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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가지라 (이사야 40:31)

by 【고동엽】 2022. 9. 5.

자신감을 가지라   (이사야 40:31)

<本文>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40:31)

<序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첫째날에 남으로 살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 드렸고 둘째날은 쉽게 시작해야 할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세번째 시간 또한 좋은 것을 머무르게 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종종 욕심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녀를 유학시키기 위해 부부가 헤어져 산다든지, 나이가 많은 데로 공부하겠다고 유학을 간다든지,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직장을 버린다든지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선택하므로 현재 누리고 있는 좋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새 교회를 찾을 경우 현재 교회의 좋은 점을 잃을 수 있고, 새 가정을 찾을 경우 현재의 가정이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고, 새 팔을 원할 경우 현재의 팔의 좋은 점을 잃어버릴 수 있고, 새로운 형태를 원하여 성형을 할 경우 현재의 좋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좋은 것을 알고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本論>
    1.시선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선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시선은 그 사람의 관심분야를 말해주며 그 사람의 사고를 말해 주며 그 사람의 가치관을 말해 줍니다. 또한 시선은 행동을 결정하며 생활 형태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대로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잘 냅니다. 화를 잘 내는 것은 화를 잘 내는 성품 때문일 수도 있고 인내심을 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보면  항상 열받는 것을 봅니다. TV나 신문을 보아도 좋은 기사는 안 보고 열받는 기사만 봅니다. 사람을 봐도, 가정을 봐도, 단체를 봐도, 교회를 봐도, 항상 안 좋은 것만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아무리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라도 시선이 부정적인 곳에만 집중된다면 분이 가득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공부를 너무 못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전 과목이 '가'에 한 과목만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너무 한 과목만 집중해서 공부하지 말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좋은 눈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한 여성이 20대 초반에 결혼했는데 23세에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유복자로 딸을 낳았습니다. 혼자 살면서 시장에서 온갖 장사를 해 가며 딸을 길렀습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딸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했습니다. 딸은 나이가 먹고 가정을 이루고 40을 훌쩍 넘겼습니다. 딸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문뜩 어머니에 대한 감사가 느껴졌습니다. 어머니 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사하여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 사드릴께요" "나는 네가 잘되는 것이 큰 기쁨이야 다른 건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단다" 그래도 딸이 계속 다그치자 어머니가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쉽지 않구나 나를 교회까지 태워다 주지 않으련? 돌아올 때도 문제가 되니까 나와 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구나"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려울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 다니다가 공부 핑계로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녀를 환영했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자 목사님도 칭찬을 했습니다. 딸도 싫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딸과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여성들이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너무 큰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서로 헐뜯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 수 없군" 불쾌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 2층 통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이 그를 찾아와 자기 아들 기부입학을 청탁해왔습니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옆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꽤 심각하게 싸우면서 입에 담은 말들이 세상 사람들도 않는 심한 욕설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고 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 손을 잡아 끌고 나오려 했습니다. "어머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마세요 일요일이면 내가 소풍을 모시고 다닐테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맙시다" 어머니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물었습니다. "너 왜그러니?" 어머니의 표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단호했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단호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지금까지 있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봤는데, 너는 교회에 딱 하루 나와서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딸을 충격받았습니다. 그 동안 무식한 어머니가 아무 목적없이 무의미하게 교회를 다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복만 비는 기복신아의 소유자인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태도에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신앙심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처럼 저속한 문제만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그 가치를 보는 눈을 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최초의 이방교회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교회에 들렸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사정을 알아보려고 바나바를 안디옥교회로 보냈습니다. 당시 안디옥교회는 신생교회로서 미숙한 교회였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습니다. 약점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에 도착한 바나바가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11:22-23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보십시오. 말씀의 가치를 보십시오. 신앙 인격의 수준을 보십시오. 현재 무엇을 보느냐가 미래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합니다. 바라본 대로 살아갑니다.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보십시오. 긍정적인 것을 보십시오.

