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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97쪽에 있는 글입니다.
33. 은혜로 남은 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렸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로마서 11장 1~10절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은 탁월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가 어려서부터 고상한 꿈을 갖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가령 구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이렇게 설명을 한다고 합니다. "얘야,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하고 싸울 때 골리앗이라는 무시무시한 거인이 나타났거든. 그때 기가 질린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무엇이라고 떠들었는지 아니? '너무 커서 상대하여 싸우기는 틀렸어'라고 했단다. 그러나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달랐어. 뭐라고 했는지 아니? '야, 그놈 커서 물맷돌 하나 잘 맞아 주겠구나' 라고 했어." 같은 이야기라도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효과는 달라집니다. 어려서부터 유대 아이들처럼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은 사고력이나 판단력이 비범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려서부터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법을 배우며 자란 탓인지 모르지만 예수를 거부하며 핍박하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조금도 절망하지 않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 동족의 구원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낙관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1절).
바로 이것입니다. 겉을 보기에는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확신했습니까? 그는 자기가 확신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절).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치고 나만큼 예수를 배척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 같은 놈을 선택하셔서 믿게 하시지 않았는가?" 유대교의 골수분자요, 핍박자였던 자기를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을 보면 아직 믿지 않고 거역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근거로 그가 또 하나 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당한 것처럼 보이는 암흑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합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왕의 유혹을 받아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엘리야 선지자가 활약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남아 있나 하고 찾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온통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뿐인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3절).
그때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르기는 해도 껄껄 웃으며 대답하신 것 같아요.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4절).
엘리야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몽땅 우상 숭배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한 경건한 사람 칠천을 하나님이 남겨 놓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사실을 알고난 후 절망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바울은 엘리야의 예를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7천 명이 아직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절).
'남은 자'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그들은 무슨 선을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값없이 주는 구원의 선물이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떠나지 않는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참담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멀리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남은 자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남은 자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만 어느 민족이든 국가적으로 전부가 구원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전부 다 구원받는 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입니다.
어느 교회든 그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남은 자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남은 자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이 섞여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택함을 입는 데서 제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택함받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물을지 모르지만 대답은 분명히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원이 개인적이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바울에게서 꼭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동족을 놓고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상 숭배에 젖어 있어도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동족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다 할지라도 그 중에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남은 자가 있다는 꿈을 가지고 우리 사회와 국가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칠천 명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남북한의 5천만 명 가운데 그 칠천 명이 있다는 확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이 둘로 나뉘어져 극한 대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남은 자를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북한 동포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북한 정권이 아무리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북한 동포들만큼 속임을 당하며 핍박을 받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가운데 주체사상에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합 정권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듯이 북한 정권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남은 자 칠천 명이 할렐루야 찬송하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택함받지 못하는 사람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안 믿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 문제를 바울은 7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완악해졌다고 합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절).
여기서 '남은 자'들이란 앞에서 말한 남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8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완악해집니다. '완악'은 영적인 일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완악'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일을 많이 하면 손에 굳은 살이 박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살갗이 두터워져서 감각이 없어집니다. 이 무감각 상태가 '완악'의 원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완악해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귀가 안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감각이 전혀 없는 살갗처럼 신령한 일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7절을 다시 보십시오.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절).
구원받고 싶어 하는데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얻고 싶어서 구하는데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완악하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완악해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마치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완악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우리 자신의 부패한 성품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악함 배후에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8절).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고, 보지 못할 눈을 주셨고,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완악합니다. 그러나 본성의 완악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완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버리시고 눈도 막아버리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시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압니까?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기가 막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9, 10절).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슬프게도 어떤 자들한테는 이 저주가 그대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밥상'은 올무와 덫이 됩니다.
