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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by 【고동엽】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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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257쪽에 있는 글입니다.

 

 

48.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장 19-21절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바울이 놀라운 말 한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9절).

 

 이 말씀 중에서 '편만하게 전하였다'는 말은 가득히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바울 혼자서 복음을 가득하게 채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좀 과장된 이야기로 들리기 쉽습니다.

 언젠가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나온 어떤 분이 이런 공약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당선이 되면 아파트 분양가를 반으로 낮추어 공급하겠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우리는 대충 감안해서 듣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공약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겠다는 의지로 좋게 봐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이처럼 적당히 알아서 해석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우리 귀에 과장된 말씀처럼 들려도 그것이 과장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 바울에게 영감을 주시고, 단어 하나도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하고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는 거리상으로 따져 보면 약 2,000km가 넘습니다. 세계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그 영역이 어느 정도인가를 금방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이 우리에게 과장된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바울 혼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유고슬라비아까지 그 넓은 지역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했다는 말입니까? 약간 부풀려서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의 말이 사실 그대로라면 우리는 그 위대한 사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높이 받들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점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을 가득하게 채웠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출발한 곳은 안디옥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2장 17~21절의 말씀이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17~21).

 

 이 말씀에서 보다시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아, 너는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 네가 여기서 나의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네 말을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떠나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리라."

 그는 환상 중에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바울이 애초에 예루살렘에서 선교를 하려고 시도했고 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강력하게 막으셨습니다.

 "너 여기서 선교해 봐야 열매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빨리 떠나라. 내가 할 일은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가득히 채웠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말이 결코 과장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

 

 그 다음으로 바울이 일루리곤에 가서 복음을 전할 일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일루리곤은 지금의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지역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그 지역에 가서 선교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기껏해야 지금의 그리스가 있는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북쪽에 있는 유고슬라비아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가득히 채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선교 전략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군사 용어로 말하면 고지를 점령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는 각 지역마다 고지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심이 되고 또 교통망을 따져 보아도 요충지가 될만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도시에 복음을 전하면 자연스럽게 주변 지역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중요한 도시마다 건너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면 그가 중요한 도시마다 복음을 가지고 공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이 그랬고, 에베소가 그랬고, 빌립보가 그랬고, 고린도가 그랬고, 아테네가 그랬습니다. 나중에는 로마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그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어떻게 그 지역을 복음으로 가득히 채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를테면 바울이 어느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믿는 사람이 여러 명 생깁니다. 그러면 자연히 교회가 시작됩니다. 믿는 자가 여러 명 생기면서 교회가 개척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얼마 동안 있으면서 처음 예수 믿고 돌아온 형제들을 양육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특별히 은혜받고 지도자적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세워서 교회 장로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도시로 떠납니다.

 바울은 도시 외곽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도시 주변에 있는 지역은 누가 담당했습니까?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개척 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웃 지역에 장사를 하러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이웃 사람을 만나러 가서도 복음을 전하는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미처 발을 들여놓지 못한 이웃 지방뿐만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살로니가 주변에 있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주변에 있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온 주변이 복음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일일이 동네마다 빠짐없이 다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다 전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되었나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지나간 지역은 그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에 의해서 마치 누룩이 밀 반죽에 퍼지듯이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들고 한 번 다녀간 지역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지금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된 줄 어세요?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또 놀라운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얼마나 기막힌 말씀입니까?

 그는 나중에 로마에 가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순교하고 나서 채 백 년도 되기 전에 로마제국 방방곡곡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복음이 가득 찼습니다. 바울이 살아 있을 때만 아니라 그가 떠난 다음에 복음이 더 힘있게 증거되었습니다. 로마제국 전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터툴리안 같은 유명한 교부가 로마제국의 황제와 지도자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보라, 너희들이 제사하는 신전을 빼놓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는가 한번 보라. 너희들이 제사하는 신전을 빼놓고 예수의 이름이 증거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는가 말해 보라."

