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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은혜에 감사하라 (시편107편)

by 【고동엽】 2022. 9. 6.

기이한 은혜에 감사하라  (시편107편)


들어가는 말
우리들이 이렇게 살면 잘 모르지만 고아원에 가보면 이 세상에는 의외로 비정한 부모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말 고아원에 안 오면 안되는 상황에 있는 아이는 의외로 적고 그 중 다수가 버림 받은 아이들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낳았다고 해서 다 부모가 아니라 그 아이를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숨질 때까지 사랑하고 돌봐야만 진정한 부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말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사랑과 은혜가 어디 십자가에서만 나타났겠습니까?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것도 은혜였지만 그렇게 구원받은 후에 살아온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온 삶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가슴 벅차게 올리면서 시편 107편 전체에서 후렴구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가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 로다”라고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찬송의 제목이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 인자하신 분이 자기들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 이 두 가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과 우리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입니다.
주님의 성품은 주님으로 하여금 그 성품을 따라서 행동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성품을 묵상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행하실지를 알 수 있고 반대로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오늘 시인이 감격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주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시인은 자기에게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그 일들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가페의 성품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사람에게 기원을 두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간들의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줄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이것을 뒤집어보면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는 것도 사실은 깊이 뿌리박힌 자기 사랑 때문이며 자아를 성취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가치 없는 죄인들, 의로운 것이 없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에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 생전에 나누어달라고 해서 다른 나라로 가지고 가 모두 허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돼지 우리에서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이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다만 아버지를 조르고 사정하여 밥만 먹여주고 품꾼 중의 하나로 써달라고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집은 아직도 먼데 동구 밖에서 이미 아버지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올 줄 알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가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는 짓무른 눈을 가지고 늘 나와서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들이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얼싸안고 집으로 데려가서 품군이 아닌 완전한 아들로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아들에게 뜻밖의 일이 되었던 이유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성품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인자한 분이시라는 것, 아가페의 사랑을 가진 분이시라는 것, 그것을 이 아들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은 모든 신비한 체험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 알면 우리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고,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의로운 성품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면 우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이한 일
시인을 더욱 가슴 벅차게 한 것은 그 아가페의 사랑이 그저 객관적으로 하나님 안에 존재하 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행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리고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서 찬송할찌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기이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다가 갈라지거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의 체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기이한 일을 행하신 대상이‘인생(인간)’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편 전체에 흐르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님은 전능하고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정말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한 인생이 의미있게 되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더러운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적 자체로 깊은 신앙을 갖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에 엎드린 것은 기적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을 신뢰할 수 있었고, 일생에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사랑의 관계를 체험했기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을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보내심
시인은 특별히 오늘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리고 자기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 들을 찬송하자고 제의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보내어 자기들을 위기에서 건져내셨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올해에도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육적인 은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업으로 여기고 자기를 고치는 것에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우리들을 끝없이 진리의 말씀으로 도전하셔서 주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자신을 고치도록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은혜에 묻혀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바로잡아 살펴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깊은 사랑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살아 있을 때에는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것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고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주님이 주신 것들은 기억이 안나고 부족한 것만 생각납니다. 인간의 욕망이 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그것을 다 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어지지 않는 이 복음이 우리에게 믿어졌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도 사실상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현격히 부족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 진리가 믿어지게 하셔서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살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도 특별한 삶을 살지 못하는데도 언제나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서 여기까

지 살아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면서 성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무기력에서 다시 새 힘을 얻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부요한 때에 한없이 멀게 느껴지던 하나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집착하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욕망이 얼마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감사와 찬송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사제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고 찬양하고 주의 그 기이하신 일들을 선포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감사제는 특별히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릴 때, 그 사람에게 이 과정은 자기의 존재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드리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그 제사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맹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감사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맺음말
주님의 기이한 일, 값없는 죄인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피로 구원하신 후에 시시때때로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훈계하시며 우리 안에 있는 죽지 않은 옛자아와 싸울 때에 언제나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들을 살게 하셨으니 이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죄인 가운데에서 높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높이고 찬송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출처/김동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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