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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 (벧전 4:12-19)

by 【고동엽】 2022. 8. 28.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  (벧전 4:12-19)

   우리 사람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통 스트레스라고도 부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것과 같은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는데 그것이 심한 경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병이 걸리고 육체적으로도 병이 걸립니다. 그것이 심한 경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스트레스와 부담 중에 하나는 가난이 주는 부담과 스트레스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부담처럼 무거운 짐을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자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 겁니다. 경제적인 부담이 얼마나 크면 우리는 돈이 많은 부자를 부자라고 부르기보다 잘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까지 부르고 살겠습니까?

   가난은 부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부자는 부담이 없을까요? 스트레스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담의 종류가 좀 다를 뿐 부자에게도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누구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더 크고 무겁고 힘들까요? 그것은 아마 똑같을 겁니다. 세상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담은 가난한 사람이 부담이 아닙니다. 부자의 부담도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힘들고 무거운 부담은 자기부담입니다. 자기가 느끼는 부담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무겁고 어려운 부담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과 스트레스의 무게를 달아 볼 수 있다면 저는 똑같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우리교회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떤 분이 저희 교회 게시판에 ‘김동호 목사도 어려움이 있었는가?’라는 글을 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개척 된지 얼마도 되지 않아 출석교인이 천 명을 넘어가자 쓴 글이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쉽게 부흥하고 성장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올린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남들이 볼 때는 쉽게 목회를 하는 것 같아 보여도 다 나름대로의 역경과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것 없이 공짜로 살고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제게도 나름대로의 역경과 고통과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그 흔적도 제게는 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하고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이고 이 어려움과 고통이 어떻게 끝이 날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때가 있었습니다. 아니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고통과 고난은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람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아주 정상적인 것이라는 것과 모든 고난과 고통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과 고통도 견딜 만 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 이제껏 당한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딜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고난과 고통은 부담스러운 것이고 즐거운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고 무겁게 하는 부담과 스트레스가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행복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에게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는지 아십니까? 왜 모든 사람의 삶에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적으로 생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담과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부담과 스트레스가 없다면 성장이 없습니다. 성공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부담과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건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만큼 성장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발전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담입니다. 스트레스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큰 짐이 있다면, 부담이 있다면, 스트레스가 있다면 그것은 공부입니다. 세상에 공부처럼 힘들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려서 저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어른이 되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크고 무거운 짐은 공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공부라는 부담 때문에 발전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에게 가장 힘들고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것은 운동입니다. 세상에 운동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그 부담을 거부한다면 그는 절대로 훌륭한 운동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황영조 선수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연습을 위하여 도로를 달릴 때 그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옆에서 달리는 차에 뛰어 들고 싶었었다고.....  그와 같은 고통의 짐을 지고 그것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는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몇 달 전 건강수치가 아주 나빴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남산이나 경희대 캠퍼스를 제법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걷습니다. 남산 길도 어느 정도 굴곡이 있어서 좋지만 경희대 길은 그 골곡이 제법 심해서 제가 조금 더 좋아하는 운동코스입니다. 경희대 평화의 전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길지는 않지만 제법 경사가 심해서 그곳을 올라갈 때마다 숨이 찰 정도로 힘이 듭니다. 그것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힘은 좀 들지만 제게 아주 좋은 운동이 됩니다. 왠만하면 빠지지 않고 제법 열심히 운동을 하였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라도 나섰습니다. 어떤 때는 일부로 우산도 들지 않고 오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걸었습니다.

   요즘처럼 더울 때 땀을 흘리며 걷는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틀어 놓고 가만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편하고 좋은 것이 우리를 약하게 하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를 건강하게 합니다. 한 석 달 가까이 열심히 걷고 운동을 했더니 몸무게도 조금 빠졌고 건강수치도 제법 좋아졌습니다. 실제로 제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절반이나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저를 건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편안한 의자와 시원한 에어컨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하는 부담입니다.  부담이 부담스럽다고 그 부담을 회피하면서 산다면 그는 모든 면에서 낙오하고 연약한 자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승리와 행복을 맛 볼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당연히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부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부담과 스트레스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가급적 그것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좋아합니다. 대형교회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담 없이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군중 속에 묻혀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눈에 잘 띠지 않기 때문에 부담 없이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기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게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는 점점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되어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이 주는 건강함과 행복함 그리고 축복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공부가 힘들다면 공부를 안 하면, 운동이 힘들다고 운동을 안 하면 격게 되는 것과 똑같은 일을 영적으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당시 로마 교회는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로마교회는 면죄부까지 팔았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면죄부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자기 부모와 형제를 위한 면죄부까지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산 돈이 헌금 통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자기 부모가 천당으로 옮겨간다고까지 교인들을 현혹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면죄부식의 헌금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구원까지 미끼(?)로 내 걸지는 않지만 축복이라는 어쩌면 구원보다 더 좋은 미끼를 걸고 교인들의 주머니를 아주 효과적으로 털어내는 교회들이 꽤 적지 않게 많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헌금과 헌신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복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진심도 없이 많은 헌금과 헌신을 하는 것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는 바나바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 놓은 일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 부러워서 자기들도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합니다. 물론 그 중 얼마를 감추다가 죽기는 했지만 그가 교회에 했던 헌금은 아마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헌금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저들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교회를 장악하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헌금이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실제로 헌금을 통하여 자신이 들어나게 되면 헌금이 많아지게 되고, 헌금을 해도 자신이 들어나지 않게 되면 헌금이 줄어듭니다.

