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삶을 예언하라 (창세기 49:22)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말로 자기 인격을 표현하고, 말로 서로 대화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마음의 뜻이 속에 담아있으면 사상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될 때 언어가 됩니다.
언어는 인격의 표현이며 그 말로 결국은 일생동안 자기 자신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일생동안 무슨 말을 많이 들었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무슨 말을 많이 들었느냐에 따라서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대개 성공적인 사람, 그 사람됨이 여유가 있고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언어에 있어서 표현이 다른 것을 봅니다.
말은 세 가지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각인력입니다. 이것은 뇌세포에 각인시키는 힘이 있어서 무슨 말을 듣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내 머릿속에 있는 뇌세포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의 힘입니다. 두 번째는 견인력입니다. 이것은 뇌세포에 새겨진 말이 뇌척추의 신경을 자극해서 행동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그 말이 속에서 씨가 되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나로 하여금 내 운명을 결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취력입니다. 말은 하는대로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0-21)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는 말은 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먹게 되고 나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나쁜 열매를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도 선해지고 남도 선하게 하지만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도 악해지고 남도 악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을 바꿀 때 말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말을 바꾸어야만 운명이 바꾸어집니다.
사람들은 일생동안 말을 듣고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이고 결국은 그 말이 힘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삶을 닮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해서 천국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저는 금년에 "풍성한 열매 성장하는 교회"라는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우리 교인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새해 첫주에 풍성한 삶을 예언하는 말씀을 선포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예언해야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천지를 창조할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말은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예언을 했더니 그대로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먼저 있고 현실이 다음에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장담부터 하는 사람를 성급한 사람, 또는 허풍을 떠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 세상을 볼 때 말이 풍성한 사람이 결국은 잘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전에 교회 성장학을 연구한 한 한국의 저명한 목사님이 "한국교회는 교인 숫자를 과장되게 많이 부풀리기 때문에 교인이 만명 나온다고 하면 실제는 3천명 출석하는 줄 알면 된다"고 그래요.
여기에 대해서 두 종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숫자를 불리는 위선적인 목사들의 근성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현재는 3천명이 나오지만 만명을 꿈꾸면서 만명을 미리 보고 선포했다고 긍정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가 이렇게 부흥된 데는 3천명이 출석하지만 만명이라고 외쳐댄 사람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사실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예언은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으로 특별히 신적인 영감을 받은 예견, 훈계, 권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라고 했는데 구약에는 장차 올 것에 대한 예고나 예측,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예언적인 선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고의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쓴 저자 존스라는 분은 "예언은 결과에 영향을 주는 모든 말이나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 있는 설교는 전부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따라서 성도들이 영향을 입으니까요. 하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자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한대로 사람들이 영향을 입었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부모님이 예언자입니다. 전 교인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말하는 것이 그대로 되니까 예언자입니다. 선생님이 또 예언자입니다. 학생들에게 말한대로 제자가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사 선생님도 예언자입니다. 병든 환자에게 "안심하십시오. 이 병은 낫습니다."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그런데 "나을지 안나을지 약 먹어보면 알 겁니다." 그러면 병이 안낫습니다. 말이 결국은 모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 이것은 그 아버지 야곱이 열두 아들 하나 하나를 향해서 예언하는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사랑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해 준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기분 내키는대로 한 예언이 아니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한 예언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성서에서 아브라함은 뿌리입니다. 이삭은 싹입니다. 야곱은 줄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열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 열두 가지 중에 열 한번째 가지가 요셉인데 야곱이 요셉에게 한 예언은 임종을 앞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무성한 가지를 눈으로 보고 하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현재 요셉에 대한 예언만이 아니라 미래에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질 사건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장차 역사에 무성하게 이루어 놓을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 중에서도 특별히 무성해야 합니다. 