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어떤 곳인가? (출25:22, 행2:42)
지난 금요일 구역장들을 비롯한 60여명의 강변교회 성도들이 청평 별장에 함께 모여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호수가 별장에서 복음 찬송을 함께 부르고 또 부르면서 눈물겨운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 소개와 간단한 퀴즈를 알아 맞추고 상품들을 받으면서 모두들 즐거워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회개운동을 일으키기 수년 전에 원산에서 회개 운동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느 권사님이 ‘하드’ 라고 잘못 대답을 해사 상품을 못 받았지만 어느 집사님이 ‘하디’ 라고 대답을 해서 상품을 받았습니다. 동생이 형을 자주 때리지만 동생을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착한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즉시 누군가가 동혁이라고 대답을 해서 상품을 받았습니다. 김영숙 뷔페가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모두들 너무 좋아했습니다. 점심 후 6명씩 한 조가 되어서 모터 보트를 타면서 모두들 너무 신나 했습니다. 원두막에 둘러 앉아서 네 박자 게임을 하면서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행복이 무엇이냐?”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모두들 즐거워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다 내 보내고 집에서 혼자 뒹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이 행복이지만 여기 저기 쏘 다니는 것도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화를 걸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행복은 강변교회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청평에서 강변의 성도들과 함께 지낸 하루가 너무너무 행복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강변교회를 향해서 달려 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강변교회에서 받은 은혜를 조용하게 고백하는 소박한 간증에 모두들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강변교회가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강변교회에서 목사님을 만나고 성도들을 만난 것이 그리고 위로와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주일 새 가족 반에서 어느 젊은 권사님은 1981년부터 지금까지 강변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인생은 만남이고 나눔이고 기쁨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교회야말로 만남과 나눔과 기쁨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은혜와 사랑을 함께 나누는 나눔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누리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만남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만남이 없는 인생은 고독하고 불행합니다. 만남이 있을 때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누립니다. 이광미 집사는 지난 주에 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전후로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보여준 뜨거운 관심과 기도와 사랑에 대해서 너무너무 고마워하면서 강변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말을 저에게 여러 번 했습니다. 암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닫고 너무너무 좋아하며 강변교회 성도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만남과 나눔과 기쁨의 장소입니다. 오늘 아침 “교회는 만남의 장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의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지옥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도 사람과 만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천국의 삶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라고 이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만남의 장소가 아무런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제단의 장소였고, 성막의 장소였고, 성전의 장소였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교회의 장소였습니다.
아벨이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곳에서 아벨을 만나주셨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 제단을 쌓고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곳에서 노아를 만나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면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7).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이삭을 만나주셨고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라”(창26:23-25).
야곱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벧엘은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피난 길에 오른 야곱이 어느 날 저녁 돌을 베개하고 들에 누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은 얻으리라”(창28:13,14). 야곱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두려움과 기쁨에 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 그리고 그곳에서 돌 기둥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은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20여년 후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야곱을 다시 만나주셨고 말씀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이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대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창35:6-11).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막의 중심에는 법궤와 속죄소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이스라엘과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다음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2-16).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곳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우물은 교회의 모형들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그의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수가성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선구자가 되었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죄인인 세리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죄가 너무 많은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에 성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성전 뒤에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세리가 의인의 칭호를 받고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곳입니다.
인생의 모든 축복과 행복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막에 올라가든지 벧엘로 올라가든지 성전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막도 없고 벧엘도 없고 성전도 없습니다. 성막과 벧엘과 성전은 모두 교회를 가리키는 교회의 모형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일 아침과 저녁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야 하고 특히 새벽에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새벽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나 주십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리로다”(시46:5).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여러분들도 모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처럼 모세처럼 한나처럼 사무엘처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교제하므로 인격이 성숙하게 되고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은 이기주의와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천국과 이어지는 우주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의 모형인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서 봉헌한 솔로몬은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계적이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지은 성전이 이스라엘 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고 의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위한 성전도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백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저희가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 보옵시며 주께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대하6:18-19,24-25,32-33,36-39).
