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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17쪽에 있는 글입니다.
29. 나만 구원받아 행복할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로마서 9장 1~5절
우리나라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혹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에 잘 맞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람보다는 자기 가족에게, 타국인보다는 자기 동족에게 더 애정을 가진다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수고했지만 항상 그의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교만하고 완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온 사람의 수가 늘어 갈수록 바울은 더욱더 자기 동족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을 그는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 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1절).
그의 가슴 속에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근심과 고통이 어떻게 다르냐고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둘은 비슷합니다. 바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특권
그리고 바울의 이런 고통은 자기 동족이 예수 안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생긴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울분을 삭이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어떤 원통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 혹은 기득권에서 비롯되는 원통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4,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받은 특권에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 그리스도, 이 여덟 가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이자 특권이었습니다.
먼저 '양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명기 14장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로 입양시키셨다는 말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고 공로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자로 삼으셨으니까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는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과 만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그 영광을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신 것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할례를 가지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또 율법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와 같이 장엄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배우고 알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또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할 수 있는 영광, 특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민족에게 특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항상 지정된 장소에 나와서 제사 드리며 하나님 앞에 예배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조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을 통해서 형성된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혈통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민족의 혈통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여덟 가지의 기득권을 가진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보다 먼저 예수 믿을 수 있는 기득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와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될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고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다가 나중에는 꺾이운 가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을 제일 먼저 받아야 할 동족이 복음의 원수가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울분과 원통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동족들이 불쌍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바울의 고통은 커져 갔습니다. 그가 얼마만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아 버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동족을 몹시 사랑한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동족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위대한 지도자에게서만 엿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테마'라고 하는데, 이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나테마'는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동족만 구원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바울은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일생 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을 평생 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동족이요, 태장을 때린 사람도 종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바울이 이를 갈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울의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 10:1).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사랑해서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 구원받아 행복할까?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바울의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특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바울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로부터 매우 진지한 교훈과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심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첫째 교훈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8장에서 확신에 차서 큰소리로 외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끊을 자가 없다!" 하고 그는 자신의 구원의 요지부동이라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큰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이 큰 구원을 보장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자랑하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장으로 넘어가면서 전혀 다른 바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환희에 젖어서 기뻐하던 사람이 갑자기 신음하며 고통하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당연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처럼 돌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이토록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그가 마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바울도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1절에서 자기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8장과 9장 사이에서 표출되는 그의 감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바로 이 모순처럼 보이는 사실 때문에 저는 충격과 도전과 자책을 한꺼번에 받았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세에서는 한 사람의 운명을 행복과 불행으로, 축복과 저주로,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놓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 놓을 자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저도 바울처럼 좋아합니다.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물으십니다. "너 혼자 구원받았다고 감격하고 기뻐하다니... 너는 정말 행복하니?" 저는 "예" 하려다가 대답을 못합니다. 바울을 보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는 바울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바울만큼 구원의 확신이 강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바울만큼 구원받지 못한 영혼 때문에 고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나 혼자 구원받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서 기뻐하는 사람이 다른 형제의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 심령은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주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물으십니다. "옥 목사, 너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예, 주님 있습니다." "너 구원받은 것이 굉장히 기쁘지? 감격스럽지?" "예,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네 이웃, 네 동족을 생각하는 고통이 마음에 있는가?" "..." 저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이 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쉬지 않고 고통할 정도는 못 된다는 것이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저에게 질문을 던지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고통이 있습니까? 