형제 중에서 잘 사는 형제가 되십시오. 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잘 되는 교인 되십시오. 서로 잘 되려고 하십시오. 같이 입사한 동기생 가운데서도 가장 잘 되십시오. '무성한 가지' 이것은 모든 분야에서 자기에게 다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땅이 가물어도 메마르지 않는 나무가 바로 샘곁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보다 믿음이 성숙하고 자기 자신이 계속 발전해가는 상태를 샘곁에 심겨진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담을 넘었다' 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울 밖으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국경을 넘어갔다는 말인데 세계화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 우리 자신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요셉'은 부요와 성공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열 두 아들을 보는 중에서 요셉이 가장 착했어요. 또 사람됨이 되었어요.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 아버지가 인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준 축복이 나의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원래 성장 과정이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많은 상처들이 제 속에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단 한가지 몇 대가 계속 가난했기 때문에 주먹을 불끈쥐고 '나도 잘 살아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하는 의욕은 싹텄지만 인격적인 의미에서 많은 상처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부정적인 말을 혼자 중얼거립니다. '못난 놈, 나는 왜 이럴까' 혼자 이런 소리를 자주 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의욕으로는 일을 했지만 나 스스로는 항상 부정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신교회를 개척할 때도 개척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안된다'는 말 때문에 해봤자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해봤자 안될게 뻔하니k 아예 할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식구는 된다고 개척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관악교회에서 나온 뒤에 청빙된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는 제가 간다고 사택도 새로 다 수리하고 교인들이 저는 맞이하기 위해서 40일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대우도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저의 과거를 볼 때 제가 그 교회에만 가면 큰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장로님이 한달동안을 시골에서 서울로 왕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절대로 안간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여기에서 개척을 해야지 가면 안된다. 가면 안되는 이유는 한가지다. 당신이 지금까지 목회를 잘 했는데 서울에서 못하면 당신은 언제나 촌에서는 잘 하고 서울에서는 못하는 사람이라는 레떼가 붙는다. 그러면 당신도 부끄럽고 나도 당신의 아내 노릇 하기가 창피하니까 죽더라도 여기에서 죽자" 우리 식구의 뜻은 단호했습니다. 우리 식구가 안간다니까 저도 어쩔 수 없이 안간다고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것은 개척할 마음이 있어서 기도하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없으니까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산에 가서 있으면서 '개척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종을 창세 전부터 사랑했던지 창세기 49장 22절 말씀을 저에게 계시로 주셨습니다. 청계산 바위 위에 앉아서 기도하던 어느날 오후 3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이 종에게 하늘로부터 섬광처럼 빛이 비춰오면서 창세기 49장 22절 말씀이 선명하게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른 눈을 떠서 성경을 펴보니까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말씀이 예언적 말씀이 되어서 나에게 힘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산장에 산돌이가 되어 있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예언적 말씀이 나에게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신교회를 개척하고 "1차는 강남, 2차는 한국, 3차는 세계"라는 선교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 종에게 주신 그 예언적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에게 예언한 것 뿐만 아니라 이 종과 함께 한신 공동체 모두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요셉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모두 다 요셉처럼 될 것입니다.
회사에서 요셉처럼 무성해지십시오. 요셉처럼 하나님의 효자가 되십시오. 부모에게 효자가 되십시오. 국가에 충신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이 되십시오.
'담을 넘었다' 울 안에 있는 식구들만 살린 것이 아니라 애굽 전역 사람들을 살려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살려놓을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것을 요셉에게 계시한 것입니다. 이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성공적인 예언을 하는 아버지가 되십시다. 야곱이 요셉을 향해서 예언하듯 자녀들에게 좋은 예언을 하십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축복의 예언을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예언적 책임을 진 하늘이 보낸 대리자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위대한 사건은 이름을 바꾸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향해서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야곱을 향해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을 향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은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어서 계속 이름을 불러주면 그 이름대로 아이 속에 예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비운의 여인으로 살다 간 영국의 황태자비였던 다이애나 장례식에서 오라비 칸트 백작은 슬픈 한 사연을 얘기했습니다. 다이애나라는 이름은 '사냥의 수호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사냥하는 수호신, 그는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추적당하는 여성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추적하는 취재진을 피해 달리다가 비명에 간 내 동생은 이름대로 슬프게 그의 종말을 고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했습니다. 