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호13:12-14 고전15:54-55)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구약 아가서 8장 6절의 말씀입니다. "죽음"은 강한 것입니다. 아니, "죽음"은 가장 강한 것입니다. "죽음"은, 또한, 강하면서도 동시에 잔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의 세력 앞에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이 장소 저 장소 가리는 일 없이 모든 것이 무차별 무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가리켜서 인간의 절대적 운명, 또는 인간의 절대적 숙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기독교만의 고유한 생각은 아닙니다. 고대 가나안의 종교는 이 "죽음"을 그들이 믿고 있는 신(神)인 바알 神보다 더 강한 것으로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고대 가나안 종교가 남겨준 글을 보면,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신앙하는 神인 그 全能하신 神, "바알" 神과 죽음의 神 "모트"(Mot) 神 사이의 힘 겨루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알"과 "모트"는 마치 코끼리나 하마처럼 등을 대고 서로 힘껏 밀친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들소들처럼 서로 뿔로 떠받는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독사들 처럼 서로 독침으로 찌르며 문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준마들처럼 서로 발로 걷어찬다
그러나!. "모트"도 넘어지고 "바알"도 쓰러진다!!
이 글은 가나안 종교의 경전인 우가릿(Ugarit) 원경 제 6장 49항에 나오는 글입니다. 말하자면, 전능하신 神 "바알" 神도 죽음의 神 "모트"를 이겨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알" 神의 배우자인 女神 아낫(Anat)이 "바알"을 대신하여 복수전을 펼치는 이야기가 그들의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바알"과 "모트"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실제로는, 죽음의 神 "모트"(Mot)가 오히려, 전능의 神 "바알"(Baal)을 이겼던 것으로 추측되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불교는 윤회설(Samsara/Sansara:metempsychosis:transmigration)과 환생설(Re-incarnation)을 믿는다고들 하고 또 희랍사람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不滅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라고들 말합니다만,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줄곧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육신이든 영혼이든 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증언해 왔습니다. 한 시편시인은 이렇게 인생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아, 우리 인생의 모든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은 一息間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年數가 八十[본문은 七十]이요 또 건강하면 九十[본문은 八十]이라 할 지라도, 그 年數의 자랑은 단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나니, 우리는 날아가나이다.} (시편 90:3,9-10)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으로서는, "죽음"을 이겨내고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이미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우리의 인식은 매우 확실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한 목동과 그리고 예루살렘의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솔로몬" 왕의 집요한 求愛를 받고 있던 한 淸雅한 처녀 "술람미"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 이른 바 왕실의 권위가 손짓한 유혹도 뿌리치고 일구어내었던 저 깊고도 진실한 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던 구약성서의 雅歌書 기록자는 그의 이야기의 결론부를 쓸 때, 돌연, 이러한 말로 그의 사랑이야기[雅歌]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도 말며 깨우지도 말지니라. 오, 그 사랑하는 자의 팔에 依支하고[행복의 미소 지으며] 초원을 가로질러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너 때문에 네 어머니가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겪었던[辛苦한] 그곳,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었노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나를 印章같이 마음에 품고 圖章같이 가슴에 묻어두어라. 아, "사랑"은 "죽음"같이 强하고 "투기"는 "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氣勢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雅歌 8:4-6).
말하자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의 세력"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라이벌(rival) 세력으로서, 감히(!), "사랑"이라는 것이 드디어 우리의 세계 속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은 무슨 뜻을 가진 말이겠습니까?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고 하였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한 때, 시내 영화관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큰 인기를 모았던 적도 있습니다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 죽음만큼 강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ghost"라는 영화, 즉 한국에서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인기를 모았던 그 영화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리만큼 파격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줄"이 죽음 후의 영혼의 세계에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때, 그 때,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던 바 "사랑"만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마력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랑의 힘"을 감히 죽음이 지닌 위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는 것일까요? 요사이 한창 MBC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랑한다면"이라는 TV 드라마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랑"은 두 종교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저 절벽같은 반목의 벽도 능히 허물고 끝까지 자기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랑의 힘"을 감히 "죽음의 맞수"로까지 격상시켜서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남녀간의 사랑이, 비록 고매한 휴머니즘의 멋을 지니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사랑"의 그 "에로시티즘"적 성격이 갖고 있는 것, 이른 바, 불같이 일어났다가도 또 곧 식어지는 그런 그 유한하고 한시적인 성격 때문에 그런 사랑이 감히 "죽음"의 세력만큼 그렇게 항구적인(!!)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룰 수 없는 남녀간의 그 에로틱한 사랑 때문에 감히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하는 그러한 유형의 애정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할 찌라도 감히 그것을 두고 우리가 그 "사랑" 조차도 찬양하고 장려하며 기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짧은 소견과 그 경솔함을 꾸짖으며 안타까워 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애정을 가리켜서 감히 "죽음의 맞수" 또는 "죽음의 라이벌"로까지 격상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죽음의 "맞수"가 될 수 있다는 주장, 아니, "사랑"이 오히려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요?
