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주고 (마28:19-20)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주신 말씀으로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불리어지며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the Great Confession)과 대응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게서 명령을 주시는 근거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로 부터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대 사명의 말씀 가운데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먼 저 할일을 말씀합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제자들에게 가서라고 하시는데 가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롬 10:14, 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함과 같도다
주님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성도의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come structure)도 중요하지만 전도하기 위하여 '흩어지는 교회'(go structure)가 되어야 합니다.
고구마전도법이 있는데 핵심은 교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합니니다. 마치 정탐꾼이 대상자를 물색하듯, 수시로 젓가락으로 익은 고구마를 찾아내는 전도법이기 때문에 교인들을 '젓가락 정탐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등록을 했든지 예전에 등록을 했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성경을 많이 읽든지 적게 읽든지 성격이 내성적이든 외성적이든지 학벌이 있던지 없던지 여건과 환경에 관계없이 교인이라면 누구나 젓가락 찌르기 정탐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대한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십니까?'(첫번째 젓가락)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너무 좋아요' '기도하고 있습니다.'(두번째 젓가락)라는 말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제시할 수 있을 만큼 훈련된 교인은 통상 전교인의 3-5퍼센트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전도하는 것을 스스로 복음을 설명하고 대상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까지 해야 하는 것조차 생각해서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아예 '예수 믿으십니까? 라는 말조차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교회 전체가 전도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이 고구마 전도법이라는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그저 생활하면서 가족, 친지 직장동료, 이웃, 심지어 도심에서 만나는 택시기사한테까지 고구마 찔러보기만 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다니면 된다는 것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하여 모든 믿는 성도들이 전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고 또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전도를 하자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전도법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익었나 안 익었나 찔러보는 전도법으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자(행13:48}를 찾아내는 방법입니다. 사람(고구마)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과 연령을 떠나 '저사람이 예수 믿을까 안믿을까, 익었나 안익었나'에 관심가지고 일단 믿음의 젓가락으로 찔러서 확인해 봅니다. 내가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찔러보면 하나님이 익혀 주신자들이 있고, 비록 생고구마라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 없고 '내가 한번 찔러 놓았으니 빨리 익겠지'하는 오히려 승리감을 가지고 즐겁게 전도(찔러보기)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부흥사인 무디는 날마다 한 사람씩 전도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임 완수를 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밖으로 나가 어느 술주정꾼에게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말했다합니다. 하지만 그 주정뱅이가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그냥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다음 그가 무디를 찾아와서는 '예수를 믿으세요.'라는 당신의 말이 이상하게 내 귀를 떠나지 않아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었지요.'라고 고백했다합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으라고 합니다.
(마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복음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이나 특정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것을 가르쳐 주는 명령입니다.
복음의 대상은 '먼저 유대인에게'의 제한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장은 허물어졌으며, 모든 족속은 제한 없이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모든 족속'은 아직 믿지 않는 이방 민족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말씀은 가르치고 훈련시킨다는 뜻으로 개인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조직될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제자는 겸손히 말씀을 받는 자요 실행하는 자이니 그러한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황제 아크바르가 아홉 명의 현인을 궁중에 두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현인들을 부르고는 무척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너희들에게서 전혀 배운 것이 없다. 너희들이 여기 있는데도 나는 그대로 마찬가지니, 너희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한 아이가 궁중을 구경하고 싶어서 어느 현인을 따라 같이 들어왔습니다. 황제의 말을 들은 그 아이가 웃자 아크바르 황제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왜 웃느냐? 궁중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너는 아버지에게서 예절도 배우지 못했느냐?” 아이가 말했습니다. “제가 웃었던 이유는 이 아홉 명의 현인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폐하께서 그들로부터 혜택을 입지 못하였는지도 저는 압니다.” 황제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냐?” “네” “그렇다면 가르쳐보라!” “그렇다면 폐하는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로 내려오셔야 하고 왕좌에는 제가 앉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로서 질문을 하십시오.” 그제야 황제는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그 아홉 명의 현인들은 완전히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능력이 있었으나 왕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고, 받아들일 마음도 없었고 겸허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습니다. 왕이 내려와 앉았고 아이가 상좌에 올라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황제가 아니라 제자답게 질문을 하여라.”그러나 황제는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발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대의 발치에 겸손한 자세로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마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자는 성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유일의 중보자와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보혜사 성령을 그의 위로자로 고백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성을 가지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과 인간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성자 하나님과 영으로 오시어 은혜로 우리를 감화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세례는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합니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한 사건은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취급하실 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밝혀주는 실례가 됩니다.
한 젊은 여자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여자는 딱지를 떼이고 판사 앞에 섰습니다. 판사가 소환장을 읽고 말하기를 “유죄요? 무죄요?”그 여자는 ‘유죄’라고 대답했습니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리고 10일이나 1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판사가 일어나더니 법복을 벗고 정면으로 내려가 지갑을 꺼내서는 벌금을 지불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습니까? 그 판사는 그녀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의 딸이 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가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용서하겠다. 너는 가도 좋아.”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정의로운 판사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법을 존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꺼이 법복을 벗고 정면으로 내려와서 그녀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대신 벌금을 지불했던 것입니다.
