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하더라 (행 2:41)
오순절은 유월절 다음에 오는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오순절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날은 또한 '맥추절', '칠칠절', 혹은 '맥추의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날은 세계의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세 가지 연중 대절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많은 순례자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모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행 2:2,3) 임했습니다. 여기에서 바람과 불은 성령의 권능의 상징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장차 오실 이의 사역으로 예언하기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1)라고 했습니다.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지상 사역을 완성하신 '장차 오실 그이'께서 자기 백성들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첫번째 효과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큰 무리들이 매우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난 곳 방언으로'듣게 됨을 신기해 하였습니다. 방언의 역사가 최초의 기독교 오순절에 띤 형태는 분명히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언을 들은 사람들은 각각 출신 지역의 언어임을 식별했으며, 그 말의 내용을 즉시 이해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 말로 말한 주제는 하나님의 큰 일들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현상을 바라보고 의아해 하던 무리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담대하게 앞에 나아가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자 저들은 어찌 할꼬하는 회개로 이어지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선포하자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삼천이나 더하는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1907년처럼 다시 부흥하되 도하더라는 말씀대로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남으로 더합니다.
성령 강림으로 인한 변화에 대해 의아해 하는 저들에게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며 구주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동료들이 술에 취했다는 비방을 가볍게 일축한 뒤, 말세에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신을 부어 주시겠다는 예언을 상기시키고, 지금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는 중에 '그 후에'라는 표현을 '말세에'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라는 말의 자연스런 의미는 말세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간의 전기간을 말세라고 합니다.
당시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베드로가 인용하는 요엘서의 하늘과 땅의 징조들을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초림으로 시작하신 일들을 재림하실 때 완성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들은 예수님 자신을 그들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던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증거를 들어서, 다윗의 말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예언의 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한 말이며,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의 경우에 적용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자기의 원수를 발아래 복종시킬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라는 초대를 받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은 위치로 올라가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의 자리에서 이제 자기의 영을 보내셨고, 성령의 오심은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옛날에 예수 잘 믿는 한 사공이 있었습니다. 배운 것은 없지만 나룻터에서 강을 건너는 손님들을 배에 태워 정성껏 노를 저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실어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손님이 둘 뿐이었습니다. 보아하니 한 사람은 일본에서 막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유학생인 듯 싶었습니다. 멋진 사각모와 제복이 그럴듯하고, 손에든 가방과 짐들을 보니 이제 고국에서 그 배운 것을 써먹기 위해 돌아오는 듯 보였습니다.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보아하니 양반인 듯 갓에 도포에 입에 문 곰방대하며 한 눈에 봐도 진사벼슬은 한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힘을 주어 곡조가 올라가는데 양반이 '어험'기침을 하더니 노래를 막았습니다. '이보게 사공 보아하니 예수쟁이인가 본데, 힘들지 않나 노나 열심히 젓게' 사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어야 천당갑니다. 이 나라도 예수 믿어야 소망이 있습니다. 젊은 선생님도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옆에 있던 유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하는 말이 '무식한 사공이 무얼안다고, 이 나라는 하루빨리 신학문을 배워서 나라가 힘을 쌓아야 되요, 무슨 예수 따위에 소망이 있단 말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양반이 이번엔 유학생에게 말을 던졌습니다. 사공이 뭘 알겠소 그리고 보시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공맹의 도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요 요즘 젊은이들이 신학문, 신학문 하는데 우리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찌 남의 것을 알 수 있단 말이요' 유학생과 양반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신학문과 구학문 그 중의 하나가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였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닥쳐 배가 기우뚱 거리더니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은 물속에 빠졌고 헤엄을 못 하는 두 손님은 물속에서 살려 달라 허우적거렸습니다. 간신히 배를 다시 뒤집어 바로 한 후 사공은 두 사람을 구해냈습니다. 물에서 건져 나온 양반은 멋진 곰방대도 갓도 잃어버리고 정신이 나간 듯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숨을 헐떡였습니다. 학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에서 가져온 소중한 노트와 짐들 그리고 멋진 사각모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공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손님들 신학문 구학문 그것들 다 어디 쓰겠습니까?. 자신의 생명하나 못 구하면서, 헤엄이나 배워두시오'하였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예화-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 합니다.
회개함으로 더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신 사실을 선포하자 유대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예수님의 잡힘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사실을 들은 후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메시야를 죽게하는 일에 함께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눌린 무리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과 성령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3천 명이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아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을 때 그 곳에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완악하고 완고한 유대인 가운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에 베드로가 다시 일어나 그들에게 회개할 것과 세례 받을 것을 말했는데 이로 인해 그날에 얻은 결신자가 삼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는 죄 없는 '예수를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모습과는 대조적인 관습입니다. 확실히 그날에 성령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이 질문 가운데서 진하게 우리에게 풍겨 오는 것은 인간적인 좌절과 절망인 절규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더러운 자기 모습을 발견하면 이처럼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사야 선지자도 거룩한 하나님을 뵘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더러운 참모습을 발견하고'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인간적인 심연한 좌절과 함께 매우 강렬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존재이고 현재 그런 상태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는 구원의 길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소망입니다. 이는 매우 현명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인정되고 스스로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철저히 부인되는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뚜렷한 성품의 변화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즉 이제까지는 자기들의 생각만이 옳고 자기들의 뜻대로만 살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사도들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의 성품이 가득 담긴 질문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회개하는 사람은 성품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한 젊은 목사가 라디오를 통하여 전도 설교를 많이 하고 있던 베스트 목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베스트 목사님께서는 회개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설교를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스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 회개는 성경 가운데서 가장 큰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은 성경 중에 나타난 위대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거듭거듭 전파되었습니다. 그들의 전도 제목은 회개였습니다. 둘째, 회개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전도의 주제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전도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의 복음 서두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예수님의 전도하시는 모습을 소개했습니다.'(21세기 예화-회개 설교가 많은 이유)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세례를 받음으로 더 합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마음에서부터 회개하였지만 베드로는 뚜렷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촉구합니다. 즉 말로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후회는 지난날의 잘못을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지만 회개는 철저히 시정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의 뜻을 보면 '방향을 바꾸어, 옳은 길로 돌아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곧 삶의 방향의 전환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고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명했으며, 또 제자들 역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에도 이처럼 세례를 베풀고 또 세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례는 '구원의 표'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합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표와 공식적인 선언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회의와 범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으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난한 중국인이 멀리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그에게 어디서 복음을 듣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선교사의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 영파에 사는 한 가난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아편 중독자에다 매우 격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에 접하면서부터 그의 모든 생활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아편을 끊었고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바로 그를 통해 복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보지 못함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21세기 예화-들려주기보다 보여주는 복음)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신 사실을 증거하자 저들은 어찌 할꼬하는 회개를 하게 됨으로 세례를 베풀게 됩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즉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과 사귐을 갖는 새 시대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메시야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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