓으셨습니다. 세 가지 질문을 놓고 이 안전장치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배제하십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27절).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절대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설령 100가지 중에서 99가지 계율을 지켰다고 해도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율법을 범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외양상으로는 다 지켰다고 해도 마음으로 악을 품으면 율법을 범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늘 아래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우리에게 선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하찮은 것 가지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믿음까지 선물로 주셔서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교만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방법이 너무 쉬워서 못마땅하다는 식으로 불평하는 사람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 뭐가 그래? 너무 싱거운 것 같아. 무엇인가 요구를 좀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공로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유대인과 흡사한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자기 자랑거리를 많이 들고 나오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바울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 6절은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는지를 입증해 줍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은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선민이라고 자랑합니다. 왕의 후손이라고 자랑합니다. 순수 혈통이라고 자랑합니다. 경건하다고 자랑합니다. 유대교에 충성했다고 자랑합니다. 완전주의자라고 자랑합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이 정도로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을 즐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유대인의 근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랑거리를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의 어느 종파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내용을 상세하게 장부에 기록한다고 합니다. 율법을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 체크하기 위해서 주부들이 가계부를 기록하듯이 조목조목 항목을 기록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조항을 가지고 출납 장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 조항을 지켰을 때는 수입란에 기입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지출란에 기장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선행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무언의 압력을 넣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짓입니다. 자기 공로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근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실례가 아닌가 합니다.
유대인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교만이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우리 이방인들도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본성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자기가 한몫하기를 바라는 심정은 어떤 사람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설 때 떳떳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베푼 선행은 잘 기억해 둡니다. 가끔 자기의 선행에 대해서만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랑하고파 하는 본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트로맨이라는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 60% 이상이 선한 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통계 자료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공로주의를 배격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며칠 전에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로마서 설교를 계속 들으니 정말 가슴이 답답합니다. 죄 이야기만 듣고 있으니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몰라요. 목사님, 설교 내용을 좀 바꾸어 보실 의향 없으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성경 말씀이 그렇게 가르쳐 주시는데 난들 도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합니다. 저는 그대로 설교할 거예요" 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 꿈이었습니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을 보니 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로마서를 배우면서 죄의식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직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천성이 착한 사람이야'라고 은근히 자부심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문이나 학벌, 경력, 남다른 성공 등을 내세우는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국에 유학 간 우리 나라 청년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그랬더니 그 한국 학생이 가소롭다는듯이 웃으며 "우리 아버지가 신학대학 학장이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것과 자기 아버지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믿음 좋은 가문처럼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학생의 잠재의식 속에는 가문을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교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히 경계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까지도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기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한다면 그 믿음이 자기의 공로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하나님, 내 믿음 여기 있나이다" 하고 자랑거리로 들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매개체입니다.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내가 잘 나서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또 하나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경건 생활에 힘쓰는 것을 자랑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매일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기를 힘씁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려고 하면 그를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새벽부터 교회에 나가 3시간이나 기도했어. 또 집에 돌아와 1시간 동안 경건의 노트를 썼다. 이만큼 경건생활에 힘쓰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거야.' 이런 마음이 생긴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 경건을 내놓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바른 신앙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 모르게 구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꺼리는 궂은 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헌신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과 선행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선행을 다루는 면에 있어서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선행과 구원을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봅니다. 선행은 수단이요, 구원은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받기 위한 목적으로 선행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선행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는 선행을 하지 않아도 그다지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구원받기 싫어서 선행을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는 선행과 구원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됩니다. 즉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에 힘쓰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원인이요, 선행은 결과입니다. 자랑하기 위해서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기 위해서 경건생활, 헌신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이 선하게 살려고 하지 않으면 마땅히 질책을 받아야 합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고 왜 그 모양으로 사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서 선행을 하는 자는 그 선행이 자기 자랑이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베풀어도, 아무리 경건생활에 힘써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못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건생활에 힘써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헌신해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를 붙드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다 배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외에는 어떤 구원의 길도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29절과 3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입니다. 그의 눈에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별이 없고 선한 자, 악한 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직 예수 믿음으로 구원 얻어야 할 죄인으로 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천상천하에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열어 놓은 구원의 길도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유대인을 구원하는 방법이나 이방인을 구원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외에는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다른 종교는 모두 거짓되고 허황된 것입니다.