'밥상'이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누리는 분복이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먹고 마시는 데 빠져서 즐기는 생활 자체가 죽음의 길로 빠지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요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몇 차례씩 먹고 마시는 밥상이 건강이 되지 않고 병이 되고, 기쁨이 되지 않고 슬픔이 된다면 이처럼 불행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예수를 잘 믿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돈을 벌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그의 밥상이 복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부와 건강 신학'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해서 장수하면 그것이 예수 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이 다 틀린 말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잘 벌고 잘 먹는 형통이 올무가 되어 교회를 다녀도 평생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도 올무가 될 수 있는 밥상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진수성찬이 올무가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초라한 밥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복이 되었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막대한 돈 때문에 예수 못 믿었다면 그 돈이 '밥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분은 대통령이 되어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는 카터 대통령이 왔을 때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는 그의 간절한 말을 듣고도 끝까지 무시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국의 대통령 자리를 손에 넣은 그의 형통이 그에게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저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서 예배는 드리지만 머릿속에는 골프 칠 생각, 스윙할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감사할 문제가 아닙니다. 밥상이 올무요 덫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밥상의 올무요 덫이 되어서 결국은 구원받지 못하고 만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 말하는 행복과 형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 24;38, 39).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영적 암흑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완악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따질 수 없는 은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책임은 완악해서 믿지 아니한 그 사람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 그랬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어떤 남자가 친구의 꾐에 빠져 술집에 갔다고 합시다. 그곳에서 희희낙락하며 밤늦도록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술이 취한 채 운전을 하며 집으로 가는데 급기야는 과속으로 사람을 치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술이 깬 다음에 경관이 취조할 때 "왜 나를 탓하느냐, 나를 술집에 데리고 간 친구에게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술에 취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면 통합니까? 통하지 않습니다. 사고의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합니다. 친구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물론 마신 술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러니 저러니 하며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가 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의로 어떤 사람들을 버리시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 유식하다는 사람일수록 거부 반응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 하고 항변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스스로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창세 전부터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는 말씀에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다면 선택받았다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남은 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대신 분명히 어떤 사람은 완악한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 것은 나 때문인지 누가 아십니까?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질 수 있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고의로 버리셨다는 데 대해서 반발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고 한다면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지 아니하신 것도 논리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버리신 자가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내가 복음을 듣게 하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백 명 중에서 열 명은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악하기는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릴 때 부인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남편은 눈을 감고 조는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부인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놓고 부인은 마음이 부드러워서 믿었고 남편은 마음이 완악해서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본래 마음이 완악하기는 남편이나 부인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만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면 못 듣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수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온다고 해도 그 가운데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세상에 오셔서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데도 하나님이 듣도록 하신 자만이 들을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이 바로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근본 마음이 아무리 악해도 믿게 되고, 멸망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자들은 설혹 덜 악하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에 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분만이 아신다.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칼뱅은 여기에 대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버리고 믿지 못하게 하셨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꾸 파고들면 결국은 쓸데없는 고통만 당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드셔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신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은 괴롭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아니한 사람이면 우리가 아무리 동정해도, 아무리 위로해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통곡해도 소용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 같은 자를 택하셨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저 사람들을 버리셨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 문제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하나가 있습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을까? 왜 믿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듣는 귀를, 보는 눈을, 깨닫는 마음을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왜 저 사람은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믿지 못하게 하셨을까?" 하는 것보다 훨씬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해 대답이 안 나오는 것처럼 택함을 받은 나에 대해서도 대답이 안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왜 저 같은 놈을 택하셔서 은혜를 주셨습니까?" 하고 밤낮없이 고민해 보십시오. 아무리 논리를 펴서 증명해 보려고 해도 대답이 안 나옵니다. 버림받은 자를 놓고 "왜 그를 완악하게 하셔서 믿지 못하게 하셨을까?" 하고 따질 때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버림받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이러니 저러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인간끼리 비교해도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무엇을 보고 믿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생긴 것을 보아도 잘난 것이 별로 없고, 머리가 똑똑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잘되는 일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게다가 성격까지 괴팍해서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놓고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듣는 귀를 주셨고 보는 눈을 주셔서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를 놓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눈이 머셨지. 저런 사람을 좋다고 택하시다니."
사실 하나님을 두고 눈이 머셨다는 표현을 쓰기가 굉장히 두렵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러 들어오기 전에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좀더 선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눈이 머셨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그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제가 감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대로 하나님이 눈이 멀어서 누구를 택하셨다면 그 중에 첫번째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나요, 나" 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불가사의한 사건이 또 있습니까? 자기의 선택받음을 놓고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거나 모순을 범하셨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을 우연한 실수로 해석하고 싶은 자가 있습니까? 버림받은 자의 문제가 신비라면 선택받은 나 자신의 구원은 신비 중의 신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가 막힌 자기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지고 자꾸 따지려 들지만 은혜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구원 얻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꿇어앉아 흐느끼게 됩니다.
찬송가 가사를 쓴 위대한 신앙 인물들 중에 이 감격을 노래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이작 왓츠는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라고 찬송했습니다. 휫틀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크로스비라고 할 수 있는 송명희 씨도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그리고 존 뉴튼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존 뉴튼이 남긴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천국에 와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안 보여서 놀랄 것입니다. 둘째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로 노예 상인으로 악명 높았던 존 뉴튼이 그것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에게 왜 선택되어 구원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저 사람을 완악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진리 때문에 날마다 얼떨떨해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이렇게 중얼거려 보십시오. "허허, 하나님도 눈이 머셨지. 나 같은 놈이 뭐가 좋아서 택하셨지? 정말 모를 일이야."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이 감격이 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이 감격이 있습니까? 이 감격이 있으면 세상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병상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할렐루야" 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이 감격이 샘솟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반석에서 터지는 샘물처럼 이 감격이 넘치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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