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팔을 들어 올리는 일 (출애굽기 17: 8-16; 사도행전 6:1-7)
떠나시는 하영호 목사님의 앞길에 주님의 더 크신 축복과 더 많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흔히들 하는 말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발전은 교역자와 평신도 여러분들이 합심(合心)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어 갈 때 비로소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라고들 말합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옳은 말씀입니다. 이 명제는, 분명, 교회에 대하여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共感)하는 만고(萬古)에 빛날 진리(眞理)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만큼, 그 만큼 또한, 그것을 어떻게(how) 실행하여야 하느냐 하는 그 how의 문제, 그 어떻게 의 문제는 그 무엇보다 더욱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는 목회자와 일반 평신도가 한꺼번에 다 달라붙어서 힘쓰고 애쓰기만 하면 반드시 다 잘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또한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홀로 주도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 때문에 교회를 "게마인샾트(Gemeinschaft)냐? 게셀샾트(Gesellschaft)냐?" 하면서 교회 공동체 개념을 양자택일론(兩者擇一論)으로 그 정의를 갈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조직사회 속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교회 본연의 사명이 뒷전으로 밀리게 되고 교회도 기업화되는 현상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서구 교회의 몰락은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생겨났다고 하겠으며 한국교회도 이러한 서구 교회의 나쁜 전철을 되풀이하여 밟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앙은 반 기독교적이고 반 성서적이며 신성모독적인 신앙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즉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의 일은 아니다!!" 라고 해서 모든 것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 두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뒷짐만 지고 나 몰라라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관행위도 또한 죄(罪)라는 것이 성서의 확고한 주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이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가장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는 성서 본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우리 본문은 우리에게 단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그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믿음의 참여를 하는 것>이라고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실은 또한 성서가 구약성서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 까지 줄 곧 동일하게 말해 온 성서적 증언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 온 이스라엘인들이 광야를 경유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르비딤"이라 이름 하는 한 사막 지역에 이르러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되는데, 즉 "아말렉"이라고 부르는 가나안의 거인 족(巨人 族)과 사생결단의 충돌을 한 일이었습니다. 아말렉인들 과의 이 싸움은 이스라엘인들이 광야 유랑생활을 할 때 부딪혔던 위기 중 가장 큰 위기로서, 소위 말하는, "가나안적 위기의 가장 대표적인 위기"였었습니다. 실로, 이 전쟁은 전무후무한 일대 대 격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인들에게 잡아먹히느냐 아니면 가나안의 살육적 위기를 이겨내고 구원받은 선민(選民)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되느냐 라고 하는 것을 결정짓게 하는 이 사건은 이스라엘 유랑민들이 출애굽을 한 후 처음으로 직면하였던 절대 절명의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 이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가나안과의 투쟁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가나안에게 잡아 먹혀 흡수되느냐 라고 하는 종말론적 긴장으로 얼룩진 역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는 "바알주의!"라는 신앙체계는 굶주린 호랑이나 사자를 혼자 심산유곡에서 만난 것만큼이나 절박한 위험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어떻게 하여야 승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절대 절명의 중대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르비딤에서 일어난 아말렉과의 전쟁을 감히 이스라엘이 어떻게(!) 극복하였고 또 그 승리를 어떻게(!) 따 내었느냐 하는 것을 잘 살피는 것은 특히 구약 신앙역사(信仰歷史)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으며 동시에 이 이스라엘이 과연 이 지상의 뭇 백성을 구원할 선민 신앙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매우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이렇게 대답해 주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군사령관인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
너는 사람들을 택하여 나아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이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손", 그 손이(!) 이 위급한 전쟁 상황에서 결정적인 구원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모세의 예고대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그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그 모세의 팔!!이 그 전쟁 승패의 결정적이고도 유일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이 강조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언어는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에서도 더욱 더 확실한 말씀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그 팔이 피곤하여 더 이상 그 팔을 계속 들고 있을 수 없게 되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 와서 그 돌 위에 모세를 앉게 하고는 그들이 모세의 양편에서 그의 양 쪽 팔을 들어 올려서, 해가 지도록 까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그 모세의 팔이 아래로 내려 오지 않도록 들고 있었더니!! 저 절대 무적의 막강한 적군인 거인 족 아말렉 군사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무산대중의 유랑민이 감히 다 무찔러 격파하게 되고 저 무력한 무산 대중이 히브리 유민들인 이스라엘이 오히려 저 강력한 거인족 아말렉의 대군을 대적하여 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론도 아니고 훌도 아니고, 그리고 군사령관인 여호수아조차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그 모세의 팔이 홀로!! 저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모세의 팔도 피곤하여 땅으로 내려 왔었다고 하는 보도로 미루어 볼 때, 모세의 팔이나 모세 자신으로부터도 그 승리의 힘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단지, 모세의 손에 들려진 그 "하나님의 지팡이!" 만이! 