    2.방향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어느 쪽으로, 누구를, 무엇을 향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행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산과 서울간 열차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는 대전에 있고 하나는 수원에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 열차가 서울에 가까이 있습니까? 당연히 수원에 있는 열차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차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치보다 방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몸에 털이 많고 건강하고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는데 몸이 외소하고 섬세한 집안 일 돕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형이 사냥하고 돌아왔을 때 배고픈 약점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명분을 샀고 형에게 돌아갈 재산을 가로챘고 외삼촌댁으로 도망하여 외삼촌을 속에 재물을 모았고 자기를 길러준 외삼촌을 배반하고 도망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이 보복할까봐 만나자 마자 '형님을 뵈니 주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고 아부를 했습니다. 야곱은 자타가 인정하는 잔머리 굴리는 자이고 간사한 자이고 사기치는 자입니다. 상종하기 싫은 스타일입니다. 에서는 기껏해야 가슴에 발모제 발라 털나게 하고 배고파서 팥죽 한그릇이 얻어 먹고 싶어서 장자 명분 판 것 밖에 더 있습니까? 배고플 때 동생이 빵을 가지고 '형이 나 동생해 그러면 줄께' 하기에 '그래 너 형 해 나 동생할께' 한 잘못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형과 동생이 실제로 바뀐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언약적으로 보면 에서가 잘못한 것이지만 도덕적으로 보면 야곱이 나쁜 동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롬9:13).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 (히12:16). 언약적으로 볼 때 야곱이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언약적 축복을 사모한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있다면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했다는 것입니다. 형의 낯을 피해 외삼촌 댁으로 도망할 때도 루스의 한 데에서 잠을 잘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의 복을 구했습니다. 외삼촌 댁에서 돌아올 때도 형이 겁이 나니까 밤새 하나님께 씨름하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범죄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다윗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죄는 공적이 죄이고 다윗의 죄는 사적인 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사울의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제사장만 드리도록 한 제사를 자신이 드렸습니다. 또 아말렉을 짐승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살찐 짐승은 사로잡아 왔습니다. 또 율법에 금한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별로 큰 죄라 할 수 없습니다. 제사를 드린 것은 선지자겸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고 살찐 짐승을 사로잡아 온 것은 제사용으로 사용하거나 일용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은 죽은 사무엘을 만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잘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청부 살인했습니다. 또 군대를 의지하려고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누가 보아도 다윗이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왕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며 그를 버렸고 다윗에 대해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며 나라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고 그리스도가 그의 후손에서 나게 했습니다 (행13:22). 하나님은 사울과 다윗을 위치로 파악하지 않고 방향으로 파악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범죄한 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이 움직여 하나님께 침상에 요가 뜨도록 회개했고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자기 죄에 대한 당연한 보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압살롬에 의해 왕위에서 맨발로 쫓겨날 때에도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시켰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그 고난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죽기 직전에 성전을 지으려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한데 있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소망으로 가졌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범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향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적 축복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무엇을 향해 갑니까?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두어야 합니다.    

    3.표현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표현이 중요합니다.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삶의 여정에서 고난과 실패는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실패를 실패로 여깁니다.

요즘 대학 입시 방법은 우리 기성세대 때와 다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시가 있습니다. 내신으로 대학 원서를 내는 것입니다. 또 정시가 있습니다. 정시는 학력고사 점수와 내신으로 대학 원서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정시 때에도 여러 학교에 원서를 내서 그 중에 합격한 대학을 가게 됩니다. 우리교회도 이번에 대입 학생이 4명 있었습니다. 1명은 수시로 합격했습니다. 3명은 수시와 정시에서 계속 떨어져 저의 피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세종대와 총신대와 남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 번 떨어졌어도 최종적으로 합격하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것입니다. 우리 김 전도사님도 총신 대학원에 두 차례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합격했습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것입니다. 2번 실패했어도 1번 합격하면 성공인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해도 1번 성공할 것 생각하고 살아가는 자는 행복합니다. 실패했어도 실패했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인생의 일들은 다 흘러갑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그 것을 붙잡지 말고 그냥 두면 흘러갑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그것을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쁜 것에 집착하면 실제로 불행한 생이 됩니다. 나쁜 것을 표현하는 사람은 계속 나쁜 습관을 가져서 불행하게 되고 좋은 것을 표현하는 사람은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회의 중에 화를 냈다고 하면 금방 누가 화를 냈을지 압니다. 또 누가 회의 중에 감사를 했다고 하면 금방 누가 감사를 했는지 압니다. 저는 누가 불평하고 악한 루머를 퍼뜨렸다고 하면 대충 누가 그런지 압니다. 또 누가 칭찬하고 위로하고 좋은 말을 했다면 누가 했을지 압니다. 그것이 나쁜 것을 표현하는 것도 습관이 되고 좋은 것을 표현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그 사람이 그렇게 고정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표현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을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비젼을 말하십시오. 그에 합당한 행동을 습관화하십시오.
  
<結言>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는 자는 좋은 것을 머무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지키시고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시121:4-8, 23:1-2, 125:1-2) 시편121:4-8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시편23:1-6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본문 말씀처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출처/차용철 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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