 얼마나 그 자세가 당당합니까? 그만큼 사도 바울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시 소아시아와 또 이탈리아 반도 전역은 예수의 복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의 말이 절대로 과장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하나쯤' 하는 생각

 

 바울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통해 일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좋아하시는 방법은 자기 마음에 꼭 드는 한 사람을 통해 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얼마나 큰 일을 하셨습니까? 바울 하나가 예수님의 마음에 들자 보잘것없어 보이던 그 한 사람이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하나쯤은 전도 안 해도 괜찮아.' 이런 생각은 절대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하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바울의 말이 절대 과장도 아니요 거짓말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울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도전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특별한 소명을 받았고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비록 사도나 선교사가 아니라 해도 전도하는 일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는 물론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사도였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막중한 의무를 가진 사도였습니다. 그는 심는 자였지 물 주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곳을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20절).

 

 그는 다른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한 곳에 가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복음이 전혀 전파되지 아니한 곳에 가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해 준 복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자마자 가만히 있지 않고 그가 발을 들여놓지 못한 주변 지역을 다니면서 그 지역을 복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제 주변에 다니면서 우리 입으로 이 복음을 증거해야 될 막중한 소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가장 부흥한 나라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 수만 해도 6만이 넘고 교회에 등록한 교인만 해도 공식적으로 1,200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 국민의 25%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농어촌, 산간벽지, 낙도 어디에서나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75%의 사람들이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복음이 편만하도록 만들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울인가요? 아닙니다. 그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 아직 예수를 모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은 먼저 믿은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여러분의 직장 동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엔 예수의 이름이 없습니다. 새생명의 기쁜 소식을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누가 가서 채울 것입니까? 누가 가서 전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어떤 전략에 의해서 복음을 가득하게 채울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자기는 도시를 공격하고 교인들은 지방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전략이 맞아 떨어져서 그의 선교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전략이 적중했다 할지라도 한 가지가 없었다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19절).

 

 이것은 18절을 요약해서 한마디로 다시 19절과 연결시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8절의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바울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이 말할 때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이 하는 일마다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비결이었습니다. 성령이 바울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이 철저하게 그와 함께했기 때문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우리는 사도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받았던 성령의 능력과 우리가 받은 성령의 능력이 같습니까?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사도직을 주셨기 때문에 그 사도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따로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랬고 요한에게도 그랬고 주님께서 특별히 사명을 주어서 가장 어려운 일을 시키는 자에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 전하는 데 필요한 경우에는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그가 전도할 때에 희한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1, 12).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요즈음 아무리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까? 손수건 하나 갖다 얹었는데 병자가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을 골고루 나누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3, 4).

 

