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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오?

by 【고동엽】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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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75쪽에 있는 글입니다.

 

 

32.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로마서 10장 14~21절

 

 

 

 

 18세기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전도자, 조지 휫필드를 알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18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이 크게 지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미국 교회가 언더우드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를 우리나라에 파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탁월한 선교사가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교회의 형편도 많이 달라져 있을지 모릅니다.
 휫필드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30여 년 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초인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보통 일주일에 40시간 내지 60시간을 설교했습니다. 설교를 해 본 사람만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중노동인가를 압니다. 인간적으로 보아 그 정도로 강행군을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설교를 끝낸 다음에도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거나 자신을 초청해 준 집에 가서 함께 찬양하고 중보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이 말은 평안하게 살다가 녹이 슬듯 나이 들고 늙어 죽느니 차라리 있는 힘을 다해서 일하다가 진이 빠져서 죽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1770년 9월 29일, 전도 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에 그는 엑스터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을 통과하려고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몰려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그에게 설교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들판에 임시 강단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가 강단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그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설교하는 것보다 침대에 가서 눕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만큼 그는 지쳐 있었고 환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인치게 하옵시고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는 기도를 마친 후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날 그가 전한 메시지는 그의 평생을 통해 증거했던 말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설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잠자는 중에 평안히 주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에 비하면 조금 빨리 갔고, 일찍 떠나는 사람에 비해서는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얼마나 멋있는 인생을 살다 갔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멋있게 살다 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몇 살까지 살든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몇 살이 되든 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다가 부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왜 휫필드는 그토록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너무 많이 사용해서 닳아 없어지는 쇠망치처럼 인생을 살기 원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본문 1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절).
 
 그를 부르는 자에게 너무 부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복은 우주 공간을 다 채워도 끝이 없을 만큼 부요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그 은혜가 부요합니까?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는 영원토록 다함이 없는 의니 얼마나 부요합니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영생은 죽음의 그림자를 완전히 쫓아버리는 영원한 생명이니 얼마나 부요합니까? 저 하늘나라의 영광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가 안 되는 행복이니 얼마나 부요합니까? 이 부요함을 깨달은 사람은 휫필드처럼 지칠 때까지, 병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의 복음 안에 우리 모두를 부요하게 하는 축복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자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듣지 못해 믿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설혹 들었다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못 믿었다고 한다면, 정말 그렇다면 충분히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누군가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7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예수의 부요함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가끔 "예수의 '예' 자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우리 조상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까?" 하고 잊어버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변명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못 들어서 못 믿었다는 변명이 타당한 논리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못 들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절).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복음 전하는 종들을 그들에게 많이 보내 주셨습니다. 복된 소식을 전하는 종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발은 아름다운 발이요, 복된 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8절).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이내 그 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한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못 들었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주 듣고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백성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33년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은 우선순위상 제일 첫 자리에 있었고, 그만큼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이 오시면 복음이 어디서부터 증거된다고 했습니까? 첫째가 '예루살렘'이요, 둘째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입니다. 이곳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던 영역입니다. '땅 끝까지'만 이방인들에게 해당되는 영역입니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듣지 못했다는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도 이방 사람들에게 먼저 전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먼저 전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변사 더둘로는 그를 이렇게 비난하며 고소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행 24:5).
 
 바울은 염병이라는 욕을 듣을 정도로 유대인에게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이만큼 많이 주셨는데 못 들어서 못 믿었다는 말이 어찌 통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 들고 나오는 변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잘 알지 못해 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억지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만큼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백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못 믿었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19, 2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면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19절).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지만 이방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자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섬겨 온 유대인들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못 믿었다는 것은 논리상 도저히 맞지 않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20절).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구하거나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얼마나 어두운 백성입니까? 그럼에도 결국 그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지옥의 땔감이라고 하며 멸시했습니다. 그런 이방인들도 복음을 깨닫는데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했다니 말이 됩니까?
 정말 알 기회나 능력이 없어서 생긴 무지(無知)는 용납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게을러서 알지 못하는 무지는 변명이 안 됩니다.
 그 쉬운 예로 보험에 관계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험 약관을 잘 읽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처음 계약할 때에 소개인의 몇 마디 말만 듣고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정작 사건이 터지면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약관 내용을 정확히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해서 속은 것에 대해서는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고의로 안 읽은 것은 나중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꼭 그 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이 많이 증거해 주셨지만 그들은 게을러서 예수님에 대해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21절).
 