솔로몬의 기도가 사도행전 2장에 와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주님을 따르던 120명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했고 그리고 세계 곳곳으로부터 모여든 3천 여명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8-1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38-42).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가르침을 받는 일과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을 쓴 것이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고, 함께 모여서 교제하기를 힘썼고, 함께 모여서 떡을 떼는 일에 힘썼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결국 교회는 만남과 나눔의 장소였고 만남과 교제를 힘쓴 장소였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리고 함께 모여서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함께 가르침을 받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떡을 떼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구제하고 함께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남과 나눔을 좋아하지 않고 힘쓰지 않은 신자는 참된 신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남과 나눔을 좋아하고 힘쓰는 신자는 참된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만나서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셋째, 이방 교회 설립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만남과 사람 만남의 교회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고 점점 이방으로 멀리 퍼져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끼리만 만나서 교제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같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의 축복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고 점점 이방으로 멀리 퍼져 나아간 것을 보여줍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남쪽 가사라는 광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와 간다게의 내시가 병거를 타고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행8:27,28). 빌립은 선지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의 글을 풀어서 설명을 하면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러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8:35). 결국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가사 광야에서 빌립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가사 광야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건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사람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말씀과 복음을 주고 받음이 있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가사 광야에 에디오피아 교회의 기초가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만남과 나눔의 역사와 교회 설립의 역사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등포 광야에서도, 브라질 원주민 속에서도, 필리핀 원주민 속에서도, 피지 원주민 속에서도, 전도자와 토착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복음과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예수의 영에 이끌리어 북쪽 이방의 땅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가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권적 이끌리심에 의해서 할 수 없이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곳에서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 백부장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는 고넬료의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함께 모여있었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몊 사람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의 이끌리심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성령께서 그곳에 강하게 임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10:44-45). 사도 베드로는 성령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고넬료와 그곳에 모였던 이방인들은 베드로를 만났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그곳에 이방인 교회가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만남과 나눔과 교회 설립의 역사가 공산주의 지역이나 모슬렘 지역과 같은 반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안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만남과 나눔의 역사와 교회 설립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의 씨앗이 막 뿌려지기 시작한 이방의 땅 안디옥으로 달려가서 그곳에서 이방인들을 만나 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3,24). 안디옥 교회는 조만간 예루살렘 교회 못지 않은 모범적인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함께 모여서 전도하고 함께 모여서 선교한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과 흑인과 백인들이 함께 모여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발전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안디옥교회는 교회가 만남과 나눔의 장소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든지 이방 교회이든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교회에는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강변교회에는 누구나 올 수가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도 남한 출신도 북한 출신도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기존 신자도 새 신자도 누구나 기쁘게 올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 교회의 특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교회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만나는 곳입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주님께 예배 드리면서 서로 교제하고 서로 봉사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만날 때 삶의 의미와 기쁨을 누립니다. 인격이 성숙해지고 인생관과 세계관이 넓어집니다. 만남과 교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친밀한 만남이 없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인사도 없고 교제도 없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들과의 교제와 만남이 없을 때 신앙의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신앙 생활의 기쁨과 감격이 있을 수도 없으며 교회의 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만남이 충만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충만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충만한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충만하려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출25:22). 사람들과의 만남이 충만하려면 사람들과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과 인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봉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서로 교제하기를 힘쓰니라”(행2:42).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니라”(행2:46).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성도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힘써야 만남이 충만한 교회가 됩니다. 힘쓰지 않는데 무슨 일이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까? 모든 일은 힘쓰는 데서 일어납니다. 사람들과의 교제의 폭을 넓히고 깊이 할 때 사람은 참으로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만남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만남이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엡2:21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교회는 신자 하나 하나가 서로 붙어서 그리고 주님과 붙어서 만들어져 가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느니라”(엡2:21). 여러분들은 만남의 장소인 강변교회에서 충만한 만남을 가지시며 충만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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