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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율법과 나

by 【고동엽】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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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51쪽에 있는 글입니다.

 

 

21. 율법과 나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로마서 7장 1~12절

 

 

 

 

 우리는 6장에서 우리 옛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 중에서 자기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는 분이 얼마나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7장에서는 말을 바꾸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따지고 보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까닭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 떠있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운 말씀이라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자는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그의 영안을 밝혀 주시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또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잠깐 눈을 돌려 6장 14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이 중에서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7장 초반부의 내용은 이 짧은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재미있는 예증을 하나 들었습니다. 그는 부부관계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흔히 결혼을 인륜대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혼인 예식 때 남녀는 서약을 합니다. 부부의 신의를 다하고 평생 정조를 지키며 백년해로 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이 서약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결혼과 함께 서로 구속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매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남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아내라고 남편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매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일단 가정을 꾸민 부부는 평생 동고동락하는 멍에를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한평생을 결정짓는 최고의 중대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부부라 할지라도 가끔은 서로 의견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비록 결혼생활이 불행하다 할지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이혼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감수할지언정 가정을 깨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죽는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유하게 됩니다.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부인이 재혼을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자유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자유합니다.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보면 상처한 남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하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습니다. 부인이 죽은 지 1년이 지나도록 혼자 살고 있으면 대단히 양호한 편입니다. 개중에는 2개월도 채 못 넘기고 재혼하는 낯 두꺼운(?) 사람도 있으니까요. 뭐가 그리 급한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배우자가 죽으면 재혼할 수 있는 자유가 성경의 법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은 부부 간의 서약을 무효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서약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단히 언짢아합니다. 특히 아내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집사람이 죽자마자 곧장 재혼하는 남자 이야기가 나오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세상에 그런 짐승 같은 인간이 어디 있어? 정말 죽은 사람만 불쌍해" 하며 마치 자기 일처럼 화가 나서 못 견뎌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혼부부가 신접살림을 시작할 때는 대부분 가난하게 마련입니다. 빠듯한 월급으로 하루하루를 삽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꿈을 키워 나갑니다. 대개가 처음에는 사글세로 시작합니다.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를 살다가 작은 집을 사고, 좁은 집에서 넓은 집으로 옮겨 가고... 이런 식으로 살림을 키워가지 않습니까? 부부가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생을 안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이 되면 그런대로 생활이 안정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제 좀 살 만하다고 느끼는 때가 되면 의외로 인생의 복병이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40~50대에 질병이나 기타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왕왕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40~50대 부인들이 모여 앉으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곧잘 합니다. "이제 겨우 살 만한데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저 아이들은 누가 돌보지? 남편은 재혼하겠지. 그러면 나만 손해야. 지금까지 나는 지지리 고생만 했는데...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어느 부인은 '악착같이 안 죽기'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물론 뜻대로 안 되는 일이지만 그들의 말에 동정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잉꼬처럼 금슬이 좋은 부부라도 죽음 앞에서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깨소금이 됫박으로 쏟아지는 사이라도 죽음은 그들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은 자유하게 됩니다. 사망이 두 사람의 모든 관계를 말소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의 사실입니다.
 바울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사실을 들어서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우리를 놓고 볼 때 율법은 남편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부인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우리는 마치 결혼한 사이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무서운 상대입니다. 그는 항상 우리를 향해 '해라', '하지 마라' 하고 명령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우리를 사정없이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고 고심을 합니다. 해결점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한쪽이 죽어야 합니다. 율법이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불행하면서도 갈라질 수 없는 부부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12절).
 
 율법이나 계명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절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온 예와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약한 부인이 살고 남편이 죽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거꾸로 약한 내가 죽고 율법이 사는 것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나 하고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부의 예를 든 것은 어느 쪽이 죽었는가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둘 사이의 모든 관계를 끊어 놓는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죽으면 둘 다 서로의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율법과 우리의 관계에서 죽음과 자유라는 두 개념이 주는 교훈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려 죽으실 때 죽었습니다. 이미 제가 여러 번 설명한 적이 있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켜야 할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율법의 영향권 안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가 당할 저주와 형벌을 십자가에서 혼자 담당하심으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도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4절).
 
