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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12:9-19)

by 【고동엽】 2022. 9. 2.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12:9-19)

오늘 말씀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린 이후에 예수님은 그야말로 인기 절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고, 예수님께 싸인을 받고 싶어했고,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거나 높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겸손을 배워 겸손의 종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로 모이는 큰 무리
9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 이후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뵙기 위해서, 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까지 보기 위해서 베다니로 몰려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지만, 아마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살아있는 기적, 나사로를 보기 위해 찾아왔을 것입니다. 어쨌든 나사로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표적에 근거한 이들의 믿음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으로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일로 인하여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10-11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그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렸다면,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되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일인데... 오히려 이일로 예수님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시기심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받고 있는 저 영광과 칭찬과 인기를 자기들이 받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함에 대한 질투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죄악된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된 본성이 이렇게 살아있는 부활의 증인을 보면서도 질투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구세주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단의 자식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무지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기적을 본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게 기적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을 보고도 안 믿었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느끼고, 믿고, 사랑하고, 겸손히 주의 일에 충성하니 이게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이런 기적같은 삶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유월절
12-13절을 보면, 이제 그 이튿날,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희생양, 속죄양이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한 마디로 죽으러 스스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큰 무리가 이 소식을 듣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라는 말은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짧은 기도(시 118:25)였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이 왕이신 것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 세상이 예수님이 구원자시오, 메시야시며, 왕이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외침을 가로막지 않으시고, 승리와 영광의 입성을 하심을 통해 자신이 왕이신 것을 온 천하에 명백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또 자기들의 겉옷까지도 내어 펴며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헛된 바램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유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나사로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행하신 그 모든 기사와 능력과 표적을 통해 볼 때 ‘이 예수야 말로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며, 부와 명예와 존귀를 가져다줄 메시야임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구원,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심령속으로 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로부터의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정치의 문제도, 권력의 문제도, 빵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 이 문제를 해결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이들의 영적 갈망을 아셨기 때문에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진정한 왕으로써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그러나 이렇게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왕의 모습은 세상의 왕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휘황찬란하며 엄위 있고 감히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권세 있는 모습으로 행차합니다. 옛날 왕의 행차나 오늘날 대통령이 지나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감히 어느 누가 그 앞으로 뛰어나가 손이라도 만져볼 수 있겠습니까? 당시만 해도 왕은 금은보석이 찬란한 황금마차를 타고 온다던지, 아니면 아주 멋있는 백마를 타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런 당시의 왕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행진을 하셨습니다. 14-15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의를 복원한 사진에 의하면 예수님의 키는 대략 178cm 정도 되셨을 거라고 합니다. 이런 건장한 청년이 어린 나귀 위에 올라타, 발이 땅에 끌리며, 또 때로는 나귀가 뒤뚱거리며 넘어질뻔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우스운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습니까?

  첫째,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순종으로 사신 순종의 왕이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심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말씀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집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위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바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전도의 삶을 살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교육, 그리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교육, 그리고 교제의 명령에 순종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엄청나게 삼엄한 경비 속에,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여, 감히 일반 백성들은 다가갈 수 없는,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옵니다. 