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선행을 서로 배우라 (이사야 1:15-20)

by 【고동엽】 2022. 8. 30.

선행을 서로 배우라   (이사야 1:15-20)


요즘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총체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총체적인 불황, 총체적인 위기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스트레스’라는 말입니다. 외래어지만 우리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말만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대사회는 스트레스 구조가 충일한 그런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스트레스 현상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유가 없고 안정이 없는 모습, 무엇엔가 억눌려 있고 부자유하게 얽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 초초, 안정감을 잃어버린 스트레스성 현상이 우리사회 곳곳마다 있습니다. 그래서 총체적인 스트레스 현상이 걷잡을 수 없는 많은 우발적인 사고를 일으킵니다. 정신병자의 발작증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현상처럼 우리사회는 곳곳에 발작증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성 사회현상이라고 비판합니다.

   총체적 타락

   오늘 성경말씀 이사야 1장 5-6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머리가 병들었다.” 생각이 병들고 지식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너희 온 마음은 피곤하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다.”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다, 너희 생각이 병들었고, 마음이 병들었고, 손발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다 병들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10절 이하부터는 아주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11-16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내 마음이 너희의 정한 월삭과 절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거부합니다. 너희들이 지금 영적으로 생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너희들의 행위가 병들어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예배하지 말라, 재물을 드리지 말라, 기도를 드리지 말라는 아주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두 가지 뜻입니다. 손은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손으로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불신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피 묻은 손을 들지 말라.” 불신앙을 저지르면서 내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손에 피가 묻었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이웃을 향한 문제를 말합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을 해롭게 한 그 모든 손에 피가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체적 타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단호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앞에 나아올 자격이 없다, 재물을 드리지 말라, 너희들이 가지고 오는 재물 받기에 내가 피곤하다,오히려 짐이 된다, 너희들은 성전 마당만 밟고 갈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씻으며 버리라

   그렇게 탄식을 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해결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16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씻고 버리라, 스스로 씻으라, 악업을 버리라, 하나님 앞에 악행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씻고 버리라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더러운 것을 씻으라. 그리고 악업을 버리라.” 악한 행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회개입니다. “스스로 씻으라.” 스스로 깨끗케 하라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을 우리가 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지만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은 죄인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대행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지 집의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을 고쳐서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특히 악을 버리는 일,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일을 청산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시기와 질투, 교만, 의심, 낙심, 걱정,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스스로 씻어야 합니다.
   제가 어느 지방에 가서 집회를 할 때 한 성도가 이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아직 술 담배를 못 끊고 있는데 이것을 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성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기도는 앞으로 부탁하지 말고 이런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목사님, 제가 술 담배를 끊었습니다. 앞으로 다시 안 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은 본인이 결심하고 끊어야 할 본인의 몫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불신앙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각오해야 합니다.
   왜 못 버립니까? 왜 청산 못합니까?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손해를 볼 각오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버린다는 것은 손해를 보면서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명예의 손상이 오더라도 회개할 것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내 직분을 사임할지라도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살아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가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우리가 체면 세우려 하고, 쥐꼬리 같은 자존심을 붙잡고 있다가 회개하지 못하고 버릴 것은 안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결심하고 청산해야 합니다. 손해 보더라도 청산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길입니다.

