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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173쪽에 있는 글입니다.
27.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28~30절
이번 본문은 불과 세 구절에 지나지 않는 짧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청사진을 한눈에 바라보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 계획을 어떻게 세우셨으며 어떠한 단계를 밟아 그것을 완성하고 계시는가를 감히 우리 죄인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용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이 말씀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도 금물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종일관 겸손한 마음으로 이 말씀 앞에 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를 깨닫는 은혜를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궁극적인 목적
말씀을 보는 눈이 좀 열린 분이라면 본문을 읽고 금방 이런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는 일에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을 도무지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확신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쁨을 안겨 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우리가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우로 가나 좌로 가나 만사가 잘된다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소위 통속적인 낙관론을 가르쳐 주는 근거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사가 저절로 굴러가면서 선한 것으로 바뀐다는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누군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이 말씀의 골자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까? 자기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29, 30절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위치를 혈통적인 의미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서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높은 이름을 가진 예수님이 모든 족속으로부터 세세무궁토록 영광받으시도록 하는 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의 동생이 늘어나면 우리 주님이 동생을 많이 거느린 맏아들로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많을수록 그 왕은 더 위대하게 보이고 그 왕권은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전도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영광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항상 마음에 깊이 새기고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직접 해당되는 구원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본받는다'는 말은 본래 '같은 모양을 취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외모만 아니라 내면까지 닮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단순한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닮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은 이 본문을 가장 잘 해석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이 말씀은 그분의 형상을 그대로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장에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17절의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도 가지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23절에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 역시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자기 자녀로 만드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입니까? 꿈을 꾸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구원의 다섯 단계
29, 30절을 보면 이러한 구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섯 가지 단계가 순서적으로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단계조차 모르고 산다면 좀 무식한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즉흥적으로, 내키는 대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거쳐 순차적으로 그 일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내가 어쩌다 믿게 되었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미리 아심'
'미리 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을 미리 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좀 착한 데가 있을 것이라든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 등을 아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런 것을 모르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조건으로 나의 선이나 나의 공로가 될 만한 무엇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구원은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받습니다. 만일 나에게 착한 데가 있어서 그것을 미리 알고 구원하셨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공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절대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자기 자녀로 처음부터 알고 계셧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전지전능입니다. 언제 우리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벌써 우리 개개인을 미리 아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미리 정하심'
그 다음으로 미리 '정하신다'는 것은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내 자녀다' 하고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왜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하고 한번 물어 보십시오. "내가 좋아서 그랬다." 이것이 그분께서 들려 주시는 유일한 대답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칼뱅은 다음과 같은 멋있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선택의 교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의 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절대로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좋아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왜 무조건 선택하셨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선택의 은혜를 두고 단지 기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부르심'
다음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예수 믿도록 이끄시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심'
그리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보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롭게 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을 직접 보며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오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은 몸은 땅에 묻혀 썩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썩은 몸은 새 몸을 입고 부활하여 우리 영혼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 몸이 구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자신은 완전무결한 새 인격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화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실성
유명한 신학자였던 와필드 박사는 위에서 이야기한 구원의 다섯 가지 단계를 놓고 "끊어질 수 없는 다섯 개의 고리로 만든 금사슬이다" 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의 내용은 우리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진리가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일은 중도에 수정되거나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설혹 방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대로 이루십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29, 30절에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8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나라 문장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주어를 생략하는 예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에는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을 놓고 우리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부분을 확인해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셨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하나님이 부르셨고, 하나님이 부르신 그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다."
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자꾸 반복해서 말할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개의 동사가 전부 과거 동사로 쓰여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성경의 독특한 어법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마지막 것만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어법상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한번 차례로 살펴볼까요? '아셨다', '정하셨다', '부르셨다', '의롭게 하셨다', '영화롭게 하셨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성사된 일입니다. 앞으로 될 일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다 끝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확실하게 해 놓으신 일을 가지고 우리가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미리 아신 것, 미리 정하신 것, 부르신 것, 의롭다 하신 것은 모두 과거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떤 사람을 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그의 부인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남편이 아직 믿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이 내 남편을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절대 모순이 아닙니다. 남편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아내에게는 남편을 위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안 믿는 남편을 놓고도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계획하신 그 시점에서 볼 때 남편의 구원은 이미 성취된 과거지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5가지 단계 가운데서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도래하지 아니한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창세 전에 미리 계획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곧 완성입니다. 그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에 말하는 '선'의 의미
다시 28절로 되돌아가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그 일을 빈틈없이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28절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 중에서 흔히 사람들이 잘못 남용하기 쉬운 말씀으로 이 로마서 8장 28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만사형통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으니까 다 잘될 것이다' 라고 잘못 적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본문을 과연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이것을 전도서 8장 12절에 나오는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식의 논리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좋은 일, 나쁜 일, 형통, 고난, 복, 불행, 스스로 행한 일, 본의 아니게 당한 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 오고가는 일, 살고 죽는 일 등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善)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선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영화롭게 하는 것, 즉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 선입니다. 이차적으로는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자리까지 이르도록 도움이 되고 영향을 끼친 모든 사건과 경험의 결과를 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온갖 경험을 통틀어서 결국 우리가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작업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만족스럽고 좋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데 유익한 것이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병을 앓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를 잘 믿게 되었다면 그 병은 물론이고 병을 앓게 됨으로 생긴 모든 결과를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전적으로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작업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선이 되도록 작업하십니다. 한 가지라도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거침돌이 되지 않게 하나님이 손을 써서 선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제가 보기에는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우리가 전부 다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 아신 것과 택하신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릅니다. 칭의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겪으면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부르셨다'는 말은 단순히 청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순종하는 중생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안 믿을 수 없도록 불러 놓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머리로 찬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드나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을 받으면 그 사람이 근본부터 바뀝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28절에서 한 가지 우리에게 암시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로 바꾸어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해야 논리에 맞습니다.
