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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기 1장 15~18절)

by 【고동엽】 2022. 9. 10.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기 1장 15~18절)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이 겨레가 내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 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고린도 후서 1장 10~11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받은 은혜의 선물을 두고,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흔히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구원의 주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공의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며 특히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감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성서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의 말씀, 즉 희망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젊은 며느리 류의 그 갸륵한 효심의 한 표현, 즉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표현 속에서 민족과 지역을 뛰어 넘어 있는 하나님 신앙의 중요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습니다. 나오미라고 이름하는 한 가난한 유태인 여인이 베들레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때아닌 흉년이 들어 온 유대땅은 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흉년을 피하려고 남편과 두아들을 권유하여 잠시 고향을 떠나 흉년이 들지 않는 이방의 나라인 모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압땅으로 이민을 오자 말자 이 낯선 땅에서 돌연 남편이 죽게 됩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과부가 된 나오미는 이곳 이방땅의 처녀들인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두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천운으로 하고 세상에 태어난 듯한 이 여인은 곧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조차도 손자도 보지 못한 채 이방 땅에서 잃게 되는 아픔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자란 남자는 다 죽어서 이 가문은 졸지에 대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대책 없이 순식간에 나그네된 이 이방 땅에 내동댕이쳐진 이 연약한 세 여인, 즉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이방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 이 세과부 여인들이 이 험난하고 각박한 고해 같은 세상을 도대체 수로 헤쳐 나가며 살아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성서를 읽어 가노라면 실로 눈물겹다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려 깊고 신앙심이 깊은 나오미는 자신도 과부신세이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저 젊은 이방인 며느리들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슬픔을 오히려 자기의 슬픔 이상으로 생각하며 억척스러우리만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결코 비굴하게 비켜 가려고 하는바 없이 감히 저 젊은 과부 며느리들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그들과 더불어 철저히 고난을 함께 나누며 능히 그 고난의 생을 성공적으로 소화하고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해 나오미가 떠나왔던 조국 땅에도 흉년이 물러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살기 좋게 된 자기 조국으로 다시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역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나오미는 저 두 젊은 이방인 며느리를 이끌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문득 이 귀향길에서 저 새파랗게 젊디젊은 두 며느리를 장래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야 늙은 몸, 이제 이 내고향, 내 조국땅으로 돌아가서 짧은 생을 고향 땅에서 몸붙여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조국 땅에 묻혀지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저 두 젊은 며느리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저 며느리들에게는 시어머니의 고향이 오히려 낯설고 물설은 남의 나라이고, 또 남편도 없는 객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 늙은 시어머니만을 따라 나섰다가 시어머니인 나마저도 죽어 없어지면 저 젊은 며느리들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저 젊은 과부며느리들을 불러 놓고는 간곡한 말로 자기가 가는 길을 따라 나서지 말고 저들 며느리들의 조국인 모압땅에 그냥 남아서 또 새 남편을 만나 재가를 하여 새인생을 열어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이 늙고 희망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아까운 청춘을 그렇게 희생할 수야 없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간곡하게 만류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고부간에 주고받는 대화는 동양윤리의 한 극치를 묘사해 주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얼어붙은 산천이 흐르는 시내가 되어 녹아 내리듯 깊고도 깊은 사랑의 교향곡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실로 원수의 나라로 갈라져 있던 유대나라와 모압나라의 국경선은 눈덩이 마냥 녹아서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면이 지극해서 큰며느리인 오르바는 슬픔에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자신의 조국으로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와 같이 있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인생을 먼저 살고 혼자된 과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룻은 끝까지 어머니와 같이 할 것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저 불쌍한 시어머니, 일찍 남편을 잃고 과부된 몸에 두 아들을 객지에서 먹여 살리면서 또 철들지 않은 처녀인 나를 데려다가 딸처럼 삼고 길러주셨던 저 시어머니가 이제 다 늙어 대책 없는 인생황혼을 맞게 되었는데, 저 늙으신 시어머니가 천에의 고아가 되어 저토록 처량하게 고향 땅에 홀로 묻히게 해 드리는 것은 정말 딸된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깥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여식애를 데려다가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며 뿐만 아니라 깊고도 살뜰한 사랑과 위로를 통하여는 성서의 하나님이신 참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일러주어 영적으로 신앙의 눈도 뜨게 해주신 저 분을 이제 홀로 그 노경의 길을 걸어가게 해 드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룻이 알았던 본래의 신은 사실은 모압신이었지만 이제 룻이 그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던 신, 그 참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가 아니라 저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알게 된 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모압의 신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족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구구절절 어머니의 사랑의 생을 통하여 며느리 룻에게 알려진 '어머니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룻 그녀가 자기 민족을 통하여 배운 신은 모압민족의 전통을 통하여 또한 민족의 종교적 전례와 교리를 통하여 배운 신이라면 그가 그의 시어머니를 통하여 배운 신은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의 삶을 통해서 배운 그런 하나님이었다고 하겠습니다.

