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18. 더욱 넘치는 은혜

by 【고동엽】 2022. 9. 11.
목록가기
 
 

 

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343쪽에 있는 글입니다.

 

 

18. 더욱 넘치는 은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5장 12~21절

 

 

 

 

 지난 장에서 우리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배웠습니다.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요 대표가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머리요 대표가 되십니다. 우리는 불순종한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짓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받고 살아났습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깨닫는 자마다 어찌 그 가슴에 감격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일대일이라는 대칭 관계에서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가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을 평행선상에 놓고 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아담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15절).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16절).
 
 이렇게 "같지 아니하다"는 말이 두 번 연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같지 않다는 말입니까? 15절은 아담의 범죄가 성경상 예수님의 순종과 같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한 결과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 21절 사이에 '은혜', '은사', '선물'이라는 용어가 무려 열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은혜'와 '은사'는 '카리스'라는 동일한 어근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이 둘을 의미상 엄격히 구별해서 보아야 할 성경 본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5장에서는 은혜, 은사, 선물을 동일한 의미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앞부분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운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고, 경건치 아니하고, 죄인이며 원수 된 관계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것이 '은혜'요, '은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들어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와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나 '은사'나 '선물'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주려고 할 때 선물 꾸러미나 그 속에 든 내용물을 별도로 다루지 않는 것처럼 이 세 가지를 너무 예민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같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같을 수 없다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줌의 진흙덩이에 불과한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지만 아담은 죄인입니다.
 물론 아담도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결국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똑같이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굴복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행위 면에서 보아도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행위는 불순종으로 우리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는 온전한 순종으로 우리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죽이는 일과 살리는 일이 같이 취급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 결과도 상반되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인 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전 생애를 요약하면 저주만 있을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요약하면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온갖 저주를 안겨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많이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충만성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만족스럽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욱 넘치도록 주시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절).
 
 여기에서도 은혜는 더욱 넘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절).
 
 은혜의 특징은 넘치는 것인데 막연히 넘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현대어로 바꾸면 '슈퍼(Super)'라는 말이 삽입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슈퍼는 최상급입니다. 그래서 '더욱 넘친다'는 말은 '남아돈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다', '삼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은혜는 항상 우리 생각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더욱 넘친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으로부터 넘치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가 더욱 넘치고 넘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을 하실 때도 항상 넘치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까요?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빈 그물을 끌고 해변가로 힘없이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나에 있는 혼인 잔칫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포도주가 모자라서 난감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시고 어느 정도로 채워 주셨습니까? 한 병, 두 병이 아니지요. 마당에 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셔서 허기에 지친 무리들을 먹이실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저 겨우 배고픈 정도만 면하도록 하셨나요? 아닙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포식을 하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을 정도로 먹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는 넘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님의 은혜는 적당히 주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더 줄 수 없을 정도로 지극하게 풍성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는 곳에 더욱 넘치는 은혜
 
 어떤 경우에 은혜가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 의거해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은혜는 사망이 왕 노릇 하는 데서 더욱 넘칩니다.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절).
 
 이 말씀에서 보다시피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순간부터 세상은 사망이 권세를 휘두르는 공동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왕 노릇 한다는 말은 그 힘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사망의 철권 아래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망은 잔인무도한 폭군입니다. 누가 이 무서운 세력을 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는 사망을 빗대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시 90:5).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어떤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인천시 인구만큼의 사람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얻은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넘치게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은 더욱 넘치게 받은 은혜가 안겨 준 결과입니다. 이것은 미래형 동사로서 미래에 가서 확실하게 누릴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것은 현재 동사로 씌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지금 이 세상에서 받고 있습니다. 현재 이와 같이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들거나 노쇠하면 자연히 사망의 손에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은 우리의 영혼에 그 추악한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본능적인 공포는 있지만 인간 실존의 공포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이 넘치도록 주신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우리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패색이 역력합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이것은 사망을 의인화시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호시탐탐 우리를 끌고 가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끌고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의롭다고 인정하셨는데 어떻게 끌고 갈 수 있습니까? 죄가 있어야 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은 성도에게는 사망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화살을 힘있게 날려 보내려면 그만큼 강한 힘을 받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쏘려고 하는 사망의 시위는 이미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켜 주셨기 때문에 사망이 그것을 들고 나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구약을 보면 이 사실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망은 무차별로 사람을 끌어다가 무덤에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에녹과 엘리야에게는 호되게 망신을 당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했습니다. 사망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허허 내 손에 안 들어오는 자도 있구나.' 아마 사망은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자 사망은 급소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치명타를 당했습니다. 멀지 않아 사망의 비참한 종말이 임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계 20:13).
 