일전에 종교 다원주의 논쟁이 신문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특별총회는 감신대 학장인 변선환 박사와 동대학의 홍정수 교수를 징계하기로 결정하고 목사직과 교수직을 박탈하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는 내용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위와 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말씀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중보 역할을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구원의 길이 여러 갈래가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나가서 자랑할까요? 모르기는 해도 아마 참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스님은 도봉산에 있는 암자에 들어가 6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앉아 참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들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예배 의식을 철저히 지키는 데 있어서 회교도를 따를 사람이 있을까요?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 예배 의식을 행하는데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 매시간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도 예배 시간이 되면 복도에 나와 메카를 향해 절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것을 자랑거리로 들고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고행을 하는 데 있어서 힌두교도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데 있어서 바리새인을 능가할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1, 12절을 보면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고 자기를 자랑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 12).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전부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며 그 공로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왜 힘들게 참선을 합니까? 왜 위선으로 계율을 지킵니까? 모두가 자기 자랑거리를 내놓으려고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랑을 근원적으로 봉쇄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만이 구원자입니다. 예수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어떤 의도 없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의를 배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의라도 거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절).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으니까 율법이 소용없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것이야말로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예수님은 죄인인 만큼 우리를 의인 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주님이 대신 순종하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율법의 심판을 받으셨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을 천하에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있는 모든 예언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율법을 철저히 순종하고 완성하신 그것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의를 우리의 의로 돌려 놓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를 붙들면 예수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의 의를 가지고 자기 앞에 나오는 자만을 의인으로 받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분을 믿는 사람은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처지에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 위해 순종하시고 죽어 주신 것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의만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자랑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고웨 강변에 위치한 랑바레네에서 질병에 시달리고 기아와 문명에 허덕이는 원주민들을 위하여 52년간 따뜻한 인류애를 펼쳤습니다. 그는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사랑의 의술을 베풂으로써 원시림의 성자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그때 받은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건립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만큼 위대한 생을 산 사람을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헌신으로 연소된 보람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를 얼마나 흠모하고 동경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쓴 <예수전 연구사>를 읽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책의 내용대로하면,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슈바이처 박사가 훗날에 바른 신앙으로 돌아왔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끝까지 복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나갔을까 궁금합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생명을 경외하느라 방 안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도 안 죽였어요. 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었어요.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어요"라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이 그의 의를 인정하시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슈바이처의 선행이 하늘의 별처럼 인류 역사에서 빛나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의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랑하지 맙시다. 믿음이 좋아도 자랑하지 맙시다. 헌신을 많이 해도 자랑하지 맙시다. 선행을 아무리 해도 자랑하지 맙시다. 주를 위해 어떤 수고를 해도 자랑하지 맙시다. 바울 사도처럼 오직 예수만 자랑합시다. 그의 교훈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 둡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빌 3:7).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도, 우리의 선도 하나님 앞에 내놓지 맙시다. 우리는 체면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마중을 나가기나 했나요? 그가 세상에서 고생하실 때 밥 한 끼를 해 주었나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눈물 한 방울을 흘려 주었나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주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자나 깨나 예수만 자랑합시다. 자나 깨나 예수의 공로만 자랑합시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신 그 은혜만 자랑합시다. 찬송가 343장을 보면 울어도 안 된다, 힘써도 안 된다, 참아도 안 된다는 가사가 나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많이 운다고 자랑거리가 아니며, 힘써서 선행을 한다고 자랑거리가 아니며, 참고 인내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옛날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모릅니다. 구원의 감격에 겨워 얼마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는지 모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복음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사랑에 따르는 축복 (사무엘하 7장 8-17절) (0) | 2022.09.12 |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인 (느헤미야 11장 1-36절) (0) | 2022.09.12 |
의의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갈5:5) (0) | 2022.09.12 |
가족의 역할 (에베소서 5:15 ~ 6:4) (0) | 2022.09.12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디모데후서1:6-8) (0) | 2022.09.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