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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롬 8:18-26)

by 【고동엽】 2022. 8. 28.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롬 8:18-26)

어린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와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니까, 아버지는 세계지도를 갈기갈기 찢어 던져주면서 "이 세계지도를 다 맞춰 놓으면 놀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세계지도를 다 맞추려면 적어도 5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아들은 5분도 못 되어 싱글벙글하며 맞춘 지도를 가지고 왔는데 아버지가 놀라자 아들은 "아빠, 지도 뒷장에 큰 얼굴이 있어 그 얼굴을 보며 지도를 마추웠어요, 자, 이제 놀아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찢겨진 세계지도처럼 파괴되어 가는 현실을 보며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손상되고 이그러져 가는 희망이 없는 현실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약속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을 바라보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참여해 갑니다.

아무리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성이라고 해도 온 식구들의 기도와 성원, 기대와 함께 한 생명을 잉태한 다음 드디어 모두가 기뻐하고 환영하는 가운데 한 생명을 이 땅에 출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새 생명을 해산하는 순간에 너무나 기뻐하고 행복해하면서 자신은 곧 다시 아이를 갖겠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없을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결혼 후에 여성이 평생 경험하는 고통이라면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시 한 순간이며 그러한 고통 후에 얻게 되는 성취감과 기쁨을 내다보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게 되고, 반복해서 몇 번 받아들이게 됩니다. 의미 없는 고통, 끝이 없는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삶은 진행되고, 기다림 속에서 인도되고, 기다림 속에서 성취 되어 감을 보게 됩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 젊은 남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그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게 되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을 기다리고, 집 없는 설움 속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의 새 집으로 이사 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분단 된 우리에게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삶은 모든 면에서 기다림의 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큼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다림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 속에서 오늘의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이 없어질 때 그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만일 기다림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적막할 것이겠습니까! 기다림이 있기에 꿈을 키워가는 노력이 있고, 기다림이 있기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소망은 더욱 더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모든 어머니는 그 아들이 제대하고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면서 힘든 줄 모르고 온갖 고생을 참고 이겨내며 살고 있고, 남편을 해외근로자로 보낸 아내는 그 남편이 돌아오는 날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기다림의 소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 무엇을 바라보고 기다린다는 것, 바로 그 자체가 삶이요, 소망이요, 행복입니다. 아직도 내게 기다림이 남아있다는 것은 바라는 소망과 사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비록 사도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기보다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척과 멸시를 받았고, 매를 맞거나 옥에 갇히기도 하고, 때로는 굶기도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조화의 찬양소리 보다는 깊이 신음하고 있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현실에서 그가 경험하고 있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희망적인 미래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경험하고 맛보고 있었던 미래는 인간에 의해서 잘 살게 되는 세상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신음 소리와 함께 그 영광의 날을 갈망하고 있는 피조물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희망과 소원

희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희망은 자신보다 더 위대한 대상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며 소원은 자신이 막연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소원이 아닌 희망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아무리 살기가 어렵고 힘들어도 뚜렷한 희망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그러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 희망은 체험적인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바울과 같은 고난의 상황에 있다고 하면 현실을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아니면 고난을 가져다주는 원인을 포기 해버리고 고난이 없는 현실을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 가지 다 선택하지 아니했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고난이 없는 현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체험적으로 절망, 답답함, 어두움을 맛보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현실에서 가난하게, 힘들게, 많은 것을 유보하며 살아가지만 언제나 열려진 희망을 체험하며, 확신과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도 있는데 바울의 경우, 그는 현실에서 전혀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을 체험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체험 가운데 내다 본 장차 올 세상은 현재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이 모두 파멸하는 세상이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의 손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치유되고, 보상되고, 용서되고, 화해되는 미래이며 모든 피조물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있는 죄로 파멸하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미래였습니다. 현재의 어두움이 결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넘어설 수 없는 영광의 미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실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러한 미래를 맛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한 희망의 선취는 성령을 통해서였습니다. 성령은 그 자체가 향수냄새를 풍기거나, 뜨겁게 달구어진 물건이거나, 차갑게 느끼게 하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미래를 미리 맛보게 해주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온 세상의 증인이 된다"고 하였는데 성령에 의해 받는 능력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체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 사람은 진정 자기 시대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증인은 그 나라를 미리 체험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그 어두운 현실에 손상되지 않고, 묶여있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체험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그때 감옥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그들을 채운 착고가 풀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힘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한편 성령은 고난의 현실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마땅히 구할 바를 알려주시고, 대신 그것을 간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바울이 현실의 고난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체험하게 된 것도 성령께서 그를 대신해서 간구하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의 메시지 두 가지