 사망이 끌어다가 무덤에 집어넣은 자들이 다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사망은 사람들을 끌고 무덤에 던질 때는 승리한 줄 알고 자신만만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먹은 것을 다 토해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사망과 음부는 같은 뜻입니다. 종말이 되면 사망이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
 
 그때는 우리 몸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우리는 사망을 이겼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가 된 것입니다. 고래가 요나를 삼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우리가 사망을 완전히 집어 삼킨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왕 노릇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사망을 이겼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까지 다 포함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면서 즐거워하는 놀라운 축복을 우리가 다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담이 죄 짓기 전의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이상일까요? 후자가 옳은 대답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원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담이 죄짓기 이전, 에덴 동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마귀가 우리를 유혹해 올 경우 반드시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아담이 누리지 못한 수준의 영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죄가 다시 유혹하지 못할 뿐더러 죽음이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죽음은 잔혹한 것입니다. 이제 갓 피어난 어린아이들을 죽음이 끌고갈 때 우리는 얼마나 통분을 느낍니까? 아직도 젊디 젊은 부부를 죽음이 갈라 놓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처절한 슬픔 속에 빠집니까? 이런 사망의 잔혹한 행동 앞에 울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울었으니까요. 그분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망이 난폭하게 날뛰도록 내버려 두시는 데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얼마나 넘치는가를 더욱 실감나게 확인시키려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 바로는 더 완악해졌습니다. 바로가 점점 더 완악해지니까 하나님의 이적 기사가 더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그가 완악해지면 완악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게 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더욱더 실감하게 되었던 사건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이곳저곳에서 너무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기막힌 현실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사망이 날뛰면 날뛸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힘있게 역사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고통하며 눈물 흘리는 분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분들을 위하여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지금도 그 은혜는 넘치고 있지만 장차 주님 앞에 가서 누릴 그 영광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망 때문에 고통을 당한 이상으로 더 크게, 더 실감나게, 더 영광스럽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죄가 많은 곳에 더욱 넘치는 은혜
 
 다음으로 은혜는 죄가 많은 곳에 더욱 넘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절).
 