이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할 수 있었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는 그 무엇보다 먼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거두어들인 그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든 그 팔 만이 홀로! 일구어 낸 것임을 백성 앞에서 맨 먼저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건이 말하는 그 의도와 뜻, 즉 "아말렉은 영원히 기억하지 말고 그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것"을 당부하는 말씀을 책에 기록하게 한 후, 끝으로 이를 기념하는 제단(祭壇)을 쌓고 "야훼 닛시!!"라는 이름의 군기 깃발을 거기에 세우게 한 다음, 다음과 같이 전쟁 종료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 더불어 영원히! 싸우시리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안에 아말렉을 영원히! 없이 하여라. 영원히! 그것을 기억조차도 하지 말라. (출17:16,14)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는 아말렉을 영원한! 원수(怨讐)로 삼고 대대(代代)로! 아말렉을 대표로 하는 가나안의 바알주의자들과 영원히! 싸우실 것이니 너희도 또한 저 가나안의 바알주의를 너희의 기억에서부터 영원히! 씻어내도록 노력하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그러므로 이러한 가나안적 바알주의를 영원히 몰아내어 가나안적 바알주의를 격파하는 "하나님 전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라!라는 신의 명령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이 이 일을 위하여 어떻게(how) 하여야 하느냐 하는 이 how!의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성서적 증언을 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다음 세 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첫째는(1) 아말렉과의 전쟁은 영원히 하나님이 홀로! 담당하시는 전쟁이라는 것, 그 둘째는(2)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팔을 드는 일만을 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3) 아말렉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 것, 즉 가나안의 바알 주의적 힘의 논리는 상종도 하지 말고 접촉도 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만을 강력히 당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서가 말하려는 바의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일일 뿐이요 "인간의 일"은 아니라는 것, 특히 이스라엘은 비록 침공을 받아 "방어전(防禦戰)"에 임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인간은 전쟁을 도발하거나 주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가나안과의 전쟁, 말하자면, 물질주의/권력지상주의/향락지상주의로 대변되는 가나안주의 또는 바알주의, 즉 가나안의 거인 아말렉을 격파하는 그 전쟁은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 아말렉과의 전쟁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즉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의 손이 들리우면 이스라엘이 이길 수밖에 없고 그 손이 내려지면 이스라엘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아론이 전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귀한 인품과 지도력을 가진 평신도 지도자인, 아마, 장로 대표 격인 훌이 전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군 총 사령관인 전쟁 영웅 여호수아가 전쟁을 주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세의 그 팔이 들리느냐 내려지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며 인간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수하는 것도 인간의 일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이나 복수는 인간이 손을 대면 부정(不淨) 타는 일종의 "타부(taboo)"요 "저주받는 물건"(anathema)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손댈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한 비지니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전쟁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전쟁으로부터는 일체! 손을 떼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쟁을 도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이 승리를 믿기만 하고 찬양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이 뜻에 복종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만! 하라는 것입니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일을 주도하려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려 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한 일부이지 결코 창조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며 단지 그의 뜻의 지시에 복종하며 그분의 뜻을 실천/봉사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전쟁의 소문과 전쟁의 재난으로 들끓고 있는 이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찌지고 볶고 아귀다툼을 하면서 서로 물고 먹으며 싸우기에만 혈안이 된 이 인간 세계 안에서 아론도 아니고 훌도 아니고 군 사령관인 여호수아도 아니고 심지어는 모세 자신도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무슨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진실로,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든 팔, 그 팔을 들어 올리는 일 만이 우리 인간이 하여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함으로서! "아말렉"이라는 가나안주의의 우상, 바알주의의 우상은 반드시 격파 제거하여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란 각각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그 둘은 어떻게 구분되고 또 어떻게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매우 중요한 물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결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즉 악마를 격파하여 보복하는 전쟁과 그 악마를 추방하고 이기는 그 구원의 승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과 인간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즉 하나님의 종의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지팡이(=하나님의 말씀)의 지휘에 따라, 그 지팡이의 오르내림에 따라!! 성실하게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이것이 그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승리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인본주의적 오만이요 비현실적이고도 무신론적인 환상이며 우리를 멸망에로 빠뜨리는 미로(迷路)일 뿐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고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복종하여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뿐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이라는 사탄을 격파하는 하나님의 전쟁의 그 승리는 "아론"으로부터도 "훌"로부터도 "여호수아"로부터도 심지어는 "모세"로부터도(!) 오는 것이 아니 고 오직 하나님의 종 모세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부터 만!! 그의 말씀으로부터만!! 