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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좋은 일 (막14:3-9)

by 【고동엽】 2022. 8. 30.

 주님께 좋은 일  (막14:3-9)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1-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10-11절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돈을 받기로 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줄지를 그들과 의논하고 그 기회를 찾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그와 정반대되는, 그리고 그 음모의 결과에 대비한 한 아름다운 일이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3km 동쪽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들어있던 나드 향유를 몽땅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옥합은 아주 값비싼 향유만을 담는 용기입니다.  옥합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드 향유란 인도가 원산지인 뿌리식물로부터 추출한 진귀한 향유입니다.  목이 긴 옥합을 기울여서 향유를 붓지 않고 옥합을 아예 깨뜨렸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 향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쏟아 부으려는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 5절은 그 향유의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이 되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근로자 한 사람의 하루 인건비에 해당하는 것으로 4명 기준의 한 식구가 하루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300데나리온 이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안식일을 빼고 1년 내내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한 가정의 1년 생활비와 맞먹는 돈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누이이고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는 이 여인의 행위가 그것을 지켜본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낭비로 비쳐졌습니다.  그래서, 4-5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하고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인을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유월절을 앞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 저녁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긴 유월절 등 큰 명절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소에 힘껏 예물을 가지고 나아와 모든 사람이 골고루 즐기게 하는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규례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 가정을 1년간 먹여 살릴 수 있을 재물을 한 순간에 탕진해버린다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위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 대한 제자들의 분노와 비난을 저지하셨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제시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유월절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겉으로만 그랬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가룟 유다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월절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재정담당자인 그가 해결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300데나리온 이상 되는 재물을 순식간에 없애버리는 여인의 행위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12:4-5에서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한 제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6)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율법을 들추고 관습을 들먹거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부정하게 자기의 탐욕을 채울 일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께로 나아오며 마리아가 가져온 값진 순 나드 향유 옥합은 또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터인데 그것을 깨뜨리고 다 쏟아버리니 유다에게는 너무나 아깝고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 주님께 좋은 일은 전혀 그의 심중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 앞에 오로지 주님만 생각하는 한 여인이 등장해서 주님께 좋은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여인의 행위를 당신에게 좋은 일로 여기신 것이겠습니까?  그저 그 비싼 향유를 주님께 아끼지 않고 쏟아 부었다는 것 때문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 수백, 수천 명보다 당신이 더 존귀한 존재라는 자존심을 그 여인의 행위가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7-8절의 말씀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말씀 중에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과 \"그는 ...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그 예고를 바로 이해하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며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제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높은 자리, 큰 자리, 예수님의 좌우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온 관심을 쏟고 있었고 가룟 유다는 돈 챙길 일만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정말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생각하거나 행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그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었고 그의 죽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 여인에게 있어서 주님에게 그까짓 순 나드 향유 한 옥합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주님은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가장 수치스러운 형틀인 십자가에 매달고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던질 것이지만 이 여인은 그 몸이 이 세상의 제 아무리 비싼 향유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신 주님의 몸임을 온 천하에 알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에 대한 그 믿음과 사랑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그것은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보다 우선하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 그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안다면 그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기에 그 여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이해했기에 언제나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역사에 단 한 번뿐인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은 행위는 이 세상에서, 아니 온 역사 속에,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보다 우리에게 더 귀하고 중요하고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선언한 일입니다.  9절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 또한 이런 뜻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여기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여인의 행위야말로 복음의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여인의 그 행위, 그것은 곧 복음의 신비를 드러낸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그 장례를 미리 준비한 그 여인의 행위는 곧 복음의 선포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행위는 주님께 좋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율법준수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관심에 사로잡혀 막상 주님께 좋은 일들은 잊고 지내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삶의 가치순위를 혼동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돈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흥분하면서 주님께서 저지하시고 책망하실 일에는 열중하는 우리는 아닌지 곰곰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 좋고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열심히 힘쓰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향유 옥합을 아낄 때와 깰 때를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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