 사도들은 이런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런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한번 읽어 보세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전도받고 구원얻은 사람들 중에 바울과 같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가 한번 살펴보세요. 예를 들어 루디아가 특별히 사도 바울처럼 희한한 일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사도 바울이 받았던 능력을 자기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표적 기사를 행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나 능력을 똑같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울에게 주셨던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마귀도 병을 고칩니까? 마귀도 병을 고칩니다. 어떤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 고칩니다. 마귀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마귀도 죽은 자를 살립니다. 표적과 기사는 성령의 역사만이 아닙니다. 마귀도 그만큼은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던져서 뱀을 만드니까 애굽에 있는 술사들이 똑같이 따라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잘못하면 마귀가 하는 일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처럼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것은 사도 바울이 받았던 표적과 기사는 아무나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함부로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예화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터를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지금 아군과 적군이 첨예하게 대결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적군을 한꺼번에 무찌르려면 먼저 포병 부대가 막강한 성능을 가진 대포를 장착해 놓고 적군과 대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기회를 봐서 적군이 집결해 있는 곳을 향하여 대거 함포 사격을 퍼붓습니다. 적군이 지리멸렬해지면 그 틈새를 타서 소총 부대가 따라갑니다. 소총 부대가 가서 남아 있는 적군을 차례로 쏘아 죽이면 끝이 납니다. 이렇게 해서 적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골자는 대포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소총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대포를 들고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도들이 대포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총 하나만 들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총 부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소총으로 족해." 우리는 이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만약 옥 목사가 밤낮없이 강단 뒤에 와서 "주여, 나에게도 신비한 일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그것을 일으킬 능력을 안 주시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안 일어나겠습니다"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는 소총이면 족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그러면 능력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만이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표적과 기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성령의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말, 그것이 능력입니다. 십자가라는 말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부활하셨다고 하는 말, 그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지만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이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하늘에서 무슨 이상한 불의 혀 같은 것이 내려오기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기다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나갈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령이 교회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이미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 성령의 능력도 그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이나 두려워하는 마음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도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마음이 불안하고 겁난다고 성령께서 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전도할 때마다 떨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연약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세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도할 때마다 심히 두려워하고 불안해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전도를 해보지만 때로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어떤 때는 자신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도할 때마다 떨고 두려워하는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가는 곳마다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행 19:20).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 성령의 권능은 다른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해도 성령의 능력은 나와 함께합니다. 내가 불안해해도 성령의 능력은 나와 함께합니다. 내가 약해도 성령의 능력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도 전도를 많이 하는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저는 언제나 그분들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가운데서 김병채 집사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분은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가 전도폭발 훈련을 받고 나서 1989년에 처음으로 전도를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 부국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소위 내노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국장의 부인은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43세의 나이로 모든 면에서 패기만만하고 자신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단히 논리적인 데다가 달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데 특별한 은사(?)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김 집사님이 그분을 처음 만나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네가 뭔데 나에게 감히 전도를 하겠다고 하느냐? 나는 유명한 목사들, 웬만한 사람은 다 만나 보았어. 그래도 나는 예수 안 믿었어. 소용없는 일이야" 하는 투의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 집사님은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한 번 해 보자' 하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붙들고 자기가 전하는 이야기를 끝까지만 들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옆에 앉았다가 다른 방으로 피해버렸습니다. 잘못하면 김 집사님이 호되게 망신당하는 꼴을 보게 될지 모르니까 불안해서 피했는지도 모릅니다. 처음 김 집사님이 한 시간 반 동안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사람이 논쟁하는 투로, 할 수 없이 들어 주는 투로, 억지로 듣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시간 반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드디어 그 얼굴이 진지해지고 듣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너무 진지하게 들으니까 그 낌새를 알아차린 부인이 옆에서 남편 옆에 와서 같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 시간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의 끝날 때쯤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의 눈에도, 그 부인의 눈에도, 전하는 김 집사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드디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김 집사가 전도폭발 훈련을 받고 처음으로 나가서 전한 대상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게다가 보통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니 얼마나 긴장하며 떨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던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김 집사가 두려워했던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김 집사가 불안해한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약한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무조건 복음 들고 나가는 자에게는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일로부터 6개월 후에 김 집사가 우연히 LA에서 그 부국장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가 LA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는가를 간증하고 있더랍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성령의 능력, 그 능력이 지금 나와 함께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 그것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 속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 안에 들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약한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조지 뮬러가 참 좋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연약함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됩니다.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는 자기의 힘을 나타내시려고 더 가까이 오십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난관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도우심은 더 가까이 나타나십니다." 할렐루야!

 사랑의교회는 거의 매년 대각성전도집회를 갖습니다. 지금까지의 집회를 통해서 예수를 전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성령의 능력이 크게 역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5년간의 통계 자료는 정확성이 좀 약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1986년도에 열린 대각성전도집회 때 예수 믿은 자는 400명, 1987년도에는 677명, 1988년도에는 607명, 1989년도에는 598명, 그 다음 1990년은 제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어서 열지 못했습니다. 1991년도에는 615명, 이렇게 합하여 5년 동안에 총 2,897명이 예수 믿고 돌아온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람까지 다 합하면 3,000명 이상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시내에 약 6,0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들이 모두 다 우리 교회처럼 매년 500명만 예수 믿도록 할 수 있다면 1년 안에 서울 시내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이 예수 믿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1년에 3백만 명이 예수 믿고 돌아온다면 서울 시내를 예수의 복음으로 가득 채우는 일은 3년이면 족합니다. 이처럼 대각성전도집회의 열매가 풍성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주님의 역사는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이 사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찾아와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너희 주변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편만하게 채웠느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가득히 채운 것처럼 네 집안에 복음을 가득히 채웠느냐? 네 직장에 복음을 가득히 채웠느냐? 네 이웃을 복음으로 가득히 채우고 있느냐?"

 이렇게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분명히 확인해 봅시다. 정말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의 생명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에게 영원한 기쁨이요 소망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좋습니까? 정말 자랑할 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입다물고 가만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자나 깨나 예수의 이름을 전합시다. '나 하나쯤 전도 안 하면 어때?' 하는 생각은 죄악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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