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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171쪽에 있는 글입니다.
44.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려면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로마서 14장 5-12절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좋은 교회에서 기쁘게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그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우리가 찾아다녀야 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려면 형제 자매가 한마음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체질이 바로 형성된 교회를 일컬어서 좋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투고 반목하고 나누어지는 교회는 절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명 설교자가 있어서 설교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전통이 오래된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 되지 못하면 절대로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려면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 마음을 열고 받아야 합니다. 또 다른 형제를 비판하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 불쌍히 여기면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갈등해서는 안 됩니다. 입을 조심하여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교회를 만드는 조건이요, 좋은 교회에서 기쁘게 신앙생활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신앙 양심에 따라 행하라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원칙이 5절에 나옵니다. 이 원칙을 바로 깨닫고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5절).
이미 앞에서 배운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교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오래 몸을 담고 있었던 사람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다음에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기도 매우 중요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유월절은 물론, 나팔절이나 칠칠절 같은 절기들도 다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도 유대교에 몸담고 있을 때처럼 가려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반면에 헬라 문화권에서 예수 믿고 돌아온 이방인 성도들은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음식을 가리느냐? 예수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자유를 얻었는데 왜 그렇게 매여 살아야 하느냐?'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상이한 두 부류가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향해서 비판하고 헐뜯는 말을 예사로 하는 어려운 풍토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이런 문제를 놓고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그는 놀랍게도 어느 한쪽의 입장을 두둔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이 강한 자들의 편을 들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서로 비판하고 헐뜯는 사이라면 어느 편도 잘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쌍방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쌍방이 함께 순종해야 하는 중요한 원칙 하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5절 내용을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구별해서 지키려고 합니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어느 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주를 위해서 사는 날이 되었으므로 어느 한 날을 우상처럼 받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이므로 그러한 견해 차이를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원칙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 말은 소신대로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신앙 양심에 따라 각자가 결정하고 대처하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과 성경 지식에 비추어 확신이 서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날이나 절기, 음식 등의 문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지켜졌던 그림자 같은 일입니다. 골로새서 2장 16,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 17).
실체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자리에서는 그림자 따위는 물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요,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온 거룩한 떡이시요, 양식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 된 이상,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여러 가지 규칙, 절기 등은 다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 15절도 함게 보겠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레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 15).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주님은 우리가 매여 있던 모든 제도의 쇠사슬을 끊어 놓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로마교회 안에서도 이 사실을 확신한 사람은 그 믿음이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 안에는 날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만 마음에 평안이 오고 은혜가 된다고 고집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놓고 본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비록 믿음이 약하여 그렇게 할지라도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해서 하는 일이면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원칙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이 옳다고 결정한 일을 떳떳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예수 믿는 분 가운데는 소신에 따라 별스럽게 날을 지키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날이라고 해서 이날을 구별해서 지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식을 한다거나 철야기도를 한다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금요일을 특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 중에 OM 선교회의 총재인 조지 버워 씨가 있습니다. 그는 한 달에 하루를 꼭 구별해서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날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기도하고 금식을 하거나 말씀을 묵상하며 보낸다고 합니다. 그분의 스케줄을 보니까 꼭 하루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특별히 어느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날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또 특별히 날을 지키는 사람이 안 지키는 사람에게 "너는 왜 안 지키니?"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믿음의 양심에 따라 확신이 서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음식에 관해서도 별나게 고집을 부리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개중에는 피는 절대로 먹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피는 생명이라고 했으니까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율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율법이 생기기 오래 전부터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선지국도 안 되고 그 맛좋은 순대도 입에 넣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은 노루를 잡아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받아 마시는데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양심에 가책을 안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보고 잘못한다고 나무랄 이유가 없습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소신껏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의 신앙 정도에 따라 소신껏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일에 예배를 마친 다음, 오후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것도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해도 되는가? 