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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를 만난 사람들 (눅24:13-35)

by 【고동엽】 2022. 9. 5.

부활하신 주를 만난 사람들  (눅24:13-35)

워싱톤 시의 어느 신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네치 그랜트라는 여자가 소아마비로 전신이 마비되어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할 수 있고 듣는 것뿐입니다. 자살을 하려고 해도 어린 딸 때문에 차마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좌절 중에 살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발가락 한 개를 가지고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을 전화국의 교환수로 취직시켜 줄 것을 요청했는데 수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16년 동안을 전화교환수로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학까지 보내고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은퇴하는 자리에서 기자들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승리하며 살 수 있었습니까?” 그 때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의 하나님,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 저주스러운 삶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그 모진 고난과 핍박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누우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려고 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다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고, 맹자도 죽고, 석가도, 마호맷도 죽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같은 위대한 사람들도 역시 다 죽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전기를 보면 한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었더라”는 기사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사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은 지금도 비어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세상의 어떤 종교와도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증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기에 언제든지, 어디서든 그 중에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12제자가 만났고. 주님을 따르던 마리아와 여인들이 주님을 만났으며. 나중에는 5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500명이 넘는 증인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나”입니다. 내가 증거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입니까? 오늘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 변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새로워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실망과 절망 가운데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내려가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절망의 저리에서 주님을 만났고. 포기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주십니다. 가정에서도, 산에서도, 들에서도 어디에서도 만나주십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가나안 여인은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침 받았고, 마태복음 9장 20절에 보면 열 두 해 동안 혈루 병으로 고통 받던 여인도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도, 귀먹고 혀가 어눌한 사람도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고, 누가복음 7장 14절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것도 길에서 일어난 역사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만나자 영안이 열려졌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니까 “저희의 눈이 가려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라고 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습니다. 눈이라고 다 눈이 아닙니다. 보이는 눈이 있고, 보이지 않는 눈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이 육의 눈으로 우리는 사물을 보고, 산하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고, 사람도 봅니다. 이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안구에는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어 거리를 재고, 광도와 색상 등을 자동으로 조절합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눈은 파스칼이 지적한대로 지극히 큰 것도 지극히 작은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눈으로는 이 지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아주 작은 아메바나 미생물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럽니다. “내가 다 봤어.” 뭘 다 봅니까? 이 눈은 아무리 지켜 떠도 자기 눈 위에 있는 눈썹도 보지 못 하는 게 눈이고, 아무리 크게 떠도 뒷머리도 못 보는 게 이 육체의 눈입니다.
또 하나의 눈, 우리에게는 영의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육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이 영의 눈이 봅니다. 신령한 세계를 봅니다.
영의 세계를 봅니다. 주님의 나라를 봅니다. 주님의 계획을 보고,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우리는 이 영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그때 신앙생활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줄을 믿으시고 이 영이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밝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열려야 합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은혜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교회를 다니면서 영안이 안 열려져 있는 사람이 문제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헤어진 지 20년, 30년 된 것도 아닌데 불과 2, 3일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16절에 저희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눈앞에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는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9절로 31절에 보면 엠마오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할 때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니까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줄 때 저들의 영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주셔야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볼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면 추하고 더러운 것을 탐닉하던 두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찾게 되고요, 죄악 된 세상을 관찰하기에 급급했던 두 눈으로 영원한 나라를 찾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유명한 찬송작가 크로스비 여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난 후에 신령한 영적인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찬양합니다.“주안의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두 번째는 성경 말씀을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이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말씀을 듣고 성경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웠다는 겁니다. 마음에 감동이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뜨거워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뜨거워야 합니다.
기도할 때 뜨거워야 합니다. 찬양을 할 때 뜨거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야 합니다. 신앙이 식어지면 안 됩니다. 신앙은 뜨거워야합니다. 신앙이 식으면 안 됩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져 버립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합니다.

계시록 2장에 보니까 그 당시 에베소 교회가 받은 책망 가운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겁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식은 가슴에도 이 부활의 불이 붙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가 뜨거워지고 찬양이 뜨거워지며. 헌신도 뜨거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얼굴이 변했습니다.(41)
제자들의 얼굴빛이 달라졌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어둡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얼굴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어야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얼굴이 되어야 됩니다. 맑고 깨끗한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맑고 평화로운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순교의 현장에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 죽어가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얼굴?
평화로운 얼굴? 신령한 얼굴? 이 천사의 얼굴일 겁니다.
스데반은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입니다. 스데반은 어린아이나 소년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천사의 얼굴 같았답니다. 어떻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얼굴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받은 얼굴은 다릅니다. 빛이 납니다.
구원받은 얼굴, 은혜 받은 얼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얼굴, 성령 충만한 얼굴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이며 천사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이런 얼굴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33절에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은 돌아갔답니다. 어디로 돌아갔답니까?
예루살렘이 어딥니까? 성지입니다. 주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도는 여기를 떠나면 안 됩니다. 여기를 떠나면 강도를 만납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사명의 자리입니다. 일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잃고 일을 떠났지만 주님을 다시 만나니 일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33절 머리에 “곧 그 시로”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즉시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다섯 번째, 우리는 듣고 본 대로 사실을 전해야 됩니다.
35절에 보니까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믿는 사실을 증거 해야 됩니다. 전하지 않는 믿음은 무력한 믿음입니다. 전하지 않는 믿음은 병든 믿음입니다. 보고 듣고 만난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은 내 입을 통해서 제2,제3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숨지는 그 순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 아프리카의 개척자이며 선교사인 리빙스톤이 오랜만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입니다. 그레스코 대학이 수여하는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강단에 나타난 그는 몹시 쇠약해 보였습니다. 아프리카 정글에서 아프리카 특유의 심한 열병으로 20번이나 쓰러졌던 그였습니다. 이날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에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극심한 고생과 죽음의 땅으로 그가 다시 돌아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리빙스톤의 조용한 연설은 이렇게 맺어졌습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나의 길동무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리빙스톤이 왜 극심한 고생을 선택하고 죽음의 땅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선교
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겠습니까?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서 어떤 고난과 역경 그리고 절망 중에서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부활의 예수님만 바라보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어떤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을 이기고 기도와 하나님 말씀으로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나보다는 주님을 위하고, 나보다는 이웃을 위하여 살며 헌신하는 성도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숨 쉬는 그 순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나를 감동시키신 예수님, 내 마음을 그토록 뜨겁게 하신 예수님, 내 삶에 그토록 넘치는 감동과 복을 주신 예수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예수님을 전해야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진실로 만났다면 어찌 입을 다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옵소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복된 입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저는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에게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만난 주님을 꼭 전하자고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신령한 세계가, 영의 세계가, 주님의 나라가 보이십니까? 또한 마음은 어떠십니까? 뜨거우십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우십니까? 말씀을 들을 대 뜨거우십니까? 찬송을 부를 때 뜨거우십니까? 여러분의 얼굴은 어떠십니까?
그리고 내려가던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다시 돌아갔답니다.
예배의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들은 대로, 본 대로, 체험한대로 사실을 전했답니다.
바라기는 이 부활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셔서 이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개혁교단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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