세례는 아들의 희생이 함께 합니다.
1937년 어느 여름날, 철도 다리의 관리인인 잔 그리피스는 배를 지나가게 하려고 다리를 들어 올린 다음 그의 여덟 살 먹은 아들 그레그와 함께 관망대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갑자기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400명의 승객을 태운 멤피스 특급열차였습니다. 그는 관제탑으로 뛰어가서 다리를 제대로 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레그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떨어져서 왼쪽 다리가 거대한 기어 사이의 톱니바퀴에 물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아들을 구하느냐, 400명의 승객들을 구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고뇌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바른손으로 스위치를 힘껏 밀어 제쳤습니다. 열차는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건넜습니다. 잔 그리피스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을 때 열차의 창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정장을 한 사업가가 무심코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고, 말쑥하게 차려 입은 숙녀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아이들은 가늘고 긴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습니다.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는 철마를 향해 고함쳤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내 아들을 바쳤다. 그래도 아무 관심이 없단 말이냐?”열차는 으르렁거리며 질주해 갔고 잔 그리피스의 고함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인생들이여, 낮고 비천한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급행열차를 타고 심판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세례는 성령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몇 해 전 폭우 때의 일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시장엘 다녀오다가 아파트 앞 맨홀 주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는 가까이 갔습니다. 초등학교 2 학년된 남자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맨홀 뚜껑이 열려져 있는 것을 모르고 흙탕물을 헤치고 걷다가 그만 맨홀에 빠져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린아이가 살아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려 하다가 놀라서 뛰어오는 같은 구역식구인. 그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과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두 분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하는 동안 주위사람들은 아이의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며 하수구의 물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줄기를 막고 맨홀을 들여다 보니 맨홀 한 구석에 그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끌어내어 보니 아이는 신기하게도 다친 곳도 없고 아무런 이상도 없었습니다.
후에 아이에게 말을 들어보니 그 아이가 맨홀에 빠졌을 때 겁에 질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하고 소리를 쳤는데. 웬 아저씨가 “밧줄을 잡아라.”고 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그 줄을 잡으려고 하는 중에 물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밖에서 줄을 잡으라고 소리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밧줄을 잡으라고 소리치던 아저씨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셨을 것입니다.
세례를 주고 할일을 말씀합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들이 3년간 들은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doctrine)을 그대로 마지막까지 전하는 데 교회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전하는 자의 사상이나 가르치는 자의 사상이 아닌 주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례를 주면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마 28:20)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세상 끝 날까지 중단 없는 영적 임재를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은 항상 우리와 함께 현재적으로 같이 계심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이미 그의 탄생시에도 있었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남은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 하셨고 앞으로 영원토록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신앙 의식이며, 확인이며, 복인 것입니다.
성경 고고학을 가르치는 찰스 셔어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자기 생애 대부분을 팔레스타인에서 고적답사와 연구를 하는 데 바친 분입니다. 그는 선교사로서, 고고학자로서 일을 하다가 고향인 미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고, 그의 인격 앞에 압도당하지 않는 학생들 또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교수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처음에 학장님께서 방문을 하고 오셔서 희망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소생할 가능성이 도저히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들려 온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소생한다 해도 그 정신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교수님의 중환자실을 방문했던 학장님은 학교 예배 시간에 아주 깜짝 놀랄 만한 보고를 합니다. 셔어 박사는 반드시 건강이 회복될 것이며, 그의 정신도 정상적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확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중환자실을 방문했을 때 셔어 박사는 무의식중에도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학장님이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어보니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평상시에 늘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만큼 말씀과 가까운 분이었습니다. 말씀이 그의 인격을 지배했고,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이 그 분과 같이 거닐고, 또 그 분은 계속 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인격과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 사명의 말씀을 주시며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중국에 어떤 늙고 가난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노파는 이미 신앙은 가지고 있었으나 세례받기를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왜 주저하느냐고 목사가 묻자 노파는 두 볼 위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목사님도 잘 아실거예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저는 일흔이 다 된 늙은이랍니다. 눈도 가물가물 하구요. 내 남편이나 아들, 또는 며느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웃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전할 수 있어요. 또 가까운 마을 하나 둘이라면 찾아가 전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모든 족속을 찾아간다는 것은 저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요. 목사님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저를 주님께서 과연 제자로 불러주시겠어요?' 이 노파의 말을 듣고 난 목사는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지 그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다.'목사의 설명을 듣고 난 노파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목사님만 좋으시다면 어제든지 세례를 받겠습니다.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GOSPEL HERALD-세례받기를 거절한 이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세례를 주라하신 말씀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감을 가지라 (이사야 40:31) (0) | 2022.09.05 |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롬7:1~6) (0) | 2022.09.05 |
허무한 삶과 영원히 남는 삶 (전1:1~3, 벧전1:23~25) (0) | 2022.09.05 |
말에 의한 기적 (잠언 18:20~21, 벧전 3:10~11) (0) | 2022.09.05 |
창이 열려 있는 집 (다니엘 6:10-15) (0) | 2022.09.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