그러나, 여기 감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증언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인간-자연-세계", 이들 사이의 근본적이고도 우주적인 "상관관계"를 그 끝간데까지 탐구하며 추구하여 갔었던 한 예언자, 그를 이름하여 우리가 "호세아"라고 이름하는 한 이스라엘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가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져 있는 그 "사랑의 관계"가 가진 참 의미를 깊이있게 생각하며 끝까지 추구한 다음, 돌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죽음"의 세력을 향하여 정공법으로 도전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한 메시지가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
내가 사랑하여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아, 네가 행한 불의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나는 오히려 그것을 나의 비밀동굴 속의 항아리 안에 꼭꼭 봉함해 넣어 두었다. 네가 지은 그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하여도 나는 오히려 나의 비밀창고 속 깊은 곳에 그것을 깊이 저장하여 자물쇠로 잠궈 두었노라.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그 진통의 시간을 지연시키지 못하고 끝내 맞이하고야 말듯이 너도 네 어머니의 자궁문 앞에서 더이상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지체할 수는 없게 할 것이다. 네가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 지라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때문에 나는 너를 끝내는 지옥의 권세에서부터 이끌어내며 사망의 권세로부터 너를 구원하여 내리라. [이것이 너를 창조하고 지어낸 어버이 하나님의 모성적 애정이니라] * "본문에 없으나 문맥상으로는 이렇게 되어야 함" 너, 사망아, 네가 갖고 있다는 그 "재앙의 쏘는 것"이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나와서 내게 덤벼라!!] 너, 지옥아, 네가 갖고 있다는 그 멸망의 "이기는 것"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나와서 내게 덤벼라!!] 너, 죽음아, 너 사망아, 이제부터는 결코 더 이상 너를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호 13:12-13)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메시지입니다. 감히,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 그 "쏘는 것"의 날카로운 예봉을 능히 꺾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의 그 절대적 위력을 상대화시키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크게 소리내어 웃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력을 격파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가 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를 의심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 낯설고 이상한 메시지의 "실"(實)과 "허"(虛)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 "죽음을 이겨내는 길이 있다"는 이 말씀은 - 그저 종교의 세계에서나 하는 소리요, 신앙의 세계에서나 하는 상투적인 소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겨버릴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찾아오는 부활절이 되면, 기독교 교회들은, 이 난해한 부활절 메시지를 설명하는 데 지극한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부활의 초자연적 신비성과 기적성을 강조하면서, 단지 맹목적인 신앙만을 교인들에게 강요해 왔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무조건 그저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어도 믿는 그것이 "참 신앙"이라고 장황스럽게 설득해 왔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학문적 양심을 자랑하는 신학자들의 경우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부활의 진리를 해명하라는 요구 앞에 서면, 모두들, 매우 난처한 표현을 지으면서 또 그 특유의 제스쳐를 취하면서 얼굴을 돌리고 외면해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호세아는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자 호세아의 메시지가 지닌 그 "실"(實)과 "허"(虛)를 능히 가려내어 확인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⑴ 死亡의 권세를 쳐 이기는 "승리"에 관한 이 기이한 宣布를 과연 "누가" 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것,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⑵ 그러한 선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⑶ 그리고, 그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 절대적인 죽음의 권세를 쳐 부수어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 호세아의 답변은 이 물음에 대해서 조금도 모호한 것이 없는 매우 확실한 언어로서 대답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언자 호세아에 의하면, "죽음"의 정복에 관한 가장 확실한 약속은, 전적으로, 인간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해산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진통의 산고를 참고 자궁문을 열어 <자식>이라는 생명을 생산해 내려고 死力을 다하는 "産母와도 같은" 하나님 그분, 즉, 우리의 어버이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분(Oh, He! cf. S. Mowinckel, ya-hu!), 그분으로부터 선포되었다고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에 넘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낳으신 <어머니>같은 창조주 하나님"(cf. "We are God's offspring", Acts, 17:28,29), 바로 그 분이 약속하시고 바로 그 분이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성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God as the maternal God), 그 분이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세계, 출산의 영역, 생산의 자리, Creation, Procreation, Production의 자리!! 그곳은, 진실로, "죽음"의 세력이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절대적 세력이 상대화될 수 있는 한 확실한 가능성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우리의 理性의 눈으로서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의 세력은 본질상 창조의 세력 앞에서는 반드시!