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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by 【고동엽】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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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196쪽에 있는 글입니다.

 

 

28.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1~39절

 

 

 

 

 로마서 1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그는 자기의 소원대로 지금까지 로마 교인들에게 자상하면서도 깊이 있게 복음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정도면 복음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설명한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복음의 피날레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서에서 복음의 대단원은 영화롭게 되는 축복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31~39절 이하의 내용은 복음의 비밀을 다 밝히고 난 그가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펜 가는 대로 털어놓은 그의 고백이요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말로 시작하는가를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 말은 극도로 기쁜 심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일을 당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런 심정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구원의 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마지막 악장을 장식하는 대합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질문 형식을 빌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들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 동안 A4 용지로 400매가 넘는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두에게 바울이 체험하는 감격이 있습니까? 각자 자문자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 정말 좋다! 너무 감격스러워 할 말이 없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런 감격이 가슴속에서 뭉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바로 들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가슴이 냉랭하게 식어 있습니까? 아직도 이 감격이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분이 계시면 이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8장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신의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고 외치는 것은 바울 한 사람의 독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합창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슴도 바울처럼 뜨거워져야 합니다.
 본문의 성격은 구원의 찬가이지만 그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구원을 흔들거나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하는 철석같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부동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역설적인 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적을 세 가지로 가정해 놓고 그 적들이 벌 떼와 같이 한꺼번에 덤빈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절대 안전하다는 사실을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의심이 우리의 구원을 흔들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한 그 사랑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건져 놓으신 우리를 포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구원의 확신을 흔들기 위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수법을 씁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위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사랑해 주실까? 아직도 하나님의 눈에 꼭 들게 살지 못하는데 정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아니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끔 합니다.
 예수를 갓 믿었거나, 믿은 지 오래되었거나 가릴 것 없이, 의부증 증세는 적고 많고의 차이가 있을 뿐 다 있습니다. 목사도 가끔 이런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나 사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가...?' 하는 버릇은 결코 남의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는 영원불변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사실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아끼던 것을 내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값진 선물을 값없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그의 사랑이 어찌 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바울의 논조입니다. 머리를 식히고 조금만 냉정히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독자가 부모의 마음에 얼마나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아는 자는 그다지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대, 3대 독자를 키우는 부모는 날마다 그야말로 만지면 터질까, 불면 꺼질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정성껏 키운다고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그의 할머니를 통해 독자가 지니는 의미를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부친은 4대 독자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외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셨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가정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자기 차례가 되면 할머니는 "이 귀한 외아들을 주시고 이 아들과 함께 늙도록 살게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와 함께 한바탕 울고 난 다음에야 정식 기도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비록 철없는 아이였지만 외동아들이란 정말 대단한가 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독생자를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독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로서 완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로마 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어두움의 권세에 내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케 하고, 저주의 죽음을 당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사 53:10).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죽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롬 4:25).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죄덩어리로 만들어서 처형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사랑을 일컬어 '무궁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렘 31:3).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 구절의 요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놓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나머지 우리를 위해서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척동자라 해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큰 것을 주면 그보다 못한 것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은 사람은 덜 귀한 것은 쉽게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가장 큰 것, 가장 귀한 것인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는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원수였을 때 자기 독자를 주신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지금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어찌 우리를 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큰 사랑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만큼 강한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무궁한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랑이 불변이면 우리의 구원도 불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바울처럼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가 우리의 구원을 흔들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두 번째 적이 있다면 범죄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절).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보고 죄가 있느니, 없느니 하고 따지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고소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주로 어떤 사람에게 생깁니까? 어딘가 켕기는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말로 발이 저린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용서와 의롭다 함에 대해 확신이 약하면 언제든지 크고 작은 죄책감이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특히 본의 아니게 한두 가지 죄를 짓게 되면 용서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대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동시에 구원의 확신이 자주 흔들립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지렛대로 삼아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았다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 있어?' 라고 침을 튀기며 우리를 정죄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가책과 불안으로 떨게 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이제 구원은 틀렸어' 라고 해야 우리의 상식에 통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설혹 무서운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습관적으로 어떤 죄를 범하는 사람이 '그래도 나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어' 라고 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캥기는 데가 있어도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인간의 논리로 따지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이 정도의 오해를 받을 만큼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아직 복음의 진미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몇 년 전에 제자반을 인도할 때였습니다. 여덟 분이 함께 제자훈련을 받았는데 대개가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믿음이 잘 닦여지지 않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날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공부가 거의 끝날 즈음, 제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시지요? 그러면 구원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모두가 확신한다고 대답을 하는데 유독 한 형제만이 약간 감정이 격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대답 못하겠어요. 우리 모두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하기 전에 세상에 나가 바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떠드는 것을 보면 저는 비위가 상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형제는 제자훈련에 계속 불참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그 형제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언동이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자기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그 사람 정말 구원받았구나' 하고 남이 치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살면서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 라고 떠든다면 어떻게 바로 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형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보면 그 형제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이면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늘은 스스로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지 하다가 하룻밤을 채 넘기기도 전에 자신에게 실망해버리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구원이니 확신이니 하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볼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절).
 