   선행을 배우라

   두 번째,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에서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배우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6절은 버리라는 것이고 17절은 선행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16절은 버릴 것은 버리고 17절은 할 것은 하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라.” 배운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내가 남의 선한 일 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뜻도 되고, 내가 선한 일 할 때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 선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도 배우게 하고, 남이 선한 일 하는 것을 무관심하게 보지 말고 나도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선행의 내용이 두 가지로 나왔습니다. “공의를 구하며”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기준입니다.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 이것은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의를 이루어 드리는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선행은 교훈이 따라야 진정한 선행입니다.
   뉴욕의 전 시장을 지냈던 라과디아는 시장되기 전에 판사로서 일을 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 가난한 거지 노인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 먹다가 잡혀서 즉심에 넘어왔습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거지 노인에게 아주 엄한 선고를 내렸습니다. 벌금 10불을 선고했습니다. 거지 노인에게 벌금 10불을 선고한다는 것은 굉장한 중벌입니다. 방청객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노인이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벌금입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선고 후에 자기 주머니를 뒤져서 10불을 주면서 “이것으로 벌금을 내시오. 내가 당신처럼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산 내 죄의 값이 10불이요.”라고 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은 우리 주변에 저런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무지입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선한 일은 행할 줄 알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니라”고 규정했습니다. 무관심이고 무지입니다. 요한삼서 11절에 “선한 것을 본받으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5절 “항상 선을 좇으라.” 디모데전서 6장 18절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에 무지하고, 선을 행하는 기회가 우리에게 항상 열려 있는데도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라.” 여기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회개의 몫입니다. 우리는 영적무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받아야 큰 은혜가 아닙니다. 크게 깨달을 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적게 깨닫는 자는 적은 것입니다.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은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지의 극복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영적인 무지를 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바로 알고 있고, 나는 바로 믿고 있고,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의를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언젠가 저에게 자칭 전과5범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나를 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목사님께서 영등포구치소의 종교위원이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는 손 씻고 바로 살아야 하는데 할 것이 없습니다. 어디 자리하나 잡고 포장마차를 할까 하는데 돈이 제법 듭니다. 목사님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사실 이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사람이 요구하는 백만원의 돈도 없고, 그 사람에게 약속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난색을 표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목청을 높여 제게 설교를 합니다. “목사님 보십시오!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과 실제와 다르지 않습니까?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가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자기 스토리를 이야기 합니다. “나는 부모에게 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고아원에서 학대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 전에는 제가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없었는데 한참 소리를 들어보니 제가 할 말이 잡혔습니다. 할 말 다했으면 내 말을 5분만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을 당신이 깨닫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당신이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고아원에서 중학교까지 공부한 것을 생각해 보라. 자식을 키우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부모가 한다. 그런데 당신과는 상관없는 고아원 원장이 고아원 보모들이 당신을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당신은 사회가 당신을 버렸다고 하는데 당신이 중학교까지 공부했던 교육비가 국가에서 나온 것이다. 당신은 지금 남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인줄 모르고 있다. 당신이 받은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수고하고, 희생하고, 국가가 당신을 중학교까지 공부하도록 교육비까지 지원해 주었는데 당신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모든 것이 불만이면 당신은 희망이 없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내게 찾아와서 이런 소리하는 것 이제는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게 오는 사람 밥 먹을 때가 되면 갈비탕은 사주니까 앞 식당에서 갈비탕을 사 먹고 가라고 달래서 보냈습니다.

