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 이 본문은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 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사실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구절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주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뱀과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기 직전에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구절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이 '가죽옷'은
동물을 죽여서 만든 옷이기 때문에 이것이 짐승을 죽여서 속죄하는 제사의 시작이라고 보기 도 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짧은 구절을 보고 그러한 상상을 하는 것은 성 경의 계시의 순서를 너무 지나치게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후에 밝혀진 풍부 한 계시의 결론을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그 계시의 시대에 갖고 들어와서 먼저 일어난 일들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제사의 시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방금 이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징벌한 기사는 나와 있지만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귈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제사의 기록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 또 하나는 제사를 드리면 사 람이 짐승을 죽여서 드려야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짐승을 죽여서 스스로 제사를지내신다는 것은 조금 어불성설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건에서 더 많 이 주목해야 할 것은 모피만 남기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짐승의 죽은 시체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 몸 위에 걸쳐진 가죽옷 그 자체라는 이야기입니다.
범죄한 인간, 타락한 자연
우선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의 큰 변화가 세상에 찾아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 의해 서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로,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관리자로 에덴동산에 있었 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서로가 완전한 화해와 화목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를 받아서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을 상하거나 고통을 받는 그 런 일들은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사람들에게 쉽게 낡거나 떨어지지 않고, 외부의 어떤 습격이나 충격으
로부터 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질기고 튼튼한 옷이 필요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
실 자체가 이미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조화와 화목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을 잡아서 만든 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그들의 신체를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들은 자연과 화해를 누리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으로 부터 받은 많은 고통과 질병, 여러 가지 위험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 는 자연과의 완전한 화목,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의 관계들을 누리며 살다가 한 순간의 죄 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더불어 살아가던 자연으로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며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느껴야 했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가히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이었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3장을 대할 때 인류의 죄가 얼마나 크고 비참한 고통을 보며 아담
과 하와가 범한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엄청난 것이었는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방금 창조하신 그 완전하고 선한 세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려 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지 선악과를 따먹어서 어느 특별한 나무의 열매 하나를 없애 버리고 하나 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정도의 그것이 아니라 그 불순종하는 사건 하나로 인해 죄가 커다란 댐을 무너뜨리면서 확 밀려들어와 온 도시를 뒤덮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한 온 세상을 쓸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지금까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
지만 그 끔찍한 죄의 문제가 풀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참혹한 고난을 보면 인간의 첫 조상의 타락과 불순종의 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었던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가죽을 만들어 입혀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 님의 창조세계가 지금 쑥밭이 되어버렸는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 길을 가다가 나무에라도 찔리고 돌부리에라도 몸을 상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하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 아름답고 완전했던 세상을 망쳐버린 죄인들을 단칼에 날려버려도
시원치 않은데, 그들이 길 가다가 혹시라도 넘어져서 가시에 찔리고 상할까봐, 그리고 추위 에 떨거나 뜨거운 태양 빛에 피부가 상할까봐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다니 말입니다. 주님 이 손수 입혀주셨다고 하셨으니 정말 그들에게 입을 수 있도록 걸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은 자기의 창조세계를 짓밟아 놓은 그 인간들을 향해서 불같이 타오
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인간
들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의 성품과 그들을 향한 배려를, 이렇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 나님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 동산과는 작별하고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임재의 세계에서 누리던 삶을 종식시켰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 버지의 크고 놀라운 사랑은 앞으로 받을 고난의 인생길까지 준비하사 새로이 시작하게 하시 니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사죄의 은총
4장으로 넘어가면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어디서 제사를 배 웠을까요? 칼빈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담은 비록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유린했지만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그를 향해 계속 됐다 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죄의 지배 속에서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 린 아담에게 죄가 들어온 이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 바로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우리들이 천국에 가면 아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
하면 그는 범죄한 원형이기는 하였지만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의 계시를 주시고 뼈저린 자신의 실패 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아벨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배워왔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내용을 읽으면서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담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 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고 그의 피로 화해를 이룬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당시 아담에게 미쳤던 은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은총과 사죄의 약속 가운데 있습니 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완전히 유린하고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입지 못
한 상태에서 추방당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이런 긍휼을 입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입은 우리들은 어떠할까요?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 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의 이런 은총은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새로 시작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에는 지나온 나의 실패가 너무나 오래되었거나 혹은 이미 경험한 나의 잘못이 너무나 큰 것이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앞으로도 그런 실패가 계속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문제는, 실패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어둠 속에 있도록 만들어 준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과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부족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지난날 잘못한 것 때문에 마땅히 자기가 잘못한 실패의 멍에를 지
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과 함께 고통스러운 상황을 종식하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기를 결심했을 때에도 여전히 남루한 옷을 걸치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것처럼, 새 롭게 시작하는 그 시점에서도 이전에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인생의 짐으로 짊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리라 하고 이전에 주님의 마음
을 아프게 해 드린 실패를 거울삼아 이제 앞으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쓰면 하나님이 그 멍에들을 벗겨 주십니다.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그러므로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제껏 자신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들 었던 과거의 실패나 과거의 문제, 그리고 과거에 자신을 얽어 맺던 숙명적인 패배를 주목해 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자신을 얻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믿음,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더라도 두렵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 가는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이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이러한 긍휼의 은총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어두운 인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하여
주님만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때 과거의 실패는 그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광선을 찬란하게 빛나게 만드는 보석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우신 사랑,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매 순간 순간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이전의 실패한 삶보다 더 뛰어난 아름다운 삶을
주님 앞에서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남준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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