 누구를 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시니."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활에 비록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사실인 이상 내가 망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살아 계시는 이상 내가 버림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여기서 우편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좌우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할 일을 완전히 끝마치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쉬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7일에 쉬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할 일을 다 마치고 쉬고 계십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그가 안식하시는 처지를 가리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구원받을지 못 받을지 알 수 없어 우왕좌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천하가 다 무너져도 변할 수 없는 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처럼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의 중보자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시는 그의 자리를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가 거기 계셔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계시는 이상 하나님은 무엇이나 우리의 구하는 바를 허락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없는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없는 예수도 알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 우리도 함께 앉았다고 했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황홀한 진리를 믿는 사람이 어찌 확신이 없어 오락가락할 수 있단 말입니까?
 중보자의 위치에 대해 좀더 실감나게 설명할까 합니다. 어느 가정이나 비슷하리라 봅니다. 자녀의 눈에는 아버지란 항상 엄하고 은근히 두려운 대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요구를 아버지께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언제나 인자하고 자상한 대상으로 비칩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한테는 비교적 쉽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딱한 사정이 생길 때마다 아들은 엄마에게 와서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합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내놓기 어려운 말을 어머니께 이야기하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머니는 중보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청을 아버지가 거절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바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입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바로 그런 중보자가 되어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보십시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편에 계시는 주님은 곧 심판주로 오실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심판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심판자로 계십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재판석에 앉아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갑자기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장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살아나시고 나를 위해 중보하시던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분이 재판석에 계시는데 우리가 죄인으로 정죄받고 멸망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재판장의 인격과 권위를 불신하는 악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이상 우리를 향해 죄인이라고 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신다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와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면 예수 자신도 죄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찌 조금인들 가능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의 무한한 사랑, 그의 중보기도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운 심판석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무서운 시험이 우리의 구원을 흔들지 못한다
 
 세 번째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서운 시험이 덮치면 평안할 때 가졌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5, 36절).
 
 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입니까?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들이 여기에 다 나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환난'은 원래 로마시대에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트리볼룸'이라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 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 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신자들을 땅에 눕혀 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고'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용신할 수 없도록 좁은 감방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터질 것 같은, 미칠 것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곤고라고 합니다. '핍박'은 노골적인 박해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이요, '적신'은 헐벗음입니다.
 로마시대 당시만 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지 못해 죽어 갔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무서운 시련을 당하게 되면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그는 우리의 힘으로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좋아서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본문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옥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 믿는다고 해서 뺨을 한번 맞아 보았습니까?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감옥을 간 일이 있습니까?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 때문에 굶어 본 일이 있습니까? 언제 바울처럼 헐벗고 쫓겨다닌 일이 있습니까?
 저는 거꾸로 예수님 때문에 호강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저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갖가지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이기게 하는지 실제로 체험해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바울의 뜨거운 고백의 깊이를 다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 깨닫고 느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바울이 확신 있게 증거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진리가 꼭 체험이라는 여과기를 통과해야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지닌 힘, 사랑의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은 천하무적입니다. 바울은 이 능력을 환난과 곤고와 굶주림을 당하면서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무서워도 예수의 사랑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증된 이 사랑의 능력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가냘픈 실오라기처럼 약할지 모르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세상에 있는 모든 강한 것들이 다 덤벼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이기고 또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수없이 입증된 사실입니다.
 안이숙 사모님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 주었던 분입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본의 왕을 신으로 앉힌 신사에 절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처녀 몸으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당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책 서문에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격 부족으로 실격된 순교자다. 진실로 나는 내 주님 예수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잃었을 때 섭섭해서 몹시 울었다." 6년간의 지긋지긋한 감옥생활에서 풀려 나오는 처지에서 다른 사람 같으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할 텐데 거꾸로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하지 못한 것이 원통해서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여기에 그의 설명이 나옵니다. "양순한 양 떼 같은 성도들이 도살하는 자들 앞에서 그 모진 매와 고문에도 아이구 소리 한마디 안 하고 견디는 그 진절머리나는 참상을 볼 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급한 말로 '주여 천사를 속히 보내셔서 속히 이 모든 사실을 사진 찍으세요. 주여, 속히 속히...' 하면서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나는 예수님이 어떠하신 사랑으로 순교자들을 사랑하셨으며 만삭도 못된 나를 역시 그 어떠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셨던가를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와도 왜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꺾일 수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을 안이숙 사모님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7절을 우리 함께 큰소리로 읽어 봅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지 않을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믿음이 꺾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자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38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는 확신에 넘치는 어조로 외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 39절).
 
 할렐루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 모든 사실들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오늘 본문을 두고 두고 묵상하면서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확신이 생기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31절부터 39절까지 기껏해야 아홉 구절입니다. 만약 이 아홉 구절을 외우는 사람에게 아파트 당첨권을 준다 하면 기를 쓰고 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길 수 없는 저 영광스러운 천국 맨션을 주신다는데 외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합시다. 그 사랑을 받고 사는 행복을 노래합시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출처 :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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