이것도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구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관람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올 것인가? 이것도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믿음 좋은 배우자를 찾을 수 없으니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도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돼지 머리를 앞에 놓고 고사를 지내는 자리에 참석할 것인가, 피할 것인가? 이것도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소신껏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구체적인 대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비판하면 안 됩니다. 서로의 양심적인 자유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 원칙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과거 한국 교회 안에서는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싸잡아 매도하는 악습이 계속되어 왔고, 이것으로 인해 성도들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곤 했던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이 순수한가?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검토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소신껏 양심적으로 하면 돼." 이것으로 만족해버린다면 우리는 크게 잘못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아시고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을 달아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6절부터 12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첫째 조건은 동기와 목적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를 보십시오. 이 말씀 중에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중요한 어구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말씀 중에 '주를 위하여'라는 어구가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을 '주께 대하여' 혹은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궁극적인 목적 또한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할 때 분명한 조건 하나가 따라오는데 그것이 '주를 위하여'입니다. 아무리 양심상 가책이 없다 해도 동기나 목적이 주님 중심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일 때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내용은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토요일 안식일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결정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를 안 먹겠다고 결정했다면 그것도 주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것도 주를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견해나 행동의 차이는 있어도 동기나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서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를 위한다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할 때 우리는 어떤 형제라도 포용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하나 되는 데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무엇이나 주를 위하여 결정해야 되고 주를 위하여 실천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7, 8절에 나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7, 8절).
얼마나 강경한 어조입니까? 여기에 나오는 '우리'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이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치고 어느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해 살고 죽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운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생사 문제에도 '나를 위하여' 라는 말은 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아직 성경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옵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분명하게 결정된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위하여' 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동기와 목적이 '주를 위하여'가 아니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 두기 바랍니다.
미국 아이들이 처음 태어나서 배우는 말은 'me, my'라고 합니다. '나'라고 하는 말입니다. 자연인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천성적인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주님'입니다. 자연인으로 태어날 때는 '나'이지만 성령으로 거듭나면 '주님'입니다. '나를 위하여'가 '주를 위하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9절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9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만을 씻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나는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의 주님을 믿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자신을 위하여 살 수가 없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입니까? 기본적으로 이 사실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아주 작은 문제에도 '주를 위하여' 라고 하는 순수한 동기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자기를 위하여'라는 고집이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서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말은 '나'라는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날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 모든 것이 다 '주를 위하여' 라는 명제 아래서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라는 명제 아래서는 그리스도의 어떤 자유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7, 8절은 우리 모두의 양심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문에 가책받지 않는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각자 이 말씀을 외우면서 자기 자신을 이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기 바랍니다. 당신이 과연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를 위하여'라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인가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주를 위한다는 독선
그런데 불행하게도 '주를 위하여' 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중에도 무엇인가 자기 주장을 하려고 할 때 '주를 위하여'라는 말을 자주 들고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곤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만 주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독선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아주 유능한 데다가 아직 젊어서 장래가 촉망되는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약 2, 3천 명이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한지 약 1년 반이 되었을 즈음, 그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분이 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둘이서 만났는데 그분이 성경책과 노트 한권을 가지고 왔더랍니다. 목사님은 그분이 성경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으러 오셨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목사님을 위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쳤습니다.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그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해서 한 설교 중에 잘못 말한 것, 개인적으로 성도들과 만나서 말 실수한 것, 또 여러 가지 덕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 이처럼 정신나간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우리의 동기는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도 순수해야 합니다. 각자가 신앙 양심상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수시로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일 성수에 대해서 한마디하고자 합니다. 