 하나님께서 오늘도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손을 벌리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하나님은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냄받은 소명자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못 들었다.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못 믿었다"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실제로 복음을 들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세계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직 이런 자들을 위해서 문을 닫지 않고 계십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의 날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보아 알 수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사방에서 불러내어 복음을 세계 도처에 전하게 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계속 보내고 계십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야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스스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상에 있는 교회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교사나 신학 공부를 한 교역자만이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소명자라는 좋지 못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 교회 안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이 지상에 나타날 하나님의 교회와 그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 속에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우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이 전해 준 말씀을 듣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소명, 즉 "모든 족속에게 가라"고 하는 소명 역시 우리 모두가 계승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보냄을 받은 소명자입니다. 교회가 보냄을 받은 것은 바로 내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어두움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다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시키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도해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켜야 하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이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열어서 '아, 내가 보냄을 받은 증인이구나. 다른 사람이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냄을 받았구나' 하는 깊은 인식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보냄받은 자로서의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우리는 가야 합니다. 세상으로 보냄 받았으면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먼저 우리 이웃에게 가야 합니다. 직장으로, 가정으로, 학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활 현장이 바로 보냄 받은 선교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야 한다고 말하면 "나는 전도하는 은혜를 못 받았어요" 하며 핑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가라고 하신 것은 특별히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4만여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해서 못 믿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세우신 것입니다. 은사받고 소명 받았다고 특별히 자각하는 불과 5% 미만의 사람들만 나가야 합니까?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교회 안에서 소명받은 5% 미만의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은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95%의 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명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끼리'라는 틀을 벗어나라
 
 우리가 이웃에게 가기 위해서는 불신자들과 좀더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끼리만 교제하는 것은 안 가는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끼리의 틀 속에서 뱅뱅 돌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 교제가 아름답다고 해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한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듣게 하려면 그들 개개인과 성실한 관계를 만드는 노력이 앞서야 합니다. 그들을 찾아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친해질 수 있도록 진실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주부는 믿지 아니하는 이웃집을 전도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만 해서 됩니까?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그 가정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까 궁리해야 합니다. 그 부인은 전도하려는 가정의 식구들 생일을 알아내서 달력에 적어 놓고는 생일 때마다 예쁜 카드를 준비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우리 모두가 본받을 만한 자세입니까? 여기에 비해 우리의 문제는 지나치게 우리끼리의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까? 못 들은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최근의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남아메리카, 특히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개신교가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에서 현재 개신교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년에 50만 명 이상이 개종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언젠가 그 나라에 교황이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굉장한 환영 집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간대에 같은 도시에서 또 다른 대형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의 전도 집회였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환영 집회에는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불과 10만 명 내외가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교회의 전도 집회에는 그 배가 되는 20만 명 이상이 모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아도 지금 남미 대륙에서 일고 있는 부흥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미 대륙의 부흥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한마디로 교회가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교단 가운데 오순절 교단의 전도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이제 갓 예수를 믿은 새신자들을 앉혀 놓고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당신이 지금 예수 믿었지요? 그렇다면 그 예수를 당신 혼자 모시고 있지 마세요. 아직도 예수를 몰라 멸망하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를 믿은 즉시 가까운 이웃한테 찾아가서 예수를 증거하도록 지도한 것이 오늘의 부흥을 일으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백 명 모이는 교회는 백 명의 선교사가 자기 생활 현장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천 명이 모이는 곳에는 천 명의 선교사가 매일매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가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비해 남미의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믿으면 그들을 성당 안에 붙들어 놓고 미사만 드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통해서 무슨 전도가 되겠습니까?
 '우리끼리'의 병은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한번 당신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당신 주변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매일 접촉하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의 수가 몇 명인지 알아보십시오. 놀랍게도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사귀어야 합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목사님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 사귀어서 그들을 전도하려고 일부러 경주용 자동차를 사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들과 경주를 한다고 합니다. 약간 지나친 것 같지만 그 정신은 좋은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날마다 교회 안에만 붙들려 있으면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안 믿는 사람과도 접촉을 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라
 