 "이는"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은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접속사입니다. 가끔 일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이야. 이제 계명을 안 지켜도 상관 없어.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나는 구원받아. 계명을 좀 범하면 어때? 이미 다 용서받았는데..." 이런 식으로 율법 무용론, 율법 폐기론을 들고 나오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4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이 말씀이 가리키는 "다른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벗어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결혼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6장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과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갔다', '결혼했다'.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서 예수님과 결혼하게 만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대로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나요?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성결한 삶을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결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방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함부로 범하면 자기의 성결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 때는 자원하여 성결한 생활을 하지도 못했고, 자원하여 헌신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5절).
 
 우리가 율법에 매여서 종살이할 때는 죽을 짓만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살 때는 율법이 충동질해서 생긴 죄의 욕망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사망의 열매만 맺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여 죄를 범하게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한다'는 말은 율법이 우리 마음에 충동질을 하여 죄를 범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죄가 율법을 이용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한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못된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을 그어 놓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더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높은 선반에 얹어 놓은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일러두면 어떻게 해서라도 들여다보고 싶어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율법을 가지고 부추깁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지? 그러나 조상 숭배는 괜찮은 거야. 한번 해 봐." 이런 식으로 충동질을 합니다. 여기에 걸려 넘어지면 죄에 질질 끌려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결혼해서 의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예수님과 함께 당한 죽음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매여서 종살이할 때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겼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유대 사람들은 율법에 기록된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율법에 매여 종살이를 했습니다. '의문'이라는 것은 기록된 계명을 가리킵니다. 돌이나 종이에 기록된 율법을 '의문의 묵은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지켜 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600개가 넘는 규칙을 지키느라고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 금식하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 등을 철칙으로 알았습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귀신에 매여 사느라 고생했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매여 사느라고 고생했습니다. 미신을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많이 했습니까? 이사를 아무 날짜에 갈 수 있었나요? 결혼 날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나요? 방 안에 못 하나를 마음놓고 칠 수 있었나요? 무엇을 하든 잡귀신 앞에 벌벌 떨며 살았습니다. 우리 조상이 우상에 매여 살았듯이 유대 사람들은 율법에 매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 율법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즉 성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새겨 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옛날의 낡은 법은 돌이나 종이에 새겨져 있지만 예수 믿고 중생한 사람에게는 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계명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훨씬 지키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내가 이 일을 해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라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계명을 새기고 사는 우리는 돌에 새겨진 율법을 가지고 사는 유대인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경건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깊이 와닿지 않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쁨을 아직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호랑이한테 한번 혼이 난 사람은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 맹수인지 잘 압니다. 반면에 호랑이를 그림으로만 보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율법에서 자유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누가 율법을 잘 알 수 있습니까? 유대인처럼 그것을 지키느라고 씨름을 한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조금이라도 애를 써 본 사람은 거기서 자유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잘 압니다. 율법을 아는 것만큼 은혜는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 성경을 통해서 율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오경이 율법이요, 그 핵심적인 내용이 십계명에 들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자칫 율법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 복음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보면 율법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안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에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유대인들은 율법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신랄하게 꾸중하신 말씀을 보면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윤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눅 11:42).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정직하고 공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안중에 두지 않고 사람 눈에 보이는 몇 가지 규칙만 지키는 것으로 교만했던 것입니다.
 율법에는 독특한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알게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
 
 율법은 우리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죄를 알게 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은 10계명 중 열 번째 계명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탐내지 말라는 것을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거나 남의 것을 욕심 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집착하여 남의 것을 빼앗아 오지 않으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가르쳐 주는 근본 정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의 탐심을 누가 깨울 수 있습니까? 율법이 깨웁니다. 우리는 탐심이 죄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탐심이 죄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탐심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마음 속에 있는 욕구를 충동질합니다.
 
