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 (고전 15:3-8)
드디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참으로 두려운 기운이 감도는 음산한 분위기 엿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침 일찍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순간 예루살렘 도시는 밝고 소망찬 환희로 가득차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죽은 사람이 되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있다가 또 죽는 그런 되살아남이 아니고 부활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시 살아남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얼마 있으면 또 죽습니다. 나사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 수넴여인의 아들 등이 다시 살아난 경우인데 그들은 또 다시 죽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남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신비한 되살아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부활의 첫 열매로 죽은 뒤 썩지 않는 신비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오늘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는 핵심 교리입니다.
이 부활은 성경에 의인들의 부활이라는 말로 약속되어 있고(눅 14:14, 행 24:15) 또 생명의 부활(요 5:29) 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 부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곳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 곳에 어렴풋이 나와 있습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이 너무 고통 속에서 헤매다가 고백하기를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이 부활관이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통해서, 계시록에서 이 부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들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는 자신도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증명되고 증거되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고유권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고 또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보증으로 첫 열매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서 무덤에 묻어버리면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에서 그 무덤에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세상의 희망입니다. 의의 승리입니다. 신앙의 꿈의 실현입니다. 그 약속의 실현을 예수께서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으로
예수께서 금요일에 죽으시고 그 밤에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하루 동안 무덤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토요일을 비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 자들인 인간들로부터 재판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땅에 묻히셨습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비애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주일날 새벽이 되자 일찍 여인들이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굳게 닫혀 있던 무덤문은 열렸고 예수님의 시체는 간데없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는 여 제자들 앞에 천사가 나타나 그 분이 살아나셨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와서 여기 무덤을 보라”고 했습니다. “생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여 제자들이 천사로부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돌아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소식입니까. 그래서 이 소식이 Good News입니다.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전하는 일이 바로 이 굿 뉴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굿 뉴스를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성경은 칭송했습니다.
그 부활소식을 접한 순간 예루살렘의 그 어둡고 무거웠던 침울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 승리의 기쁜 소식이 기왕에 모였던 300여만 명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신비하게도 300만 명의 전령들의 입 소식으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전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더 이상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기독교가 성립될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내가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문제입니다. 부활은 그만큼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이 이루어지려면 몇까지 전제가 있습니다.
죽 음
부활은 죽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게 50kg 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6시간동안 고난 받다가 죽으셨습니다. 의사 트루먼 데이비스(Truman Davis)라는 의학자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연구를 통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동안 몸의 상태변화”를 연구하였습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먼저 몸을 지탱하던 양팔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서 결국 질식사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생명이 연장되면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다리를 꺾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빨리 죽도록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요 19장31절을 보면 로마 병정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것도 시편 34편20절에서 예언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대목입니다. 강도는 마음이 독해서 잘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꺾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옆구리를 찌르니 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피를 다 쏟고 완전히 탈진되어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죽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부활은 비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묻혀야 비로소 부활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가을에 씨를 심으면 땅속에서 썩어야 봄에 싹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어서 땅에 묻혔다가 안식 후 첫날 아침 부활하셨습니다.
증 명
또 부활했으면 그 부활이 증명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그만큼 신비한 것이기 에 잘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온갖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진짜 부활했느냐, 혹시 잘못 본 것 아니냐,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고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냐 하고 부활의 진위여부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그때까지 부활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문제는 이렇게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활에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조지 맥도웰이라는 주석자는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는 7가지 사실을 말했습니다. 첫째증거로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인봉이 끊어진 사실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간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와서 그 봉인을 뜯어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증거는 빈 무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까 무덤 속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돌의 무게는 보통 1,360 kg에서 1,800kg이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 밤에 그것을 소리도 없이 옮겼겠습니까. 제자들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네 번째 증거는 로마병정들이 도망쳤다는 사실입니다. 무덤이 비어있지 않았으면 그들이 도망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증거는 제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성경말씀대로 세마포만 정돈된 채 있었습니다. 누가 무덤에 들어와서 병사들의 눈을 속이고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 해 갔다면 옷을 벗기고 그렇게 정돈까지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목격만 한 것이 아니고 손으로 만져보고 상처를 확인까지 하고 같이 식사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박해한 사람들에게까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여자들입니다. 당시 유대풍습에는 여자들의 증언을 무시했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성들의 증언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날조라면 여자들의 증언을 성경에 기록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곧바로 승천하지 않고 40여 일간 머물러 계셨던 것도 자신의 부활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시려는 뜻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일곱 번째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를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난후 일신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부활 후 그토록 죽음을 무릅쓰고 증명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예수의 부활을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보고 들어도 믿기가 참 어려운 것이 부활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도마입니다. 이 도마가 이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져보고 비로서 믿었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뭔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부활이 명백하게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스티브스라는 공군중위가 훈련 제트기를 타고 비행훈련 중에 험한 산중에서 추락했습니다. 그가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아주 험난한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까 자신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니까 실종사망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비행사로 하여금 비행기 추락을 조작했다는 혐의로 이 공군중위는 강제 전역을 당했습니다. 그때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증명은 안 되고 증거도 제시할 수 없고 그의 증언을 누가 믿어주지도 않고 무조건 안전하게 살아서 귀환하려는 목적 때문에 무작정 헤매다 보니까 사고 지점도 잊어버렸고 난감했을 것입니다. 이 증명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20년 후에 추락비행기 잔해가 캠프 중이던 보이 스카우트 소년들에게 의해서 발견되어 추락 사실은 진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부활사건도 이렇게 믿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학자들 가운데도, 목회자들 가운데도, 신자들 가운데도 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왜 부활하셨나.
죽음을 이긴 사건
부활은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왜 생겨났습니까. 죽음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생겨난 재앙입니다. 성경은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의 재앙을 주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예수는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국 죄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 죽음으로부터도 자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이고 축복의 통로입니다.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새 질서의 제시
제자들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요 며칠 동안 제자들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반갑고 환희에 찼겠습니까. 그때 가장 반갑게 주님을 맞이한 것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정색을 하면서 “나를 붙잡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동안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상황을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너무 반가워서 “선생님” 하고 달려갔습니다. 마리아가 “선생님” 하고 부른 것은 과거에 부른 호칭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제 주님은 과거의 주님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과거에 죽은 주님이 아니고 이제는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정색을 하시며 다가서지 못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자들은 다시 옛날의 관계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질서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안식처 제공
부활은 영원의 안식처의 대명사 입니다. 안전한 포구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식처 때문에 때로 죽음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그 안식처 때문에 목숨을 던지며 순교했습니다. 사역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안식처 때문에 몸을 아끼지 않고 사역에 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 천국, 안식, 영원, 구원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모두 신앙의 궁극이고 최종 목적이고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기독교로 신앙을 개종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평소에 특히 젊었을 때에는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조국 독일이 나치의 핍박아래 놓여있을 때 내가 그렇게 경멸하고 무시하던 교회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교회 외에 나의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갑니다. 나의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로 나는 돌아갑니다.”
이 안식처를 알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면 떠돌던 배들은 모두 안전한 포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풍랑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포구는 안전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 부활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영혼의 안전한 포구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이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마침내 그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고 그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징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 안식처로 초청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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