올 뿐이라는 말입니다. 아론이 이 지팡이를 대신할 수 없고, 훌이 또한 이 지팡이를 대신할 수 없으며 군대 총사령관인 여호수아도 이 지팡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도 이 "지팡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 지휘하는 아론, 훌,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는 오직 모세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 만!!이, 즉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 이 능력의 지팡이, 이 말씀의 지팡이, 이 지팡이만을 확고히 손에 잡고 그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그 사명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도 인간이어서 지팡이 잡은 팔을 스스로 혼자 영원히 들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지팡이"는 - 이 하나님의 말씀은 - 모세가 들고 있고 그리고 지팡이를 든 모세의 그 "팔"은 아론과 훌이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지시에 따라 백성을 이쪽저쪽으로 이동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이 하나님의 전쟁의 질서가 즉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백성의 지도자 사이의 이 질서가 바르게 수립될 때에만!! 아말렉이라는 이 세상 악마와의 전쟁에서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 권사, 집사로 호칭되는 "일반 신도의 지도자들"의 역할을, 즉 성직자가 아닌(!) 일반 평신도 지도자들의 역할을, 우리 낙산교회로 말한다면, 운영위원회니 발전 위원회니 청빙 위원회니 하는 교회 대표자 그룹들을 총괄해서 "아론과 훌, 그리고 여호수아의 역할"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인 목사(신부, 전도사 등등)"의 역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역할에 비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안에 장로, 권사, 집사를 특별히 세워 일반 성도들의 지도자로 세우는 것은 오직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팔(!!)을 함께 붙들어 주는 그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 신도들과 그 일반 신도의 지도자들은, 흔히 하는 말로 평신도 지도자들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는 하나님의 종의 팔을 붙들고서 그 팔이 땅으로 내려오지 않도록(!!) 도와주는 그 일!!에만 매진하여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증언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아무리 조직사회 속의 조직체라고는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반(반) 성서적이고 반(反) 기독교적인 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물리쳐야 할 적(敵) 그리스도의 세력들의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6:1-7의 말씀도 또한!!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가 교회의 급성장(急成長)에 따른 여러 가지 난해한 문제들을 잘 풀어나가기 위하여 취하였던 그 모범적 조치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즉 그 열 두 사도들은 그들이 제자 훈련을 시켜 온 그 모든 제자들을 다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우리의 신약본문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맡은 자들인데 이 "말씀 전하는 일"은 제쳐 놓 고 [나가서] 접대하는 일에 매이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 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을 택하여 접대하는 그 일을 맡겨라. 그 러나 우리는 오직! 이 말씀 사역(使役)에만!! 힘쓰리라.
그렇습니다.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 그렇게 조치를 취하였더니, 즉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무에만 충실하고 평신도 지도자들, 장로, 권사, 집사들은 오직 접대하는 일에만 충실 하는 것과 하나님의 종의 팔을 들어 올리는 일에만 충실 하는 그런 선교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였더니, 뜻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지고! 또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더라!"(행 6: 7)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올바른 양적 부흥은 바로 이렇게,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교회들의 중요한 중심과제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즉 목사가, 사도가, 목자가 그의 손에 하나님의 권능의 지팡이인 하나님의 말씀(!)만을 확고히 들고서 그 손이 하늘을 향해 대대로, -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완전 승리하는 그 때까지 - 대대로! 뻗어 있게 하여 그 손이 결코 땅으로 내려 오는 일이 없도록 하는 그 일은! 성도들과 그리고 이 성도들을 이끄는 이 일반 평신도 지도자들인 아론, 훌, 여호수아의 몫, 즉 장로, 권사, 집사님들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사자"(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든 자)가 힘을 잃어, 그의 손에 들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능력의 지 팡이가 땅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끝까지 하나님의 종의 팔을 붙들어 올리는 일!!, 그것이 온 성도들과 그리고 그 평신도 지도자들인 장로, 권사, 집사님들께서 하셔야 하실 일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잘 증언하고 있듯이, 제자훈련을 받은 여러 성도님들은 즉 "평신도 지도자들"은 모름 직이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맡은 저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그 전하는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 즉 구제하는 일, 접대하는 일, 등등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대학의 대학생들이 교수들을 향하여 우리는 당신네 교수들을 우리의 등록금으로 고용한 사람들이니 우리의 지시를 따르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 대학의 교육은 문자 그대로 콩가루가 되듯이 교회도 평신도 지도자들이 목사를 향하여 당신들은 우리가 고용한 피고용인이니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지 말고 우리의 종이 되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 교회는 또한 문자 그대로 콩가루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라!" "능력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하나님의 종의 팔을 들어 올려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는 그 순간 그 때까지 모세의 팔, 하나님의 종의 팔을 들어 올려라!" 이것은 오늘의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떠나시는 하영호 목사님의 앞날에 주님의 크신 은혜와 도우심이 있으셔서 새로이 시작하는 선교 사역에서는 지금까지 해 오신 그 어느 선교사역보다 더욱 성공적인 사역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 가정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남아계시는 낙산교우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더욱 더 큰 은혜와 도우심이 계셔서 새로 오시는 목사님의 새롭고 생명력 있는 말씀의 꼴을 공급받으시며 큰 발전을 이루시기 기원합니다. 비록 서로들 떠나 있다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의 연결 고리는 더욱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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