성도 여러분! 우리는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이 현실을 넘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희망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미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지 아니하고 사랑의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긍정하는 유일무이한 삶의 원동력이며 근거입니다. 고난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현실과는 전혀 다른 희망의 현실을 체험해 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감사하며 소외된 이웃을 받아들이는 삶 그 자체가 구속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구제나 적선을 넘어섭니다. 그들이 하는 선은 하나님의 희망을 체험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희망에서 그렇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절망과 어둠의 상황에서 빛이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맺어갈 수 있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맺어지는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적대감을 화해로 바꾸어 가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분명히 사막, 감옥, 질병, 풍랑이 이는 바다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피해 갈만큼 지혜롭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감옥에서 푸른 초원으로, 질병에서 구원으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잔잔한 해안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메시지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 깊은 탄식 가운데서 대신 기도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우 깊은 탄식 가운데서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매우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잘못으로 분명히 잘못된 길을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를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의 기도가 있습니다. 거짓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 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듭니다.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 희망의 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성령의 간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더 좋은 것에 대한 간절한 갈망

오늘 우리 시대에서 자신이 먹고 싶고, 살고 싶고, 놀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지만 언제나 절망, 씁쓸함, 떳떳치 못함, 가책이 그의 존재 의식의 기반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 늘 부러움, 적대감, 한, 원망이 그의 존재의식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양자의 유형을 다 초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 긍정, 받아들임, 평화, 용서가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의식은 감사, 희망, 소멸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에서 맛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미리 맛보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미리 맛보아 알고 있는 사람은 맛없는 것을 미리 많이 먹어두지 않습니다. 나중에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배고프지만 기다립니다.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된 미래를 미리 맛보고 있는 사람은 현실의 것으로 배불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좋은 것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바다와 초록 물고기 이야기

대학을 나와 큰 뜻을 품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외모나 성격이나 별로 나무랄 데 없었는데 문제는 아무도 농촌으로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청년의 닉네임은 '바다'였고 여자의 닉네임은 '초록물고기'였는데, 이 여자는 마음씨도 아름답고 농촌도 잘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청년은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은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때부터 이 여자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전에는 하루에 열통씩 오가던 메일이, 이제는 뜸하게 왔고, 그마저도 늘 한 두 줄이었습니다. 청년은 절망했습니다. "역시 별 수 없구나! 누가 농촌으로 시집을 오겠나? 잊어버리자!"


그런데 쉽게 잊혀 지지 않았고, 도무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절박한 마음과 그리운 마음을 담아 메일을 띄웠더니 얼마 후에 답신이 왔는데 그 답신에는 그녀가 자신을 멀리한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소아마비이고 얼굴에 화상으로 생긴 흉터 때문에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인터넷을 통해 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자기의 처지를 알고 나서는 다들 돌아서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누가 호감을 보이면 자기가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먼저 돌아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잊어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청년은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그녀의 결점을 알고 나니 몹시 혼란했고, 부모님의 실망하시는 모습이 떠오르자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다고 그때 마음이 돌아서면 그녀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 같았고, 육체보다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자부하던 청년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동정으로 결혼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청년은 마음을 굳히고 그녀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님을 사랑합니다. 지난 며칠 간 님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님에게는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필요하고, 또한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님의 결점은 오히려 나에겐 기쁨과 보람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초록물고기가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나기로 했습니다. 청년은 여자의 불편한 몸이 걱정되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지만 여자는 청년이 사는 걸 직접 보고 싶다고 해서 청년이 사는 곳 근처의 폐교된 한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 청년은 한 시간이나 먼저 나가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지난 후에 교문에서 웬 날씬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점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보니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혹시 바다님 아니세요?" 청년이 실망되어 물었습니다. "네 맞는데요. 초록물고기님이 못 나오게 되었나요?" 그때 그녀는 자기가 바로 초록물고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의 외모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잠시 말을 꾸며냈다고 합니다. 그 얘기가 실화인지, 만든 얘기인지는 잘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도 마음의 중심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한 마디라도 더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승리의 목적지를 행해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께서 비록 고난과 역경과 어려운 시련가운데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을 감사로 받아들이면서 신앙고백 적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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