그러나 왜 '믿는 자' 라는 말 대신에 '사랑하는 자'로 말을 바꾸어 썼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하는가를 가지고 논해야 합니다. 단순히 입으로 믿는다고 하는 말은 신용하기 어렵습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귀신도 그 정도는 다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어느 정도 순수하고 참된 것인가는 다른 사람이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속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은 숨겨 놓을 수 없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대학시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완고해서 집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머니가 그를 불러 세우고 하는 말씀이 "얘야, 너 요즘 좀 이상하구나. 사랑에라도 빠진 게 아니냐?" 너무 놀란 아들이 뭘 보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어머니 대답이 "전에 없이 집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녀서 그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못 속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우리의 감정, 지식, 행동, 이 밖에도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에게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직접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을 보면 부름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성격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강제로 믿게 하는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강한 반발을 보입니다. 자기를 간섭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싫어합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기를 싫어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대신에 나를 높이기를 원하는 아주 못되고 고약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나의 생활을 간섭하신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한사코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톰슨이라는 사람이 쓴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낮과 밤 여러 날 그를 피하여 달아났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를 피하여 도망하였네/ 나는 마음속 미로로 그를 피하여 달아났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피하여 숨었었네//"
아무리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도망쳐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번연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목소리가 계속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강제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미리 알고 택하신 자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부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꽉 잡힌 사람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그의 마음 속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과거에 범했던 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또 가책을 받게 됩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성경책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교회에 한번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왜 그의 마음속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그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문에 실렸던 장로님 한 분의 고백을 제가 잠깐 인용할까 합니다. 먼저 그분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것을 그의 말을 빌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으며, 뒷자리쯤에서 적당히 즐기며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집사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자기 삶이 정리되고 명분이 확실하다면 지옥도 좋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때까지 부르심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작업을 계속 하셨습니다. 강남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오게 되자, 다니던 교회의 교역자가 사랑의교회를 소개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랑의교회로 옮겨 와서는 싫든 좋든 제자 훈련반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작업이라는 것을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면서 뿌리까지 흔들리는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성경 사이에는 근본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면 된다'는 결과 중심의 사고로 교육받았고, 절대선이란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말씀을 공부하는 중에 '내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옳은가, 성경이 옳은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나이 40에 처음으로 자기의 뜻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굽히고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놀라운 평안이 임했으며,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믿는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분이 겪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병으로 꺾어 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가지고 다루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허무함으로 고민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통해서 괴롭히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민을 안 갈 수 없도록 만듭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예수 믿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작업이요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인생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길입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간증을 이야기하는 것만 해도 아마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그러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우리를 다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눈 팔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다루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짓는 죄까지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짓는 죄가 마음에 걸리지, 두 번 세 번 계속 범하면 죄의식이 점점 희박해집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면 아마 우리는 끝장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징계를 하시는가 하면 상처를 싸매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한 그 죄를 돌이켜 영화롭게 되는 자리에 이르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하고 눈물을 흘립니까? 눈물을 흘리고 고통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뒤에서 선을 이루시는 작업의 과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나를 때리시다가도 안아 주시는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전보다도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쓰라린 경험을 선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까지도 통제하고 사용하셔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얻기까지 이처럼 의미있게 다루고 계십니다. 좋은 일을 통해서는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나쁜 일을 통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만을 소망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어느 것 하나 손해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다루실까요? 왜 사사건건 우리를 간섭하시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뒤에서 작업하고 계실까요?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28절과 29절 사이에 중요한 접속사 하나가 빠졌습니다. 전체 문맥을 따져 볼 때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접속사를 빠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창세 전에 미리 알고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자기 아들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나를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을 쏟아 부르신 자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그 찬란한 영광을 누리는 그 날까지 매사에 간섭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구원을 얻는 데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당하고 겪는 일들을 우연한 일로,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원치 않는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괴로워합니다. 26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무엇을 빌어야 할지' 잘 모를 정도로 갈피를 못 잡고 탄식하며 고통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눈앞에 닥친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28절에 "알거니와"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까운 일은 잘 몰라도 멀리 있는 것은 잘 압니다. 멀리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입니다.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잘 모르는 가까운 것만 보면 안 됩니다. 잘 아는 먼 훗날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지난날을 한번 돌이켜 봅시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그때 나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기 위해서, 나의 믿음을 연단하사 영화를 누리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한눈팔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작업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꽉 잡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빗나가지 않도록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은 자가 되기까지 철저하게 간섭하시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눈물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성공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실패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부르시기 위한 손길이었고, 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손길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창세 전에 아시고 끝까지 간섭을 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대신 나를 끌어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계획 앞에서 나를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광과 축복을 안겨 주신 주님께 어찌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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