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단순한 사람 (마태복음 19:13~15)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의 특징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전통적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들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할례를 받았으며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일 뿐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과 상반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마 23:27).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품에 안으시고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성품이 있습니다. 꾸밈도 없고 거짓됨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마 11:29). 천국 백성은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성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똑같은 천국 백성이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천국 백성입니다. 그것은 곧 단순한 성품을 뜻합니다.
1. 지식의 단순성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가졌던 솔로몬 왕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1:18). 옛날 사람들도 많이 알수록 근심거리가 많다고 하여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런 말이 옳다면 많고 복잡한 지식 보다 오히려 단순한 지식이 좋은 것입니다.
1)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는 보고 듣고 체험하는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어른들처럼 여러 가지를 섞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서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백지처럼 깨끗한 사람인 경우 받아들인 그대로 인식합니다. 자기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혹시 거짓된 사람의 잘못된 말이라도 그것을 진실로 알고 그대로 받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사에 시달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때가 묻게 되지만 어린이의 본래 모습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진실된 바탕에 지식을 쌓아 가는 것입니다.
2) 사기성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본성은 거짓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밝고 맑고 순수 하다가도 나이가 들고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서 점차 그 순수성이 일그러져 가곤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지식을 가지거나 그것을 적당하게 꾸며서 자기 편리하게 적용하게 됩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바른말을 하고 진실된 행동을 하여야 되는 줄 알면서도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따라 제게 유익하도록 말을 바꾸고 편리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또 손해를 보이면서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며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마 7:15).
3) 신앙의 지식은 단순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 9:10).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그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복잡하게 알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7:25-26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 나이, 성격, 학력, 경력, 직업, 재산, 사회적 지위 등 복잡하게 알려고 하지만 자식은 그냥 “내 아버지”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린아이처럼 “아빠 아버지”라고 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어떻고, 속성이 어떻고, 그 하시는 일이 어떻고 하는 등 복잡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학설과 도에 넘치는 지식 때문에 혼란에 빠지거나 거기 걸려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2. 행복의 단순성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 추구하는 내용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앞서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행복 지수에 있어서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선진국 사람들을 앞선다고 합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이가 아무 걱정 없이 편한 잠을 자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1) 욕심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가 못 가진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일삼는 사람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비교 하지 않고 언제나 저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면서 욕구 불만을 품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욕심이 자리 잡게 되면 사리 분별이 흐리게 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합니다. 야고보서 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작은 것에도 만족합니다.
만족의 수위(水位)가 일정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도 행복을 모릅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장난감 하나만 있어도 세상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만족의 수위가 끝없이 높아지기 때문에 욕구불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7-8). 먹을 것과 입을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큰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는 못살겠다고 아우성쳤습니다. 민수기 11:4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3)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조그마한 호의에도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곤 합니다. 언제나 얼굴에 밝은 웃음이 있고 감사가 있는 사람은 그 행복도 어린 아이처럼 단순합니다. 좋은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눈물 흘리고, 칭찬 받으면 좋아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즉시 사과하고 뉘우치는 등 매사에 단순하고 명료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최대한 즐기며 살아갑니다. 솔로몬 왕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전 3:12-13).
3. 소망의 단순성입니다.
아이들을 보고 “네가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든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든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든지 어느 것이나 특징적인 것 하나를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오래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여러 가지 종목들을 내어놓고 한 가지도 빼놓을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천국백성은 소망이 어린 아이처럼 단순 하여야합니다.
1)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는 희망 하는 것이나 꿈이 단순하지만 점차 자라가면서 욕구성향이 다양해지고 그 꿈도 복잡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소망은 가지각색으로 끝이 없습니다. 소망하는 것이 많고 복잡할수록 이루기도 어렵지만 한 두 가지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크고 궁극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로마서 8:24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험한 세상에서도 천국에 대한 환상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남이 모르는 행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히 11:14-16).
2)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 백성의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평생을 살아가는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피력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인줄 알고부터는 그가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리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에게 붙들려 살기위해 진력하였습니다(빌 3:8-12).
빌립보서 1:20-21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빌 3:20).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자기 마음속에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을 최상의 행복으로 여깁니다. 세례 요한처럼 나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존귀해 진다면 그것을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알며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요 3:29-30).
목회자 칼럼 - 한려수도(閑麗水道)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도 부근에서 사천시,남해군을 거쳐 전라남도 여수에 이르는 바닷길을 한려수도라고 부른다. 연장 300여리 되는 이곳 해역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다양한 어족들이 있어서 소위 남해안의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통영 앞에 있는 한산도와 삼천포를 거쳐 하동과 남해 사이의 노량 해협과 여수에까지 그 바다에 있는 섬들과 지명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전적지로도 그 이름이 알려진 지역이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1986년 이곳을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한바 있다.
나는 간혹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사천 비행장까지 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경치는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오래 전 일이지만 부산에서 여수까지 여객선을 타고 지나갈 때면 섬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와 절벽, 그 사이사이에 서식하는 동백꽃 군락, 곳곳에서 그물질을 하고 있는 어부들, 물위를 나는 갈매기 떼 등 시야에 들어오는 정경들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여객선 갑판위에서 상큼한 바다 바람을 마시며 스쳐 지나가는 정취에 흠뻑 빠져보는 낭만이야 말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 될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그때의 정서를 그리워하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성향이 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것도 고향이 거제도 섬 마을이라는 것과 또 어린 시절 바다에서 보고 느낀 것이 많이 있어서 바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바다는 언제나 친근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와 반대의 현상으로 돌변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고요하고 낭만적인 바다, 그 위로 떠다니는 배들과 평화스럽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와 물새들의 노래 소리 등 어느 것 하나 싫은 것이 없다. 그런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거기서 활동하는 어촌마을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곧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 바다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반영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둔갑해 버리곤 한다. 기상의 변화에 따라서 한순간 성난 파도로 엄습해 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재앙으로 돌변해 버린다. 1959년 9월에 남해안을 휩쓸어 버린 “사라호”라는 태풍은 그 악명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남기고 지나갔다.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은 물론이고 방파제와 여러 가지 구조물들과 바닷가 마을들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폐허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때 가족과 재산을 잃어버린 바닷가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더러는 바다를 원망하면서 한을 품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두 얼굴을 가진 세상의 체질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인지 모른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가보고 싶고 마음속의 찌들어 있는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려 버릴 것 같은 낭만적인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생업의 터전으로 부와 풍요의 활동무대 이기도 한 바다는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노도광풍으로 뒤엎어지고 공포의 현장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다에 대한 불안과 긴장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산다. 동백꽃이 어우러진 한려수도의 정취를 즐기면서 이 바다가 주는 또다른 의미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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