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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9쪽에 있는 글입니다.
36. 구원받은 삶이 있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1, 2절
본문 중에 제일 처음 나오는 단어인 '그러므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부터 시작하여 1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의 확신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어떠한지, 그 소망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가슴이 뜨겁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이제 우리 구원의 터가 만세 반석 위에 완전히 닦여진 것입니다. 터를 닦았으면 집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12장부터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복음의 터를 닦았으니 이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바로 이 '그러므로'입니다. 교리를 배웠으면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으면 반드시 구원받은 자의 삶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말씀과 순종은 일치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과 삶의 구원은 절대 나누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중차대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말이 '그러므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에도 똑같이 '그러므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녀의 결혼 문제를 놓고 창세기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뜻깊은 주석을 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그런데 이 말씀은 부부 관계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과 삶, 진리와 순종을 짝지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함부로 나누면 안 됩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순종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사람의 삶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가정이 병들어 이혼하는 부부가 날이 갈수록 늘어 가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도 구원과 삶, 진리와 순종이 하나 되지 못하고 별거하거나 이혼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은 구원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배우기는 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영혼은 구원받았는지 모르지만 생활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무력해지고 신자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타락의 주범은 바로 이 '그러므로'가 없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바울이 로마서 첫 장에서부터 11장까지에 설명한 그 놀라운 진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겨 보세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은 감격 없이 받을 수 없는, 너무나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구원을 받았음을 분명히 믿고 감격한다면 거기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그 반응은 지금부터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과 순종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러므로'입니다. 입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그러므로'의 응답이 희미하다면 그 사람의 구원 자체를 의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러므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면 구원받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1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우리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몸보다도 우리의 중심을 보기를 좋아하십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제물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을 바치라고 말씀하실까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요점입니다.
우선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몸을 바치라는 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몸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매우 강도 높은 말로 성경 여기저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고린도전서 6장 15~19절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몸이 영혼과 함께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은 죄로 인해 부패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울러 연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죄의 작업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을 제물로 제단에 올려 놓아야 하는 것은 영혼과 함께 몸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혼만의 구원으로는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없는 영혼을 생각할 수 없고, 영혼 없는 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구원은 영혼과 몸이 함께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영혼과 몸의 구원, 즉 전인격적인 구원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하나님이 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십니까? 몸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제단에 올려 놓은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몸은 '나'라고 하는 인격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인격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몸이라는 것은 '나'를 보여 주는 하나의 가시적인 인격입니다. 그리고 몸은 '나의 삶'이 어떠한가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몸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이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바르게 산다. 저 사람은 잘못 살고 있다"라고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은 우리가 세상에 있을 동안 살기 위해 뛰는 주체요, 살기 위해서 쓰임받는 수단이 됩니다. 날마다 세상을 산다는 말은 몸이 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은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구원받아 주의 것이 되었다면 그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생활 영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진리를 모르고 생활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몸이 뛰는 생활 영역 전체가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진 제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사는 데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려면
우리 몸이 뛰는 생활 영역 전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구별해 놓은 것은 무엇이나 거룩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따로 떼어놓은 성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죄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의 병기로 우리 몸을 함부로 내맡겨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바쁘게 보내는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내 몸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수시로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시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거룩하게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다음은, 우리 몸을 산 제사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몸을 죽은 제사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이 살아있는 제사, 숨을 쉬는 제사, 생명이 있는 제사가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산 제사'란, 제물에다 생명의 에너지를 가득히 채워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삶의 에너지를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한평생은 건강과 나이와 사회 활동 등에 따라 최상의 조건을 갖춘 삶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물론 병들어도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슬픈 일입니다. 건강할 때는 제멋대로 살다가 병이 들어서야 주님을 찾는다는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께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까? 물론 그래도 교회를 찾아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형통할 때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살다가 망하고 나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린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젊어서는 제 마음대로 살다가 늙어서야 의지할 데가 없으니 교회에 열심히 출석합니다. 물론 이도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생각하면 좀더 빨리 나와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렸더라면 얼마나 더 향기로운 산 제사가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산 제사는 최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고의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 믿기 전에 젊을 낭비한 사람, 재물을 탕진한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등 여러 가지 형편에 놓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지난날 하나님께 죽은 제사를 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픈 분들은 이제부터라도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오늘을 최상의 삶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립시다. 적당하게 보내는 사람, 게으르게 꾸려 가는 삶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과거를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몸을 던져 하루하루의 삶이 산 제사가 되게 합시다. 우리가 젊었든, 늙었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간에 날마다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으로 뛰는 삶 전부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고 일어나는 것, 집안일을 하고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입니까? 이 진리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몸을 가지고 뛰는 이 삶 자체가 다른 사람 눈에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라고 믿을 때, 그때 비로소 살맛이 나고 우리의 삶에서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영적 예배'는 '합당한 봉사', '당연한 섬김'이라는 말로도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합당한 봉사', '당연한 섬김'이라는 말이 어떤 면에서는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영적 에배라고 할 때 그 개념이 추상적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예배를 합당한 봉사나 당연한 섬김이란 말로 바꾸어 놓으면 그렇게 막연히 들리지 않습니다.
