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셨으니 (행2:24)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우거하고 있던 중 예수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현상을 바라보고 의아해 하던 무리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담대하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법 없는 자들의 어떤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되어진 일입니다.
(엡 1:19,20)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께서 보내사 오셨습니다.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수없이 예언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고 더욱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하루속히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메시아가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어쨌든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은 공통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권능'이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행위(miracle), 즉 능력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사'는 권능에 의한 영향력으로서 주로 인간에게 일으키는 이적으로서 '신유' 등의 기적을 말하는데, 이 모든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이나 기사, 또는 표적들을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타내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로지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또,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베푸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결국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시정하며 동시에 예수를 확실한 그리스도로 확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언대로 죽으셨습니다.
(행 2:23)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유대인들이 '법 없는 자' 즉 로마 병사들의 손을 빌어 예수를 죽였지만 그것은 기실 성령의 예언을 성취시킨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주신 예언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수백 년 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에언입니다.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시편 기자를 통해서 주신 예언입니다
(시 38:11)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 109:2)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예수의 죽음은 유대 몇몇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의 실현인 것입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장 위대한 죽음인 것은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 준 바'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 택하신 자발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대신 이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이는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었습니다.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고통(헬-오디나스 / 히-헤벨)은 사냥꾼들이 포획하기 위하여 놓은 덫과 같은 '죽음의 덫', 혹은 '매는 줄'을 뜻하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의 덫으로부터 풀어 내셨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 입각해서 보면 그리스도는 대제사장과 제물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자입니다
(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전 15:4-8)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일 년에 일차 대제사장이 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듯이 '십자가'라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이 죽어서 나오면 죄가 사하여지지 않은 것이 되고 살아나 오면 제물이 무흠하여 죄가 사해진 것인데 예수께서는 살아서 나오심으로써 부활은 그의 속죄가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사망조차 예수 위에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신 권위를 입증합니다.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음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도 죄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죄를 지으므로 죽음의 법칙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로 모든 인간도 범죄 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님도 죽으셨으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니 죽음의 법칙에 굴복 할 수 없으십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받아 연합한 자들에게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롬 6:5-11)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가 죽음에 매어 있을 수 없는 종교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죄의 사슬로 모든 인간을 사망 안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지배 할 수 없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에서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이 있다합니다. 이 날에는 학생들이 점심을 싸와서 야외 식당에서 먹어야 하고, 학교 측은 유명한 강사를 초청하여 강당에서 강의하게 한다합니다. 어느 해, 폴 틸리치 박사가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2시간 반동안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강의했습니다. 그는 자유주의 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며 강의했고, 강의를 마친 후에는 질문 있는지 물었습니다. 강당의 뒤쪽에 앉아 있었던 한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틸리치 박사님(사과를 꺼내서 먹기 시작한다), 아작 아작... 간단한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아작 아작...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아작, 아작... 그리고 헬라어로 말씀을 외울 수는 없소이다만, 쩝쩝...그리고 나이버나 하이데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아작 아작 (그는 다 먹은 사과의 꼬다리를 들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 것인가요, 단 것인가요?" 틸리치 박사는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노인은 가방 안에 사과의 꼬다리를 던지면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구먼." 1,000여 명이 모여 있던 강당에는 박수와 함성이 울려 퍼졌고, 틸리치 박사는 그렇게 강단에서 내려오게 되었다합니다. (둘로스자료-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구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러므로 부활을 확실히 믿고 전해야 합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신앙의 예표 (요나 2:1~10) (0) | 2022.09.11 |
---|---|
18. 더욱 넘치는 은혜 (0) | 2022.09.11 |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언 (누가복음 24:1~12) (0) | 2022.09.11 |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1-7) (0) | 2022.09.11 |
제자에게 세 선물을 (눅 24;30-35) (0) | 2022.09.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