이웃과 동족을 생각하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나 자신을 저주받는 자리에 내놓는다 할지라도 형제를 구원하고 싶다는 그 높은 경지까지 고통이 승화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고난주간에 믿음 좋은 한 자매로부터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매년 고난주간만 되면 한 주간 동안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가 금식을 한 지 5일째 되는 날에 저와 만났습니다. 얼굴은 초췌해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밝아 보였습니다. 그때 그 자매로부터 참 아름다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갑자기 뭉클한 감격이 솟구쳐 올라왔어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가 봐요. 주님이 저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져요.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와요." 그 자매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또 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 울고,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너무 불쌍해서 울고... 이것이 바울의 심정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통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형제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이 고통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본능적인 감정입니까? 아닙니다. 이것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1절).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고통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까? 이웃을 생각하는 근심도 있어야 합니다. 확신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기쁨은 있는데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고통이 없습니까? 그 기쁨은 성령과 관계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점점 커지다보니까 예상치 못한 병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교회 병'이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를 위시해서 전 교인이 지금 이 병에 감염되어 있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큰데 또 전도를 해? 있는 사람도 감당을 못하면서..."라고 하면서 교회를 처음 나오는 사람을 봐도 반기는 기색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증세가 아닙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크다고 해서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전도에 무관심하거나 전도하려는 자를 향해 비판 의식이 생긴다면 이미 단단히 대교회 병에 걸린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크다고 해서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다면 대교회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대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불쌍한 영혼들을 보면서도 고통하는 마음이 없다면 대교회는 사라져야 합니다. 소교회를 열 개, 백 개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전도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핑계가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배웁니다. 우리끼리 구원받아 행복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 '새가족 모임'이라는 참 아름다운 모임이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 등록하신 분들이 5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는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최근에 그 모임의 초신자와 기성 교인의 구성 비율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성적이 좋을 때는 6:4입니다. 즉 성도들이 전도해서 오신 분이 4명이면, 교회를 옮겨서 들어오시는 분이 6명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적이 나쁠 때는 2:8입니다. 10년 전에는 7:3을 유지했습니다. 성도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끼리 구원받아 행복할까요? 절대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근심하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냉랭해진 우리 가슴에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눈물이 쏟아지도록 성령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가까운 내 형제부터
이 본문에서 배워야 할 두 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전도는 가까운 내 형제, 내 동족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은 개개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형제, 내 골육의 친척"이라고 한 말 속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기본 원리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이든지, 회사 직원이든지, 이웃이든지 간에 가까이에 있는 자들은 소위 가청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쉽게 전해 들을 수 있는 영역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세계 다른 민족에 비해 여러 가지 기득권을 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 혼자 예수 믿는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부인이 예수 믿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그 남편이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이미 가청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 부인으로부터 가족들이 종종 예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이 무언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 믿기가 훨씬 쉬운 자리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는 가까운 사람부터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30여 년 전에 제가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그룹으로 과외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과외 공부를 하던 귀염둥이 여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최근에 어떻게 연줄이 닿아서 남편과 함께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그는 예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 보니까 부부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제가 감탄을 했습니다.
그 남편은 화가입니다. 하루 온종일 집안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훌훌 털고 밖으로 나가 기분풀이로 술을 실컷 마시고 만취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까 근육무력증이라고 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아무도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개척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도 나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의 걸음으로 왕복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중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후 반 년이 지나자 그 병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는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전할 것인가 하고 고심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이 자기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셨는지 부인을 위시해서 자녀들은 물론이고 양가 부모와 형제들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인가요? 내 가정, 내 이웃, 내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만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예수 모르는 이웃을 위해서 참으로 가슴 아파하면서 바울처럼 기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막힌 기적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땅 끝까지 예수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큰데 또 전도냐?' 하는 비판 의식을 가진 분이 있나요?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비정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불쌍하다고 들어오라고 하셔도 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면 불편해서 못 삽니다. 그런 이기주의자, 냉혈 인간은 천국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너에게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너의 형제, 너의 동족을 위한 눈물이 있는가?" 이 질문을 받고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바울처럼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기 바랍니다. 아직도 남편이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부모가 예수를 모릅니까? 아직도 자식이 교회에 안 나옵니까? 아직도 이웃이 예수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직장 동료가 예수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당신 혼자서만 구원받았다고 기뻐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을 가증스럽게 보실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만 구원받아서는 이 땅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구원받아야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안 믿는 사람을 보아도 가슴이 저려 오지 않는다면, 북극의 빙산처럼 얼어붙은 그 마음을 녹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 혼자 구원받은 것으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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