'합당한 봉사'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몸이 뛰어서 영위하는 삶 전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만 있다면 그 삶 자체가 바로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섬김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영적 예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서 구체적인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목말라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더 주는 행동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됩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이웃을 위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봉사가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 생활에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버리십시오. 또 이것을 별나게 은혜받은 사람들의 특별한 봉사나 어떤 영웅적인 헌신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안이숙 사모처럼 주를 위해 5년 가까이 형무소에서 핍박을 당한다거나 언더우드 선교사처럼 외국 땅에 나가서 선교를 한다든지 해야 비로소 합당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쓰임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안이숙 사모처럼 특별하게 쓰임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낮은 데서, 작은 데서, 평범한 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하찮은 일과를 통해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젊음을 송두리째 제단 위에 올려 놓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선교사의 배후에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땀 흘려 노동한 대가에서 얼마를 떼어 후원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장 종업원의 생활이 선교사만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선교사나 노동자나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사의 삶과 공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직공의 삶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매일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나의 일이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봉사가 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일 하찮게 보이는 하루 일과가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봉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95%가 실패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십중팔구 매일 반복되는 하찮은 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침 안개처럼 금방 사라질 덧없는 한 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95%를 실패하고 나머지 5%의 삶을 겨우 건져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찮게 보이는 일, 아주 사소한 일들이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봉사가 되도록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환경오염 문제가 지구촌의 심각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때를 놓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시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태계가 너무나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모두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옛날에는 음료수를 마시고 깡통을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을 보아도 무신경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태가 다릅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이웃을 해치는 사람이요, 후손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요, 지구를 병들게 하는 범법자로 보아야 합니다. 상수원을 오염시키는 가두리 양식업자, 법규를 지키지 않는 낚시꾼과 유흥업자, 폐수를 마구 방류하는 공장, 그들에게 불법으로 허가를 내준 공무원들이 국민의 공적(公敵)으로 간주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과소비가 판을 칩니다. 흥청망청 쓰는 버릇때문에 우리 경제가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력 소모율이 1인당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세계1위라고 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것 가지고 내가 쓰는데 무슨 소리냐"라는 말은 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낭비가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어때' 하는 비양심적인 생활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언젠가 공중 목욕탕에 갔는데, 어떤 분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로 수염을 깎고 있었습니다. 줄줄 흘러내리는 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온수가 계속 흘러내리니 얼마나 아깝습니까? 곁에 앉아서 지켜보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5분 이상 뜨거운 물을 낭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 말 않고 제가 수도꼭지를 냉큼 잠궈버렸습니다.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 사람 손에 시퍼런 면도칼이 들려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욕탕 물값의 35%가 기름값입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다 우리 수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돈 내서 쓰는 물이 아닙니다. 다행히 그는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 다음부터는 물을 써야 할 때만 꼭지를 틀고 즉시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친 낭비벽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산다면 우리 사회는 몹시 삭막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가 자연을 보존, 보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관리하라고 주신 자연을 스스로 망치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요,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봉사라고 한다면 자연을 파괴하는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제가 근교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산에는 작은 기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 속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목청을 높여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제 옆을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분이 "하나님도 야속하시지, 저렇게 달라고 야단인데 좀 주시면 어때" 그러더라구요. 팔자 좋게 사는 여자들이 남모르는 인생고를 안고 산에까지 와서 부르짖는 그 사람의 속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안 당하면 모르는 거지요.
