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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선교 비전, 땅 끝까지

by 【고동엽】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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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277쪽에 있는 글입니다.

 

 

49. 선교 비전, 땅 끝까지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로마서 15장 22-29절

 

 

 

 

흔히들 기독교를 일컬어서 비전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탄생시키신 성령 하나님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믿는 자에게는 꿈을 주고 환상을 보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확실히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여기에 나오는 예언, 환상, 꿈 이 세 가지를 합한 것이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전에 대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즉 온 세계를 복음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 끝까지 선교해야 한다는 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성령의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증인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 꿈의 종교, 비전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 있어서 가장 모범을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비전을 가슴에 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서 한 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선교지로 향하여 나설 때는 소아시아를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그 지역에서 약 20년 가까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그 정도면 그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그는 로마에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린 후에도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듣고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 사실이 다음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23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28절).

 

 바울의 관심은 로마를 지나서 서바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서바나는 스페인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스페인 반도 전체를 서바나라고 일컬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스페인을 문명 세계의 끝으로 보았습니다. 스페인에 가는 것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변방까지 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바나로 가려고 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그의 선교 열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들고 가겠다고 하는 그의 뜨거운 열정이 '서바나'라는 한마디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이 스페인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사실이니까요. 바울은 선교 도중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가 결국에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영국까지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비전이 일생 동안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부름받은 소명자다

 

 우리는 바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라는 직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헌신했던 복음 증거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땅 끝까지 증인 되게 하시는 성령을 우리가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과 같은 꿈의 사람이요 환상의 사람이요, 비전의 사람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땅 끝까지 보냄을 받은 소명자요, 사도의 계승자인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는 세계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꿈을 가져야 하고 환상을 그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지역 사회에 복음 전하는 일에만 마음이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 사회를 복음화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 작업인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이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능한 선교사들을 계속 발굴해서 파송해야 합니다. 돈을 쓰고 싶은 데가 많더라도 절약해서 선교비로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만 이 일을 하고 그만두면 안 됩니다. 다음 세대에 가서 더 큰 하나님의 일을 이루도록 우리 어린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또한 교회 교역자와 평신도 가운데서 단기 선교사나 장기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분들을 교회가 많이 발굴해서 파송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자기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선교하기를 워하는 자비량 선교사들을 많이 내보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는 대략 285,250명의 장기 선교사와 18만여 명의 단기 선교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선교사 가족이 다 포함된 숫자입니다. 그리고 교포 교회를 위해서 사역하는 준선교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1만 2,000개나 되는 부족과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정확하게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구가 세계 전체 인구 중에서 절반이 넘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 믿지 못하고 하루에 약 5만 5,000명씩 죽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4,000개의 모슬렘 그룹과 2,000개의 힌두 그룹, 1,000개의 중국인 그룹, 1,000개의 불교 그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도를 펴 놓고 이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로 10/40 창이라고 합니다. 창문처럼 길쭉하게 열려 있는 지역에 그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가난을 못 면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의 80%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아직도 지구상에서 예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십 억이 복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앞에 놓고 이천 년대가 되기 전에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21세기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는 약 250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6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수치도 교포 교회까지 합산하면 규모가 더 커집니다. 교포 교회는 뉴욕 지역만 해도 500개 내지 600개가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가서 사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우리 민족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은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종족에게도 그런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 21세기 운동본부는 "2,000년까지 지역마다 교회를, 사람마다 복음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금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한국 교회가 앞장선다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21세기 마지막 선교 사역을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사실입니다. 영국의 한 선교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럽의 선교 상황은 밤 9시가 지났고 미국은 오후 2시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아침 7시를 맞고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큰 과업을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맡기시려고 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힘을 합해서, 다시 말하면 전 세계 250만 개의 교회가 힘을 합해서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려고만 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개 교회가 한 부족만 맡더라도 1만 2,000부족을 다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후 1세기에는 교회 수가 매우 적었습니다. 1세기 교회 수를 놓고 계산을 하면 한 교회가 열두 부족을 감당해야 할 만큼 그것은 막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많은 교회가 있기 때문에 200개 교회가 단합해서 한 부족만 맡아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 우리 앞에 크게 펼쳐져 있습니다. 땅 끝까지의 비전은 바울만의 비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비전입니다. 바울처럼 로마를, 스페인을 가슴에 품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힌두교, 회교권 1만 2,000개 부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 그리고 동구권, 공산권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꼭 이루기를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빚을 기억하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로마로 가려고 했지만 그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루고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25,26절).