 이 말씀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더러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게 간수가 들고 오는 등불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없을 때에는 캄캄해서 죄수는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곳에 살고 있는지, 자기 몸에 오물이 묻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간수가 등불을 들고 오면 비로소 자기가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이와 같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표준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 됨을 여실히 들추어내어 보여 줍니다. 마치 간수가 들고 온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등불을 가지고는 얼굴을 깨끗이 닦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 그 자체는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등불에 비추어 보아 자기가 더럽다는 것을 안 사람은 몸을 씻기 위해서 세면대로 달려갑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악한가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악한가를 덜 보면 덜 보는 것만큼 은혜는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앞에서 자기가 악한 것을 많이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죄악을 씻기 위하여 그만큼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더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20절 중간을 보면 우리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많은 곳에는 은혜도 더욱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이 은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죄의식이 강하게 머리를 쳐들 때마다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마음 속의 죄와의 싸움이 깨끗이 사라지는 듯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고 믿음이 좋아지는데도 계속 마음에는 죄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식이 예민하게 되살아나고 조그마한 것에도 죄의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수록 죄에 대해서 더 많이 예민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수록 육신의 정욕과 싸우는 갈등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일종의 자서전적인 고백으로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잠깐 7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바울의 마음 속에 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인만이 겪는 실존의 갈등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견딜 수 없는 죄의식,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가 죄책감으로 괴로움을 당하면 교활한 마귀는 잘됐다는 식으로 우리를 사정없이 공격합니다.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근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깊은 고통 속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때일수록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25절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마치 엉엉 울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환호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분이 있나요?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하기만 하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죄를 많이 지은 자가 특별히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질렀던 죄악은 문득문득 되살아 나는 악몽과 같습니다. 아무리 용서받았다고 믿어도 자꾸 되살아나서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이 옵니다. 고통이 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창녀 같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믿음이 탁월했던 바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며 '포행자요 살인자요 훼방자요 죄인의 괴수로다' 하고 괴로워할 때마다, 자기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증인으로 불러 일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그 넘치는 은혜를 특별히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죄책감, 자기가 자기를 용서할 수 없는 가책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치는 거야" 하고 큰소리를 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넘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것은 실제로 어떤 죄를 범한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간음한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그 죄 많은 여인이 주님의 크신 은혜에 얼마나 감격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넓고 큰지 보통 때는 잘 모르다가 죄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죄를 짓고 보니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종합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죄의식이 많은 자의 심령일수록 은혜는 더 넘치고, 남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는 자일수록 은혜는 더 넘치고, 자칫 실수하여 죄를 지었을 때 은혜가 더 넘친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을수록 좋겠다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오해의 위험에 대해서는 6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해할 소지가 많아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이가 병이 나서 앓아 누우면 어머니는 애끓는 심정으로 간호를 합니다. 앓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짓는 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지만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남보다 더 악하다는 갈등과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백 번 한다 해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21절을 잠깐 주목합시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21절).
 
 죄의 반대는 '의'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죄가 왕 노릇 한다면 의가 왕 노릇 한다는 말로 대구를 이루어야 하는데 의라는 말 대신에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죄를 상대할 적수는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죄를 대신 처리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면 그것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색함이 없이 주고 또 주십니다. 관대함과 아량은 은혜의 본질입니다. 죄는 적을수록 좋고, 재물은 적당할수록 좋고, 은혜는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만은 넘치게 받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죄 때문에 고통이 옵니까? 자주 빠지는 어떤 죄로 인해서 근심합니까? 과거의 죄를 되돌아보며 두려워합니까? 그런 때일수록 주님 앞으로 더 열심히 찾아 나오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을 간구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더욱 넘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이 왕 노릇 하는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굉장한 구원의 확신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설혹 죄를 범하는 일이 있어도 버림받지 않았다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의롭다고 하신 주의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끌고 갈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역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일을 하시는 분들 중에 가끔 부끄러운 사람이 좀 있습니다. 옥 목사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앞에 가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저는 소위 정치 목사를 참 싫어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원래 더러운 것이 아닙니까? 목사가 정치에 재미를 붙이면 자기도 모르게 부패하고 더러워집니다. 한국 교회 과거의 역사를 보면 교단 정치에 손을 댔다가 망한 목사들이 참 많습니다. 한때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때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오래갈 수가 없지요. 나중에는 교회에서 쫓겨나 거지처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잘못은 했지만 예수를 믿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의 죄가 큰 만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큰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목욕탕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전부 벌거벗고 뛰어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목사지만, 그래서 벌거벗고 불 속에서 뛰어나오듯이 겨우 천국에 들어가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런 자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리고 우리의 어떤 죄악보다도 더 풍성하게 넘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이토록 넘치는데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토록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지 못한다면 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자처럼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지로 산다면 어떻게 그분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왕 노릇 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치고,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 속에서 빈궁하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만은 풍성히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궁에서 살 왕자들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