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한 줄로 여기라 (디모데전서 6:6-10)
지구상에는 250여 개국이 있다고 하는데, 여러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실은 신문 기사가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유럽 등 OECD에 속한 부자 나라들보다 벵글라데시, 필리핀, 아프카니스탄 등 참 가난한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가정이, 그 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상황 속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불행하게 사는 것을 때때로 발견을 하게 됩니다. 당신 가정은 지금 충분히 행복합니다, 아무리 일러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주 원인은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99마리의 내 양에도 불구하고 남이 가진 양 1마리를 빼앗아 내 양 100마리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99마리로 만족할 줄 모르고 100마리가 될 때까지 계속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내 양 100마리를 채우려다 무리를 하고, 죄를 짓고, 결국 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현재 생활이 족한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수를 지켜 스스로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족한 줄로 여기라는, 지족(知足)이란 현재의 내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 상황을 바로 알고, 그 가운데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고 바쁘게 사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행복은 없어지고 복잡하고 바쁜 것만 남았습니다. 생각으로는 나는 행복하기 위해 복잡하고 바쁘다고 하지만, 실제 생활은 행복과는 상관없이 복잡하고 바쁘기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행복을 행복으로 누릴 줄 아는 지족, 족한 줄로 여기는 생활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은 많은 경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상대평가로 비교하는데 있습니다. 상대평가에는 우열이 드러납니다. 내가 누구보다는 낫지만 다른 누구보다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할 줄을 모릅니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그 행복을 누릴 줄을 몰라 불행하게 삽니다. 실제로 베풀며 살아도 충분한 재물을 쌓아 놓고도 벌벌 떨면서 핏기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족할 줄 아는 사람은 항상 자기 스스로를 절대평가 합니다. 그 누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만한 게 어디야, 이만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이만한 축복이 어디 있어, 하는 충만한 기쁨을 스스로 느낍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주시고, 굶지 않고 살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과 좋은 친구를 주시고, 최고는 아니지만 최고를 향해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열심을 주신 것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족한 줄로 여기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이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찬송 489장의 찬송이 그렇지 않습니까? 받은 복을 세워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우리는 매일매일 내가 받은 복을 세워 볼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그렇게 바람직하게 사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가야하는 인생입니다. 한자로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요, 스페인의 격언으로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다미엔 신부를 기억합니다. 이 분은 평생 외딴 섬에서 한센씨병, 나병환자들을 위해 살다가 자신도 문둥병환자가 된 분입니다. 이 분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 “오 주여, 나의 모든 것을 것을 주님을 위하여 바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던 것처럼 내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 바치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주님께 돌아가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왔다가 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야 하는 인생임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1. 우리가 가진 것에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줄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진 것에 족한 줄 아는 마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만족하면서 감사할 때 우리 마음속에 참된 행복이 깃들 수가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이런 유명한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중한 병에 걸렸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를 않습니다. 한 예언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임금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 그의 속옷을 입혀드리면 된다.”
신하들이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행복한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형편이 괜챦은 사람은 몸이 약합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자녀가 속을 썩힙니다, 등등 누구나가 다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루는 한 신하가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젊은 목동 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면서 기분 좋게 옵니다. 양떼를 거느리고 오는데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어깨는 들썩들썩하고, 발걸음이 경쾌합니다.
그래서 신하는 이 목동의 뒤를 따라갑니다. 젊은이가 오두막에 들어갑니다.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소리가 창 밖으로 새어나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거리가 충분했습니다. 오늘도 배불리 먹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하루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다, 바로 이 사람이다, 신하는 이렇게 생각하고 젊은 목동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다 말했습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할테니까, 당신의 속옷을 벗어 나에게 주어 임금님의 병을 고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목동이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난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속옷이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 젊은 목동은 너무도 가난해서 속옷을 입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행복은 물질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감사하고 만족할 때 우리 마음속에 참 행복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천국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우리 평강과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자족하기를 배울 때에 우리 마음에 참된 행복이 깃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2. 억지로 부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해지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경고하는 말씀은 억지로 부해지려고 하는 자에 대한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의 시험과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이 일어납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과 사기로 부해지려는 사람, 남의 가슴에 못질해서 부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심판 날에는 다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 텔레비전 뉴스의 시작은 주로 권력형 비리에 대한 뉴스입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많은 국회의원들이 비리에 연루되어서 줄줄이 감옥에 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흔히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하다가 우리 사회가 더 어렵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정치하는 사람은 부정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서 결국 부정적인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염려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정치하는 사람, 청렴결백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국회의원도 좀 매스컴에서 부각시켜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한편 어둡고 화가 치미는 우울한 소식이지만, 이런 과거의 비리를 들쳐 내어야 우리 사회가 정화가 되고 앞으로 바르게 세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과 사회 분위기를 통해서, 참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 성공하고, 정당하게 일하는 사람이 축복받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이 물질,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스웨덴 국적의 해 한척이 침몰되었습니다. 안개 속에서 항해하다가 다른 선박과 충돌한 것입니다. 이 배는 30분 만에 완전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배에는 모두 206명이 타고 있었는데, 34명만 구조를 받고 나머지 172명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전해 준 말을 들으니 왜 172명이란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가? 그 사람들은 물질이 아까워서 주머니에 금은보화를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띠를 만들어 금은보화를 다 챙겼습니다. 그리고 물에 뛰어드니 오래 떠있지 못하고 구조대가 오기 전에 다 물에 빠져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빈 몸으로 뛰어든 사람은 구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34명만 구조 받은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기독교 신문사에서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작년 교회 예산과 올해 교회 예산을 비교해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님들이 작년보다 올해 헌금을 7.5% 더 해 주실 것으로 예산을 편성했고, 선교 교육 사회봉사비 지출을 늘렸다고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교회들이 예산을 줄이고 있는데, 늘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만, 당연히 작년보다는 올해가 향상과 진보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 특별히 선교 교육 봉사분야에 조금씩 더 예산 비율을 늘려 나가는게 마땅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는 교회, 베푸는 교회, 나누는 교회로 세워 나가는 것이 족한 줄로 여기는 행복한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하나라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물질 등등을 언제, 누구를 위해, 얼마나 값지게 사용했는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 했는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이 윤구 박사의 대한적십자 총재 축하식이 있었습니다.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신년인사 말씀을 부탁드렸더니 이 총재는 이런 말씀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저는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는 인사를 가급적 안 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무슨 복을 더 받겠다고 욕심을 부립니까? 이미 받은 복을 나누며 살기로 저는 작정했고, 또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적십자 총재의 중책을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진정 이미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은혜와 축복을 나누며 사는 사람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일 줄 믿습니다. 족한 줄로 여기라, 오늘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성도 여러분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임대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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