다이애나는 그 이름대로 추적당하는 일생이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미래를 축복하는 예언적인 말씀을 해야 합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예언을 해야 되고 좋은 말로 예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지난 날 자녀들에게 악담, 욕설, 살기찬 저주의 말이 일상적인 용어였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말로 자녀들에게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모두 죽을 일만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6·25사변 이후에 교회가 흥하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바꾸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빌어먹을 놈, 썩을 놈, 육시할 놈, 이런 말에 평생토록 상처를 입고 불행해진 우리 한국 민족에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빌어먹을 놈, 그렇지 오! 하나님께 빌어먹을 놈들이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뭡니까? 하나님께 빌어서 먹는 사람들 아닙니까 '썩을 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이 민족을 위해서 썩어 거름이 되리라' 위대한 정신을 다시 예수에게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육시할 놈' 성삼문처럼 육시할 충신도 있지만 순교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부모로부터 받았던 저주스러운 언어의 상처들이 다 축복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동안 우리가 언어로 받은 상처들이 다 축복으로 화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아버님께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술 취하신 우리 아버님은 아무 길거리에나 누우시면 안식에 들어가십니다. 그러면 제가 우리 아버님을 모시러 가서 등에 업고 "아버지 가십시다." 그러면 "괜찮다. 너 혼자 가거라" 그럽니다. "아닙니다. 날씨가 추워지옵니다." "괜찮아" 그래도 제가 우리 아버님을 부축해서 등에 업으면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제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 술 취하시면 오래 못사십니다." "괜찮다. 내 걱정 말고 너나 잘 되어라. 내가 술 마시고 방탕해도 너는 잘 될 것이다." 미안하니까 그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제 뇌에 각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술 취하고 이렇게 살지만 너는 잘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 말씀을 속에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면서 나 잘 되라고 교훈을 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정된 불효자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쓴 존스라는 분이 "억만금의 재산보다 한줄의 예언을 물려주라"라는 책을 또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유언을 하되 축복이 되는 유언을 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받아온 성장대로 어린 자녀를 길렀기 때문에 그런 축복된 예언을 못했습니다. 그저 우리 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한 대로 또 아이에게 한 대로 했습니다. 어떤 때는 상처를 입히고, 제가 목사이면서도 아들에게 축복의 예언을 못했습니다. 이제사 그것을 깨닫고 나이가 30이 넘은 아들지만 축복을 선언해 줍니다. "잘 될거야 훌륭해" 전에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의 변화를 보면서 놀랍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나' 인생을 회상해 보면 놀라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마이클이라는 사람이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그는 어린시절부터 긍정적인 말을 한마디도 못듣고 자랐습니다. 아버지한테 늘 욕 먹고, 매 맞고, 얻어터지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세탁소 아저씨였습니다. 그는 오는 손님들에게 공짜로 사탕을 주는 세탁소에 그것을 먹기 위해서 늘 갔습니다. 그때마다 주인은 마이클에게 "마이클, 너는 앞으로 큰 회사 사장이 될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클은 이웃집 아저씨가 해주는 "너는 앞으로 큰 회사의 사장이 될거야"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나중에 그는 세탁소 아저씨 말대로 큰 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격려의 말을 하면서 잠시 과거를 회상하 듯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변두리 세탁소 주인이 나에게 예언해준 대로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얘기입니다. 어느날 여름철에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데 스님이 우리집에 와서는 문밖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러면서 뭘 좀 달라고 그래요. 우리 어머님이 "보리나 한바가지 퍼다 드려라" 그래서 제가 한바가지를 왕창 퍼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큰 스님이 될 상이로다" 그래요. 큰 스님이 될 상이라고 하니까 우리 어머니도 걱정이고 나도 걱정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나하고 평생 산다고 했는데 내가 머리 깍고 절로 가면 같이 살 수가 없으니까 얼마나 걱정입니까 그래 서 내가 속으로 그 말을 바꾸었습니다. 스님을 스승님으로 잘못 말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 민족의 큰 스승님이 되리라'
제가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예수를 믿은 후에 그 말에 대한 예언이 내게 적중해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 스님이나 목사나 같은 종교인이니까 '내가 기독교의 큰 목자가 되리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저희집에 왔던 스님이 있는 있는 절을 찾아갔습니다. 갔더니 도의 유적지라고 시주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몇 만원을 시주했습니다. 제가 시주를 했더니 누구냐고 물어요. 그래서 목사라고 했더니 이 스님이 질겁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목사님이 사찰에 와서 시주를 한 예는 천지개벽 이후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린시절 여기 와서 받았던 인상들을 생각하면서 시주를 했더니 스님이 또 나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큰 목자 되소서" 하고 예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남들에게도 예언의 복을 빌어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나에게 주는 예언적인 말씀을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화시키면서 자기 삶을 풍성하게 바꾸어가는 승리적 삶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출처/이중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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