좀더 위로 올라갔더니 30대로 보이는 젊은 부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온 세계가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선교사를 많이 보내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지나가다가 듣고 속으로 '할렐루야, 아멘'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기도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기 몸과 시간을 기도하는 데 바치고 있으니 얼마나 향기로운 제사가 되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써 자기를 아름답게 바친 사람이라면 남을 해치는 일은 안 해야 도리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느라고 깔아 놓았던 신문지, 눈물 콧물 닦고 버린 휴지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보호를 위해,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지저분한 것을 깨끗이 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세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사람이라면 쓰레기 하나라도 안 버려서 자연을 해치지 말아야 하고, 이웃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까지도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의 의미를 담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줄이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요, 전기를 아끼는 것도 이웃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봉사가 된다고 생각하고 이 일들에 앞장서 주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끝으로, 우리의 삶 전부가 향기로운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새삼스럽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밝혀진 하나님의 뜻을 잘 명심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오면서 수없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을 적어도 한두 번 읽고 영적으로 열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최상의 목표로 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뜻을 잊어버리거나 잘못 이해하거나 소흘히 여기는 데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영적 분별력이 흐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려면 영적 분별력이 약해져서 흐리멍텅해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흐리멍텅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거부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갱신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2절).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한 행동 양식을 거부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사람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어느 선까지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생살이가 복잡합니다. 사회 구조 또한 복잡합니다. 또 문화의 여건에 따라서 선을 긋는 기준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황에 따라 어디에다 선을 그어야 할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부할 것은 무엇이며 허락할 것은 무엇인가를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노력을 통해서 분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중생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갑작스러운 체험이나 잠자는 사이에 벌어지는 요술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을 한 번 보십시오.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든 것이라 해도 그대로 두면 먼지가 앉고 더러워집니다. 계속 닦아 주고 관리하지 아니하면 못쓰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중생받은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닦고 손질하지 않으면 금방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말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깨끗이 닦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항상 분별할 수 있도록 자기 영혼을 개끗이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골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주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들은 다음에도 그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감과 힘과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일을 멈추고 간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기도와 말씀을 빼놓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흐리멍텅한 삶을 살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습니까? 몸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몸이 구원받았습니까? 삶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있다고 합니다. 거룩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는 것만이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는 일 전부가 주의 일이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산 제사는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봉사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하루의 삶 전부가 거룩한 제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매일을 살 때 우리의 생활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버릴 것이 없는 인생이라면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 닦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버릴 것이 없는 24시간을 보낸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얼마나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얼마나 감사가 넘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도록 부름받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 주시고 지혜 주시고 분별력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정말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우리의 동족은 어떠합니까? 우리나라만큼 이단 집단이 극성을 부리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칭 메시아라고 떠드는 사람을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정말 보통 나라가 아닙니다. 저 북한을 보십시오. 세계에서 저만큼 저주스러운 극성을 피우며 거짓된 주체사상에 속아 발광하고 있는 민족이 또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유대인처럼 잘못된 열심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 잘못된 열심에 빠져 있는 너희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바울처럼 고통하고 있느냐? 아니면 비판하고 욕하고 비웃기만 하느냐?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예전에 서대반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은혜로운 간증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북한에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몇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공산당원이 예수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에게 사로잡혀 그 뜨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예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들어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왔습니다. 지체가 높은 당원이니까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서 풀어 주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가 석방되고 나서도 계속 예수를 전하자 이번에는 그의 성대를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말을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두들겨 맞아서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서 선교사님이 북한의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특송 시간에 그가 찬송할 기회를 얻어 찬송가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라는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눈물이 나서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자 거기에 참석한 약 150명의 사람들도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는 것인지, 서러워서 우는 것인지 모르지만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독창을 마친 그 선교사님은 몹시 감동해서 다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330장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 이 불쌍한 우리 동포가 북녘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상에 속아서 살지만 예수의 이름만 들으면 금방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을 놓고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 비록 잘못된 열심에 빠졌다 할지라도 예수만 전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들이 네 주변에 많이 있는데 네 동족에 대해서 네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마음 아파하느냐?"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 앞에 "주님, 저는 그들을 위해 날마다 마음 아파하며 기도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쓸데없는 일에 열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 내 동족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 36. 구원받은 삶이 있는가?|작성자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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