 

 이어서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하고 나옵니다. 바울이 로마를 경유하여 스페인까지 가려고 선교 여행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 반대 방향인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에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심하게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가문에서 쫓겨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교인들 대부분이 극심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그 가난한 중에서도 정성껏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울에게 맡겨서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갑자기 여행 계획을 바꾸어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 선교 비전이 대단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일이라 할지라도 주변의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구제하는 일, 어려운 자의 고통을 함께 지는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하지 않고 선교하자고 외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바울이 가르쳐 줍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에 열심을 다합니다만 구제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훈이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을 통해 예수 믿게 된 이방인 성도들은 자기들의 생활도 매우 궁색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돈을 모아 구제비를 마련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돈을 모아 구제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신령한 것과 육신의 것, 이 두 개가 대칭이 되어 나옵니다. 신령한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축복을 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죄 사함받고 영생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이방인들이 이 큰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된 것은 유대인들이 전해 준 복음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 민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유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열두 사도들이 전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파송하고 나서 뒤에서 기도해 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인들이요,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신령한 일에 빚을 많이 졌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대인 성도를 육신의 것으로 도와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비교될 만한 가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참 중요한 교훈을 하나 배우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특히 영국, 미국 교회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그것은 하도 먼 옛날의 일이라 빚을 졌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여 년 전에 진 빚입니다. 신령한 빚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변에서 순교당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온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그들 덕분에 우리나라에 복음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숨이 막혀서 살 수 없을 정도로 폐쇄되어 있던 구한말 시대에 주님이 그들을 우리나라에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에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얼마나 많이 헌금을 했는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값을 따질 수 없는 신령한 빚을 졌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이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영국 교회에 갚을 수도 있지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영혼들을 위해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 귀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선교사 한 가족이 나가서 선교를 하려고 하면 월 평균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이것도 알아야 됩니다. 물론 처녀 총각의 몸으로 나가서 2,3년 선교사 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단기 선교사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오엠(OM) 단기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을 보면 최하 300달러에서 500달러 정도가 매달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달리 쓰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선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액수로도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데리고 평생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가는 선교사 한 가정을 우리가 도우려면 최하 1,500달러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특별 사역비가 제외된 금액입니다. 이주 미개한 오지나 후진국에서는 그 정도면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 동구권 같은 데서는 1,500달러 정도로는 형편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돈으로는 최하위 생활을 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선교사 한 가정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년에 5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교 특별 활동비를 포함하면 두 배, 세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없으면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선교 학자는 극단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교사를 안 보내고 돈만 보내도 선교는 됩니다. 그만큼 선교에 돈이 중요합니다."

 지난 200~300년의 선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대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선교를 주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세계 선교를 주도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때는 영국이 최강국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영국이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로 허드슨 테일러나 아프리카의 영웅인 리빙스턴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맡은 나라에 경제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돈이 없으면 선교를 못하니까요.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선교 바통을 미국이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미국이 선교 주도국의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가장 잘사는 나라니까 그런 것입니다. 가난뱅이 나라는 선교를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미국의 예를 봅시다.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5%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도처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40%를 그들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70퍼센트를 그들이 사용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교회가 내놓은 선교비, 구제비의 80%를 미국 교회가 부담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이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짚신을 신고 다니던 이 백성을 이렇게 팔자 좋게 뉴 브랜드의 구두를 신고 다니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과거에는 옷 한 벌 가지고 여러 해를 사는 단벌 신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하셨을까요?