19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만 31년전 2월, 구정이 가까웠던 어느 혹한의 겨울날 저는 더 이상 혼자 걷기 어려울 정도의 중병에 걸렸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력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병이 하도 심하여 제가 주일학교 교사 시절에 아직도 나이 어린 제자들도 매일 같이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일과처럼 저희 집에 달려와서 무릎을 조아리고 앉아서는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김선생님은 장차 목사가 될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지금 데려가지 마시고 한번 더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소리 모아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그들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기라도 하듯이 병의 차도는 전혀 없는 체 저승사자와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새벽 한 시쯤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따라 유난히 귀를 모으게 했던 한 음성인 가냘픈 어머니의 기도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통렬한 단장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 무질서한 애가 서려있는 탄식이요, 울부짖음이요, 절규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구 정리도 되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냥 내뱉으시면서 "하나님 아부지예, 이곤이 제발 살리주이소. 저게 그래 하도 목사가 되겠다고 그래싸서 신학교로 보냈는데 이제 신학교도 졸업하고 곧 주의 종이 될라고 카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교? 저 자식이 저렇게 죽을 병에 걸리서 저렇게 피를 토하고 있심더. 차라리 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저 이곤이 대신에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고 저 이곤이만은 마 살려주시면 안되겠심미꺼? 저게 사내로 태어났는데 장개도 한번 못가보고 죽어가 되겠심미꺼?" 기도라는게, 기도라는 게 말입니다. 그저 이렇게만 소박하고도 절박하게 문지방을 붙들고 두드리며 아들 살려달라고 때를 쓰는 울부짖음의 호소로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저 놈의 불효한 아들보다는 어머니 당신을 차라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시는 기도, 또 어느 멀쩡한 처녀 하나 신세 망쳐놓으시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다 장성한 아들이 장가도 한번 못가보고 죽는 것이 안쓰러워서 장가라도 한번 가보고 죽게 해달라고 목메어 부르짖는 어머니의 저 단장의 호소. 실로 나는 기독교 교리가 가르쳐온 그 하나님이 바로 저 어머니의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도 무력하게 보이는 예전엔 미쳐 보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감히 나는 저 룻처럼 어머니의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며 그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여기서 바르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는 핵심은 어머니의 사랑의 삶을 통하여 계시되고 있는 그 하나님, 민족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고 종교라고 하는 울타리도 넘으며 교리주의라고 하는 담도 넘는 오직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심볼(symbol)인 어머니라고 하는 분, 진통하면서 우리를 낳아 주시고 자신의 온 진액을 다 짜서 우리를 길러주시는 그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과 그의 그 십자가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시고 계시되시는 그 하나님만이,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만이 그 분 그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데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저 사랑의 화신이신 하나님, 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아니 그 자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비로소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실로 룻의 이러한 신앙적 각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종류의 관념적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 위대한 혁명적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이 설교자 자신도 이 신앙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었었습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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