   장로나 권사 그리고 집사 임직 때 대부분의 교회들이 돈을 걷습니다. 적지 않은 돈을 걷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예 교회가 액수를 정해 주기도 합니다. 장로는 얼마, 집사는 얼마, 권사는 얼마 하는 식입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헌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미국에 유명한 수정교회가 건축되었습니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되었는데 그 때 그 건축헌금 모금이 참 기발하였었습니다. 얼마를 헌금하면 동메달을 주고 얼마를 헌금하면 은메달을 주고 얼마 이상을 헌금하면 금메달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이상 고액의 헌금을 하는 사람은 교회당 현관에 그 이름을 기록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참 효과적이었습니다.

   우리 교단 신학대학을 신축할 때도 같은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1억 원 이상을 헌금하는 교회는 교실에 그 이름을 적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 교실은 어느 교회의 헌금으로 지어졌습니다’라는 패를 문 앞에 붙여 주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도 헌금을 하였었습니다. 1억 원 이상을 헌금하였습니다. 당시 예배당 건축 중이라 쉽지 않았지만 신학교가 잘 되어야 교회들이 산다는 생각에 제법 열심히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실 앞에 동판을 붙여주는 것은 사양하였습니다. 순수하지 못하고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나름대로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이름값을 하느라고 우리 교회는 가급적 면죄부를 팔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복주의적인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의 헌신과 헌금을 유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임직하는 분들에게 분담금을 내게 하지도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교인들에게 알리고 특별대우를 해 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교회는 아이들 말처럼 쿨하고 아주 나이스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교회가 정말 쿨하고 나이스한 교회일까요? 성숙한 교회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면죄부나 면죄부와 같은 기복주의적인 현혹 때문에 헌금을 하는 사람과 그와 같은 것이 없으면 전혀 헌금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띄어 주고 장로나 집사나 권사가 되게 해 주면 헌금을 많이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헌금을 별로 하지 않으려는 사람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근사하고 나이스한 교회는 그와 같은 기복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없어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저들 보다 더 많이 헌신하고 저들 보다 더 많이 헌금하는 교회가 아닐까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에는 우리 교회가 과연 그런 교회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들이 비판하고 우습게 보는 교회는 기복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 때문에 교인들이 헌금하고 헌신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저들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우리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교인들이 헌금 잘 안하고 헌신 잘 안하는 교회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는 위험한 교회입니다. 그런 시시하고 유치한 부담을 여러분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제법 커서 부담 없이 숨어서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하고 유치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현혹하지 않아도 그와 같은 것에 현혹되어 헌금하고 헌신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하고 헌신하여야 정말 좋은 교회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담과 스트레스를 넘어서 때로는 고난까지도 당하게 하십니다. 부담과 스트레스와 고난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부담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생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 둘째는, 시시하고 유치한 기복적인 미끼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헌신과 고난입니다. 그와 같은 헌신과 고난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면류관이 없습니다. 셋째는, 하나님 사랑하는 진심으로 아무 사심 없이, 조건 없이 하는 헌신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는 부담과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즐겁게 자초하는 고난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고난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러면 영광의 날에 우리도 주와 함께 영광을 받으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이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족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올해 우리 교회는 예산대로 결산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성전을 건축하자고 하였더니 여러분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돌려서 보이지 않은 성전 건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목회하면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제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현주소입니다.

   그래도 면죄부는 안 팝니다. 장로 장사는 안 합니다. 메달도 팔지 않습니다. 부담 없이 교회 생활 하기는 아마 참 좋은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위험한 교회가 될 겁니다.우리 교회에서 그와 같은 함정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면죄부 때문에 헌금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면죄부를 팔지 않는다고 헌금을 안 하는 것도 역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헌금하면 메달을 주기 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헌금하지 않는다면 뭐가 다른 것입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되려고 하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우리가 비판하는 교회와 모양은 다르지만 내용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위험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금 우리 교회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옳지 않다고 비판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면죄부 때문에 메달 때문에 지는 부담과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순수한 마음으로 지고 예수를 믿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힘들지만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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