주일은 그 날 자체가 중요한 것보다 그 날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주일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의 대원리는 '주를 위하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일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명제만 같다면 주일을 지키는 양식에 있어서는 교인들 간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목사가 주일을 지키는 스타일이나 일반 신자들이 주일을 지키는 스타일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 주변에 있는 상가로부터 어떤 소문이 들리느냐 하면,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 교인들이 대거 쇼핑을 하러 온다는 소문입니다. 무엇을 사고 파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대단한가 봅니다. 어느 음식점 주인은 말하기를 "예수를 믿고 싶어도 사랑의교회 손님받는 일이 너무 바빠서 믿을 수가 없어요" 하더랍니다. 저는 주일날 이것은 사도 좋고, 저것은 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선을 그어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돈 주고 거래하는 것이 전부 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획일적인 말을 할 만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인지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바로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입니다. '주를 위하여'를 가지고 주일을 바로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자매가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을 위해서 겨울 스웨터를 하나 사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몹시 바빠서 평일에 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일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사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예배 드리려고 교회에 들어올 때부터 스웨터를 사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립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나갈 때 시간이 너무 지체되니까 뒷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찬송을 부르나 기도를 하나 마음 한 모퉁이에는 스웨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슨 칼라를 선택할까 하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분들의 스웨터를 슬쩍 훔쳐보기도 합니다. 어느 가게에 가면 좀 싸게 살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결국 이런저런 잡념이 끼어들면서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스웨터를 사는 것이 죄냐, 아니냐 그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인이 과연 주를 위하여 바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냐, 아니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주를 위하여 주일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각각 양심껏 대답해 주기 바랍니다. 저는 주일날 가족과 함께 큰 식당에 가서 회식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해도 좋으냐? 그것쯤은 생각할 수 있는 양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일날 교회 근처에 팝콘이나 군고구마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몰려옵니다. 즐겨 사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주일마다 장이 설지도 모릅니다.
이런 현상이 주를 위하여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라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앞에 놓고 우리의 행동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만한 양심은 가져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나만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주일을 보낸다면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절대 못하는 것입니다.
판단은 오직 주님만이
끝으로 또 하나 간단한 조건을 말씀드립니다. 각자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0~12절).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간혹 보면 사람끼리는 과연 '주를 위하여' 하는 일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를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이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입으로 사실을 직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심판대에 서서 자기 일을 직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짓으로 '주를 위하여'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서 "주여, 나는 주를 위하여 주일을 이렇게 지켰고 주를 위하여 사회에서 이것은 금하고 이것은 하였나이다" 할 때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정말 주를 위해서 산 것입니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주님이 나무라시면 자기가 평소에 주를 위해서 했다는 일이 전부 거짓말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심판대에서 담대하기를 원하는 자는 입에 발린 소리로 '주를 위하여'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다른 형제의 일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일을 물으십니다. "너, 누구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행동을 했든지 간에 결국은 그 사람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일을 가지고 떠들거나, 다른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형제가 정말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영국 런던에서 사역한 유명한 설교자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스펄전 목사와 조셉 파커 목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각자 런던에서 아주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하여 개인적인 교제도 잦고 강단도 서로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만 의견 대립이 생겼습니다. 의견 대립을 하니까 목사도 별수없나 봅니다. 서로 비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파커 목사가 극장에 드나든다고 비판했습니다. 목사의 신분상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질세라 파커 목사도 스펄전 목사가 왜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다고 빈정댔습니다. 당시의 신자들은 담배 피우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두 목사님 중에서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두 사람 다 틀렸습니다. 극장 가고 담배 피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비판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담배 피운 사람이 잘못한 것인지, 극장 드나든 사람이 잘못한 것인지 결국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진정으로 주를 위하여 한 것임이 드러나면 하나님께서 문제삼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경에서 직접 답을 얻을 수 없는 모호한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각자가 신앙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자기 소신껏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은 '주를 위하여'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동기와 목적은 사람이 겉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옳은 동기를 가지고 했는지, 그릇된 동기를 가지고 했는지 주님만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는 '주를 위하여'를 앞세우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일이면 힘들어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피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한 모든 일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분명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일 성수 문제나 술 담배 문제나 그밖에 세상을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은혜롭게 풀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쪽이든지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출처] 44.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려면|작성자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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