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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고린도전서 13:9~13)

by 【고동엽】 2022. 9. 9.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고린도전서 13:9~13)        


사람이 자기의 부족을 인식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성장과 완성을 향하여 도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빌 3:12).
그렇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3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1. 성숙된 신앙이 됩니다.


9-10절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미숙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1) 부분적인 지식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라는 말은 지식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 “부분적”이라는 말은 전체적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한 가지는 알고 두 가지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알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율법의 조문을 따지면서 율법의 전체는 읽지 못했습니다(마 23:23). 자기중심의 편협한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들 때 하나님 중심의 넓은 세계를 분별하지 못하고 맙니다.


2) 부분적인 신앙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비의 체험을 뜻합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보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나, 예언을 하며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다든지, 또는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믿음이 있고, 많은 물질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헌신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완전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부분적인 열심이나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지만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크게 칭찬하였습니다(눅 7:9).

3) 성숙되지 못한 어린아이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좁고 행동이 미숙한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하든지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린아이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너희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 순전히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분량에 가까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갈 4:19).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과 같이 멀리서 소리만 듣는 것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말씀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거울로 비춰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반사체에 불가하지만 직접 대하는 것은 실체를 바로 보는 것으로서 확실할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령한 눈으로 가능합니다. 죄와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얼룩진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마 5:8).


2)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인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16).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어주으로써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적으로 증명되어 졌습니다(롬 5:6-8).


3)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1서 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데는 사람의 지식이나 이론이나 신앙적 열정만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본문말씀 8절에는 오히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게 되면 자신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 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5:14).


3.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말씀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1) 조화된 신앙입니다.

온전한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겸전된 것을 뜻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만이 확실한 소망이 있게 되며, 이와 같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므로써 그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침이 없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항상 같이 가야하는 변함없는 삶의 동반자입니다.


2) 사랑의 가치입니다.

여기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하신 말씀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소중하고 또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의 인격을 논할 때 여러 가지 숨겨진 요소가 있지만 결국 얼굴의 표정이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 뜻으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3:10). 성숙된 믿음은 곧 성경적인 사랑(Agape)을 실천하므로 그 행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행위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봉사와 섬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임마누엘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므로써 더욱 확실하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4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사랑의 단단한 줄로 우리와 예수님과 연결을 시키고 그와 함께하는 복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3:35).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우리의 온전한 신앙을 발휘해야 될 때입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삶을 실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칼럼 - 마음의 그릇


옛날부터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을 두고 “그릇이 크다”고 하거나 “그릇이 못 된다”는 말로 표현하곤 하였다. 인물이 출중한 것은 외모의 준수함이나 매너 있는 행동으로도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그 마음의 크기에 정비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편협한 마음 때문에 서로 분쟁이 있고 갈등이 심한 것을 보고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했다.
과연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사람은 누구일까?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인 경우 대부분 그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어서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껴안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상황이 오거나 자기의 이해관계와 맞닿는 순간이 되면 넓은 마음도 좁아져 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사실 누구나 본받을만한 넓은 마음의 모델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본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과연 예수님의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의 크기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단위로 표현 하면서 과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거기서 거기라 할 만하고 어찌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가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그릇을 키운다고 할 때 근접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으로 탈바꿈 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씩만 여유를 가지며 틈새를 넓혀 나가는 것으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의 공간은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나 인격에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 되며 인격이 성숙해 지는 현상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M. Luther)는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재미나는 예화를 소개하였다. ‘산양(山羊)두 마리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마주쳤다. 비켜 갈 수 없는 좁은 다리위에서 자칫 둘 다 물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중 나이든 산양이 먼저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맞은편에 있던 산양이 잽싸게 그 위를 밟고 넘어갔다. 그제야 엎드렸던 산양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유유히 다리를 넘어갔다는 것이다. 예화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어느 것이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고 어떤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모습인지 대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의 경우를 체험하게 된다. 그중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그런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실 조금만 여유 있게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데도 말이다. 피나는 훈련과 학습을 통하여 체력도 튼튼히 하고 지식도 높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에 더욱 매진하여야 하겠다. 태평양 바다처럼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가이없도록…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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