 한번 영적으로 분별해 봅시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령한 것에 빚을 진 사람들이니까 물질적인 것으로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갚는 방법은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계 도처의 사람들을 위해서 선교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한국 교회를 들어 세계 선교를 하시려고 한다면 분명히 우리 한국에 물질적인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투자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정당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습니다. 돈이 잘 안 들어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는 세계 선교의 꿈을 갖고 있습니다. 돈 좀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돈 많이 쌓아놓고 보람 있게 쓸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권면을 들으십시오. 세계 복음화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는 돈이 너무 많아 어떻게 쓸지 몰라서 고민하는 분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몇 억씩이나 된다고 하면 어떻게 쓸까 하고 고민이 되지 않겠습니까? 흥청망청 쓰고 써도 별로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수십 벌 해 놓고 입어도 한두 번씩만 갈아입고 나면 그 다음에는 김이 빠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이 많지만 제가 볼 때 돈이 많아 고민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돈 가진 갑부나 재벌을 10명만 전도하면 세계 선교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은 삭개오처럼 주님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것입니다.

 돈이라고 다 가치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값으로 10만 원을 쓰는 것과 지금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 10만 원을 쓰는 것은 다릅니다. 가장 보람 있게 돈을 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데 쓰는 것입니다. 가장 보람 있게 돈을 투자하는 비결은 영원히 망하게 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버느라고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습니까? 얼마나 잠 못자고 고생했습니까? 얼마나 긴장하며 하루 종일 뛰어다녔습니까? 그렇게 번 돈이라면 값없이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액면 가치보다 열 배, 백 배, 천 배로 올려서 써야 합니다. 똑같은 10만 원짜리지만 그 가치를 백만 원, 천만 원, 일억이 되도록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일에 내놓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재산을 모았습니까? 그만큼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벌 때는 그렇게 벌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가치 있게 써야 합니다. 어떻게 가치 있게 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비록 여유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씀씀이를 조금만 줄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 살리는 일에 일익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면에서도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자신의 씀씀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흥청망청 쓰고 남는 돈을 가지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쓰겠다는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넘치고 남아서 선교 헌금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어딘가 아껴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해서 선교비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에 빚을 졌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으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천국에 들어오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몹시 괘씸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만 가득 찬 천국이라면 저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고, 네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도 그분에게는 중요하지만 온 세계의 모든 민족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려야 합니다. 아마존 강변에서 벌거벗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가 너를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왕자로 바꾸어 놓겠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촌에서 병과 씨름하는 극빈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만 하면 그들을 천국에서 자랑할 수 있는 왕자, 공주로 만들어 놓겠다고 하는 것이 주님의 소원입니다. 창녀도 좋습니다. 마약중독자도 좋습니다. 밤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도 좋습니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도 좋습니다. 부자도 좋습니다. 가난한 자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다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도 좋습니다. 황인종도 좋습니다. 백인종도 좋습니다. 다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득 채우고 우리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요 비전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꿈이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슴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이 꿈을 가지고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늘 마음을 씁니다.

 우리가 비록 아프리카에 가지 못하고 방글라데시에 가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보냄을 받은 선교사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일생을 바칠 수 없지만 정성을 다해 얼마라도 헌금해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힘쓸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세계를 복음화시키고자 하는 뜨거운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가정에 있는 믿지 아니하는 자를 보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 이웃에 있는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세계 선교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을 복음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열심이 없는 사람이 방글라데시를, 인도를 복음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계 선교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가까운 예루살렘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이 무엇인지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 비전을 분명히 알았다면 기도로, 물질로, 시간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선교를 위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물질을 바치는 형제 자매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선교사들을 위해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해 주는 형제 자매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세계 도처에서 죽은 자들이 군대처럼 일어나는 기적이 연일연야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영적 부흥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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