 그리고 우리는 이웃에게만 가면 안 됩니다.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땅 끝까지 가는 것은 특별히 소명받은 자들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휫필드처럼 위대한 전도자가 많이 나오도록, 자기 자신을 온전히 복음을 위해 바치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 나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가슴 뭉클한 기사를 하나 보았습니다. 둘로스 선교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로스 호가 필리핀에서 선교할 때에 모슬렘 교도가 던진 수류탄에 맞아 두 소녀가 순교했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이 들어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그 순교한 선교사 중에 뉴질랜드 태생의 자매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다이아나라고 하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언니는 동생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이제는 내 차례야. 내가 100% 주님을 위해서 나갈 차례야.'" 그 자매는 동생의 뒤를 이어 지금 둘로스 선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가라고 하면 특별한 소명이 없다고 변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모두가 지구촌에서 살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어느 곳이나 여행할 수 있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마치 작은 촌락에 사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문 선교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평신도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 세계를 향해 진군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둘로스 선교선이 인천항에 들어왔을 때 저는 둘로스 선에 가서 꼭대기에 있는 브릿지부터 물 밑에 있는 엔진 기관실까지 안내를 받으면서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참 충격을 받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엔진 기관실로 들어가서 둘러보는데 얼마나 텁텁하고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지요, 실내 온도를 물어 보았더니 우리나라에서는 일하기에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도양이나 아프리카 지역으로 가면 기관실 온도가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린다고 합니다. 푹푹 찌는 것이지요.
 마침 그곳에서 기름 옷을 입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첫인상으로는 70세 가까이 된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에게 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어요. 그리고 나이를 물어 보았더니 63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기관실에서 일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15년째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부인도 그 배에 같이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평범한 평신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생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기관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온이 높아 쉴 사이 없이 비지땀이 흐르는 기관실에서 그토록 장기간 일을 했으니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홍안의 소년처럼 맑고 기쁨이 가득해 있었습니다. 제가 그 형제에게 받은 감동과 충격은 쉽게 식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든지 복음을 위해서 땅 끝까지 보냄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 자기를 드리기만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소명감을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키웁니까? 자녀를 키우십시오. 직장생활을 하십니까? 보냄을 받은 선교사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십시오. 사업을 하십니까? 소명감을 가지고 당신의 사업 전부가 선교를 위해서 쓰임받을 수 있도록 거룩하게 구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업 확장하는 데만 돈을 투자하지 마십시오. 그 돈의 일부를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수 있는 일에 투자해야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보냄을 받았으면 반드시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가끔 "나의 삶이 전부 다 복음 증거하는 것인데 꼭 입을 열고 전해야 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전도하는 것 자체를 문화인답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하지 아니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전하라고 주신 것이지 보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이란 복음의 시녀는 될 수 있으나 복음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 못하는 자가 어찌 믿으리요."
 그러므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이 확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의 기름을 점검하듯이 날마다 점검하십시오. 오늘 내 인격과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항상 점검하십시오. 그러나 이웃 사람이 당신에게 감동을 받기까지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이웃 사람이 당신을 보고 '참 예수 믿는 사람이라 다르구나' 하고 감동받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감동받기 전에 죽으면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설혹 그들을 감동시킬 만한 덕이 별로 없다 할지라도 전하십시오.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믿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전할 때는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오해하지 않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서 부요함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나만 구원받는 것을, 내 가족만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서 영원한 나라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아름다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혼자만 이 부요함을 독차지하고 즐기려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입니다. 내 교회, 내 가족의 구원만으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날을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약 천국이 당신 혼자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 하나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실 분이 아닙니다. 모든 족속이 그에게 무릎 꿇고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받았다면 그 다음에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못 들어서 못 믿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그때 이사야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대답이 오늘 우리 모두의 대답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가슴을 열고 이와 같이 주님께 말씀드릴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좋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먼저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받고 우리의 가정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나라에 있는 70% 이상의 불신자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 믿게 합시다. 우리를 통해 북한에 있는 동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합시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듣지 못해서 못 믿었다는 변명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한 사람도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못 들어서 예수 못 믿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못 들어서 못 믿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독수리가 모이는 죽음의 골짜기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보냄을 받는 우리를 통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군대와 같이 살아나는 에스겔 골짜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맴돌지 맙시다. 가지 않으면서 간다고 말하지 맙시다. 입을 열지 않으면서 전한다고 말하지 맙시다. 전하지도 않으면서 믿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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