보통 사람이 감히 청와대나, 궁궐이나, 백악관에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은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힘과 무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게 섬기는 왕으로 오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가 가진 권력을 통해 부정부패를 일삼고 전쟁을 일으켜 자기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이들은 사단의 빼앗고 죽이는 속성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서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오히려 섬겨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무리 가난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맛보고, 그와 함께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왕국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이 세상을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겸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겸손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반면에 교만은 흉악한 죄인이나 위대한 종교개혁자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죄악의 뿌리인 것 같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겸손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릎 꿇은 염소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는 처음에는 서로 돕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해 나가면서 점점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점이 발견되었고, 또 성만찬과 같은 어떤 교리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의견충돌로 서로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산을 함께 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두 마리의 염소가 매우 좁은 다리 위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염소들은 다리의 중간에서 서로 오도 가도 못하고 곧 한판 싸움이 붙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래에서 올라가던 염소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그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 후에 나머지 염소 한 마리도 자기가 갈 길을 올라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터와 쯔빙글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서로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염소에게서 내려가는 것이 곧 올라갈 길이 되고, 낮아지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겸손이란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섬김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겸손하게 세상의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를 섬길 때 바로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겸손하게 엎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축복을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캄보디아에 교회를 세우고 유치원을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6명의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새생명을 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헌금하였고 오늘 오후 1시부터 캄보디아 프놈펜 현지에서 길병원 심장센터 의료진들이 수술을 시작합니다. 이 일을 진행해 오면서 저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시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일이 시작된 것은 우리 포이펫영암교회에 의료선교를 갔었던 이규찬집사님 때문이었습니다. 2002년에는 단지, ‘심장이 안좋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름도 안물어보고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지난 2005년에 다시 갔을 때 덜컥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잔타입니다. 그 이후로 잔타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잔타에게 새생명을 주어 이 아이가 캄보디아 땅에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 영적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이번에 포이펫영암교회가 새로 지어지면서, 집사님은 잔타에게도 새심장이 주어지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잔타를 수술해 줄 수 있을까를 길병원 심장센터 교수님께 문의했는데, 그 교수님이 덜컥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우리가 가서 수술해 주자’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먼저 수술에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시고는, 총 수술비가 1500만원정도 들어갈 텐데, 사람은 준비되었으니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며 준비해 보자고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한분이 꿈에 나타나셨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천만원을 떡 내놓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꿈을 하나님께서 수술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준비해 주신다는 싸인으로 알고 집사님을 만나, 수술비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니 잔타의 수술을 기도하며 믿음으로 진행해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돼서 하나님은 저를 이번 심장수술의 재정담당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캄보디아에 심장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있느냐와 그 병원에서 수술비를 얼마를 받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CCC 아가페 의료선교팀을 연결해 주셨고, 그 팀을 통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파송되어 지금 캄보디아 국립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봉사하고 계신 위호성선생님을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을 통해서 캄보디아에 최근에 심장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프랑스의 도움으로 오픈되었으며, 미국 수술팀이 와서 심장수술을 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4월 20일, 길병원에서 수술실무진들이 모여 점심을 같이 하며 수술을 위해서는 누군가 한국팀의 대표가 캄보디아에 들어가서 그 병원이 정말 수술을 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보고, 또 수술비용에 대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받고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수술경비와 또 병원에서 이렇게 많은 의료진을 순순히 보내줄 지에 대한 아무런 확증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은 병원에서 보내주지 않으면 우리가 개인휴가를 내서라도 가자는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교회 당회 장로님들께서 제가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고, 그래서 4월 30일, 4박 5일의 짧은 일정으로 캄보디아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에 도착하니 밤 열두시가 다 되었는데 구견회선교사님께서 마중나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프놈펜에서 하루를 묶고, 그 다음날 아홉시간을 달려서 잔타가 있는 포이펫에 도착했습니다. 교회 헌당예배 준비를 둘러본 뒤 다음날 아침 잔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잔타의 집은 그야말로 판자집이었습니다. 그 조그마한 집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네 시에 프놈펜 병원에 잔타의 심장초음파 촬영을 예약한 상태여서 아침 여덟시에 택시를 타고 프놈펜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오는 도중 뒷 타이어가 펑크나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얼마를 달렸는데 교체한 스페어 타이어가 펑크나 완전히 찢어지고 차는 도로를 미끄러지며 전복될 뻔했습니다. 