 "그러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8절).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틈타서 내 속에 온갖 탐심을 일으켜 놓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11절에도 나오는데 죄가 율법, 즉 계명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 속에 각종 탐욕을 느끼도록 충동질을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성적 범죄의 충동을 못 느낄지 모릅니다. 자녀에게 "야, 너는 고3인데 공부는 안 하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만 하니? 너 그러고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고 다그치면 그 아이의 마음 속에는 은근히 반발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엄마가 거듭 꾸중할수록 아이는 엄마 몰래 여자친구와 더 가깝게 지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벌써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율법은 욕구를 충동질하여 범죄에 이르게 합니다.
 셋째, 우리를 속이는 도구가 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11절).
 
 죄가 율법의 도구로 삼아서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죄는 율법을 가지고 하와를 찾아가서 속였습니다. 선악과를 따서 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고 속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속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가장 치명적으로 속은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율법을 가지고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줄로 착각했으니까 속았지요. 죄가 속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냅니다. 율법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본능을 충동질해서 죄에 대한 탐욕을 갖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속여서 스스로 의로운 체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알게 하는 율법
 
 바울도 율법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9절).
 
 이때는 바울이 예수 믿기 이전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전문적인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스스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울이 율법을 피상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잘 깨닫지 못하면 내가 살아납니다. 그 대신 죄가 죽어 버립니다. 율법을 잘 깨닫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율법을 앞에 놓고 내가 살아나는가 아니면 죄가 살아나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수준이야. 죄의식을 느낄 일도 별로 없잖아. 이 정도로 살면 됐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것 정말 너무 죄가 많구나. 큰일났구나" 하는 가책을 받으면 죄가 살아나고 자기는 죽어 버린 사람입니다. 누가 율법을 바로 알고 있습니까? 후자의 사람입니다. 죄가 너무 많은 것을 알자 의롭다고 하던 자기는 죽어 버리고 죄만 살아 넘치는 기막힌 꼴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눅 18:20)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그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이면 충분한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눅 18:22). 그 말을 들은 부자는 너무 놀라서 절망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부자는 율법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무서운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것이 죄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죄인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죄는 살아나고 그 사람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부자가 범했던 잘못을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율법에 대해서 눈이 다시 열려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안에 있는 무서운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 하나님 앞에 범한 죄, 예수 믿고 나서 범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흉측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때 나는 죽어 버리고 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우리나라 역사상 8·15 해방 후에 일부 교회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한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어떤 사람들은 깊은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해서 기절을 하며 땅바닥에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즘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이 율법을 깨닫는 은혜가 희박해졌습니다.
 옛날에 우리 선배들은 율법에 대해서 깨닫는 은혜가 많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예배당에 가서 보면 기도하면서 우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일이 그렇게 많은지 기도할 때마다 웁니다. 부정적인 면으로 보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예배당은 울기 위해 모이는 곳', '우는 것이 은혜', '통곡이 없으면 은혜 못 받은 자'로 통할 만큼 지나친 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참된 죄의식과 회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유산입니다. 그들이 복음과 함께 깊고도 진지한 영혼의 고통을 내세운 점은 진실로 옳았습니다.
 존 번연은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자기가 거의 18개월 동안 얼마나 무서운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혔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기러기가 부러워 보일 정도였다고 토로했습니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을 뻔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입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 버리는 이 가공할 만한 죄책감,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성령받은 사람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율법을 바로 깨달은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보십시오, 정반대의 병리 현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죄인은 많은데 죄의식은 희박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가슴 속의 묵은 땅을 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가시덤불을 뽑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감각을 상실하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 버리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좋아 춤을 추며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문간에 서 있는 손님이 험상궂으면 험상궂을수록 어린 딸아이는 엄마 치맛자락을 바짝 끌어안습니다. 율법 안에서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바짝 끌어당깁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은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피난처인 것을 율법이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율법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율법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볼 때마다 율법을 통해서 나를 살피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이 더 필요합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가 더 고마운 줄 압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감격을 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 자신은 죽어 버리고 죄가 살아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율법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 성결하게 살며, 자신을 더 기쁘게 헌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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