   생각을 바꾸라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딱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자기의 불만을 거꾸로 보면 모두가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버림받았다는 그 말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잘 적응하면 고등학교까지 보내줍니다. 오늘 우리들이 영적인 무지를 안고 그것이 마치 바로 되어 있는 것처럼 습관화되어 있으면 문제입니다. 선행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남에게 모범이 되고, 남들이 선행을 하거든 그것을 본받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선행을 보여도 무감각하고 내 앞에 선한 일을 할 기회가 펼쳐졌는데도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선한 일을 한 사람의 모범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제사장들은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이 다가가서 기름을 발라주고 포도주를 발라주었습니다.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먹여주고 여비까지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이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현대말로 풍자한 글이 있습니다. “요즘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우리 사회가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방송국에서 달려와서 특종이라고 보도할 것이다. 경찰에서는 찾아와서 경찰서로 데려가서 조사할 것이다. 당신은 강도만난 그 사람의 현장을 훼손했다. 먼저 경찰을 불러야 하고 사진도 찍고 증거를 남겨야 하는데 왜 멋대로 해서 강도 잡는데 방해하느냐? 일부에서는 저 친구는 정말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매스컴을 타려고 했다. 자기 과시하려고 선한 일을 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풍토가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고 풍자한 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칭찬받고 상 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 그것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다 박수쳐 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시기하는 사탄의 충동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나의 선한 일을 비난할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십시오. 그것이 겁난다고 선한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도 낙심할 수밖에 없는 비난이 올 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는 말씀에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불황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하다가 불황을 맞았습니까? 또 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 위기를 맞았습니까? 실제로 위기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왜 위기가 왔는지 따져볼 때 그 안에 선이 없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위기를 맞았다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무엇하다가 위기가 왔습니까? 자기 욕심을 채우려다가 위기가 왔습니다. 자기 하나 잘 살려고 발버둥치려다가 위기가 왔습니다. 그렇게 예수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복 받기를 원했는데 왜 위기가 왔는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믿음으로 충성한 흔적 때문에 위기가 왔다면 하나님께서 백 배, 만 배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를 따져보면 곁길로 가다가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하다가 위기를 만난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을 회개하고 무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너희들의 총체적 타락은 안 된다. 너희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앞에서 와서 회개하라, 변론하라, 악업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 KBS1의 ‘현대사회를 말한다’는 기획프로그램에서 “한국교회 과연 위기인가?”를 특집방송 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심층적, 종합적, 역사적으로 아주 심도 있게 비교적 건전한 입장에서 다루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해석을 붙인다면 한국교회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런데 교회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전부 사람들이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관찰입니다.

   칭송받는 선행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지금 다 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이 하고 있습니까? 학자들 여러 사람이 여러 번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중대한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담임목사들이 너무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세습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미국에도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를 아들이 섬기는 사례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그들은 충분히 협의하고 전 교인들의 의견을 다 받아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이 있는데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담임목사의 의견이 벌써 50%이상을 점령하고, 소수의 의견이 전체를 지배하는 비민주적인 교회행정 속에 온갖 일들이 다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모습은 사회 앞에 비추어볼 때 교회 안에는 사람소리, 돈 소리가 너무 큽니다. 한국교회는 돈 소리 때문에 사회 앞에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내가 순종해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흔적이 없다면 내가 지금 인위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생활, 가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 살다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위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위기, 사회의 위기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위기가 왔습니다. 성도들도 주를 위해 위기를 맞은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기를 치장하다가 신앙의 위기가 오고 있는데도 이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에게 배울 거리가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바로 하거든 배우십시오. 무관심하게, 배타적으로, 편협하게 보지 말고 남들이 선행을 하거든 그것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선행을 배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선행이 함께 역사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당시 교회가 열심히 전도했는데 전도의 배후를 보면 재산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서로 통용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선행입니다. 교회가 백성들에 선을 베푸니까 온 백성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 안에서만 잔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은혜, 하나님 사랑을 말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받은 사랑, 은혜를 전부 교회 밖으로 보내야 복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선행에 전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행은 본받으려 하지 않고 복음이 증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것은 ‘밥솥에 쌀을 넣지 않고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넘치는 구제가 있었고, 뜨거운 전도의 열정을 함께 했습니다. 그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선행이라는 것을 도덕적 개념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선행은 아주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행을 영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 “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선하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십니까?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은 그 분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본래부터 의로운 분입니다. 그분은 본래부터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분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 선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성도의 선행의 영적인 개념은 독생자를 나의 구주로 믿어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이 영적으로 선행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이고, 그 독생자를 나의 주로 믿고 내가 구원에 이르는 그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선행이라고 합니다. 그 선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적 선을 함께 강조합니다.

   맺는 말

   선행은 영적으로는 복음이요 전도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선이라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선행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행이고 우리 안에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선행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악업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릴 줄 알기  바랍니다. 결심하고 버려야 합니다. 손해를 각오하고 버려야 합니다. 내 몫을 다 챙기고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망가질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손을 보십니다. 그리고 남의 선행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의 선행이 남에게 모범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