다행히 맞은 편에서 오는 차가 없어서 사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할 수없이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붙잡아 타고 프놈펜에 도착하니 오후 여섯시였습니다. 캄보디아 보사부 차관이신 프놈펜 병원장님이 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미 진료시간이 지나 잔타는 진료를 받을 수 없었고, 저는 위호성선생님과 함께 심장센터 내부와 수술실, 의료장비 등의 사진을 자세히 찍었습니다. 길병원 선생님들께 전달해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에서 기다리며 잔타의 심장초음파 동영상을 먼저 찍었습니다. 그리고 부원장님과 병원 메니저를 만나 구체적인 수술내용과 비용을 협의하여 환자 1명당 2500불에 수술하기로 구두계약을 맺고, 그날 밤 비행기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만 불에 네 명의 아이들을 수술하고, 또한 캄보디아에 가는 수술팀의 항공료의 절반이라도 제공하려는 목표로 전체 비용을 만오천불, 약 천오백만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먼저 영암교회에 수술계획을 말씀드리고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밀알심장재단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캄보디아에 심장병 수술계획이 있냐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물어봤더니 인터넷을 통해 우리 교회가 캄보디아 어린이 심장수술을 한다는 것을 알고,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밀알심장재단과 연결되게 되었고, 대표목사님을 만나 의논한 뒤 부족한 수술비 전체를 후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금액이 정확하게 천만원, 만불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깔멕병원과 협조해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들을 지속적으로 수술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연결해 주신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길병원에서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천재단 이사장님과 병원장님이 이번 일을 흔쾌히 승낙하고 선생님들 모두를 파송하며 비용은 병원에서 지불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선생님들을 일주일동안 파송하는 것은 병원 측으로는 수억원의 손실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 인천공항에서 출국하시는 팀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드릴 때, 단장님께서 ‘길병원 역사상 이런 일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들이 제 정신이면 이런 결정을 안했을텐데, 그분들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이 계획해도 결코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암교회, 길병원, 밀알심장재단, 캄보디아 병원, 그리고 위호성선생님과 현지 선교사님들이 협력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심장병 아이들을 수술해 주게 된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다음은 기도모임을 준비하며 이규찬 집사님이 동료 선생님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번 캄보디아 심장수술을 준비하면서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 일이 진행되어 가고, 또 꼬이기도 하고, 아직 풀어야 할 숙제 등을 직면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제 마음 속에 제가 "단지 심부름만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될 일도 아닌 데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랜만에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잔잔한 기쁨이 밀려와 사실 좀 피곤한 것은 있지만, 많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잔타를 5년 전에 보고서도,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고, 무심했었습니다. 당시는 심장에 소음이 심하게 들린다는 것 외에는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습니다. 진단도 못내리고 돌아왔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2005년 여름, 벌써 2년 전이나 되었네요... 포이펫에 갔다가 또 그 아이를 보고 전 심히 당혹했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가 덜컥 그 아이를 또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이름(Chanta)과 주소를 적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후 돌아와서도 또 무심하게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포이펫 영암교회 헌당에 즈음하여 이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더 커졌습니다. 그 후 ‘이 아이를 한국에 데려와서 수술을 하면 적어도 150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를 의논할 양으로 길병원 진료부장이신 박국양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럴 필요없이 우리가 가서 해주자’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저 한 아이의 생명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은 것 뿐인데... 그 후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5년이 지나서, 잔타가 13세가 되어서야, 즉 수술 후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정미진 선생님(소아심장전문의, 사모님)은 열 살이 넘은 TOF 환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는 감당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다만, 어느 기자분이 제가 주신 말씀 "그 때는 뜻이 있었고, 지금은 때가 되었네요"라는 한 말씀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제가 쓰임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은 저를 이번에 잔타와 다른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제가 가장 많이 기도해야 하겠지만, 이제는 이일에 선한 마음으로 동참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얼마 남지 않은 기간동안 함께 모여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을 제안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지만, 저를 좀 도와 주셔서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6월 29일에 저에게도 보내주셨던 편지입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이번 수술을 믿음으로 준비하며 새벽기도 모임을 가지셨습니다.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저는 모든 분들이 참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방법과 길을 열어주셔서 생명을 살리시고 영광을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겸손의 왕, 순종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16절에서 보듯이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오셨는지 그 때는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여져서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표적을 목도했던 무리들은 그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들의 계략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겸손과 순종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왕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자세는 바로 향유를 쏟아 부어드린 마리아와 같은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경배하고 헌신하고 찬송 받으셔야할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과 순종의 길이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도 겸손의 종, 순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시며 사람 앞에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시고, 사람 앞에 겸손함으로,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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