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성장하는 그 곳에서는 본질상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의 과정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력 아래에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확실하게 주시리라는 그런 확신을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여" 가질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물음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이요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언자 호세아의 증언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실로 그분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그 분은 우리로부터 죽음의 세력을 기필코야 제거해 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본질상,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자들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치, 자기 배 속에 있는 자식을 사랑하는 산모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가 죽는 것을 결단코 그냥 내어버려 두실 수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창조자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이, 그 분의 그 기본 본성이 "사랑"이며 그리고 그 사랑은 또한 그 무엇보다도 "모성적 사랑"으로 성격지어져 있는 이상, 그 분은 결코 그가 창조하시고 그가 생산하시고 그가 낳으신 것들인 우리네 자식된 자들을 결코 죽음에게 내어 주실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대답은 이젠 논의의 여지없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어버이" 하나님은 성서가 도처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그 분의 그 모성적 본질로 미루어 볼, 즉 "하나님 아버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어머니"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자녀된 우리들을 살리시려는 어버이의 그 지극한 사랑이,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형틀 위에 희생의 속죄제물로 내어놓으시기 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그 분의 그 <사랑>의 "깊이"를 통해서 볼 때, 실로, 그 분이야말로 우리를 사망의 밑바닥까지라도 끝까지 찾아가셔서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실 분이시라는데 대해서 우리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서의 사상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접근해 간 우리세대의 대표적인 성서학자인, 미국 하바드대학의 휘오렌자(E. S. Fiorenza) 교수는 가슴에 사무치듯 절규하기를, "오, 하나님! 주님은 결코 <아버지>라고 불리워서는 안됩니다. <어머니>라고 불리워져야 합니다."(Oh God, you are not to be called "Father", but "Mother!")라고 부르짖어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여기서 예언자 호세아가, 그의 예언서 13장 13절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그 민족부활의 대 창조적 사건을 가리켜,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의 사건"이라고 감히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는 그 이유를 이제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해산하는 산모가 그의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그 <모성본능적 사랑>, 그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우리는 감히 "죽음을 정면돌파하여 격파하는 생명창조의 힘"을 기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모성적 사랑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아니, 母性的 "사랑"은 아예 죽음을 부활로 바꿀 수 있는 유일무이의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의 히브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놀라웁게도, 그들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또는 "야훼"라는 이름을 감히 인류의 첫 어머니인 "하와"라는 이름을 그 語根으로 하여 구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이 모성적 창조본질을 가진 "그가 창조하다"(He creates : He causes to b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신앙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사도바울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푸는 유일한 해법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부터만(!) 찾았던 것입니다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 나는 알았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주시는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어버이이신, 우리의 어머니이신 그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로다"(고전 15:55-56)라고 사도바울은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저 유명한 신앙고백도 또한 그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과연, 우리가 고난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서 더 이상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만일, 전능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다름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만일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리요?(If God is for us, who is against us?) 누가 능히, 그 무엇이 능히 '하나님꼐서 사랑하시는 자'를 죽일 수 있으리요!"(롬 8:31,33)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죽음"을 이기고 또 "부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부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서적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부활"을 안겨주실 수 있으며 새 생명을 창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 죽음보다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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