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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세상 (시85:7-13)

by 【고동엽】 2022. 8. 28.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세상  (시85:7-13)
  
오늘 해방 62주년을 맞이하는 해방 절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는 테러와 보복과 폭력이 없는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샬롬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거친 땅위에 서있는 자기 민족 앞에 그리고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원수들 앞에 여호와 샬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심판과 전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주셨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해주시고 불러 주신 것도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아들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평화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통용되었습니다.

1) 평화란 희랍의 에이레네 입니다.

희랍의 "에이레네"는 일시적 휴전 상태에서의 평온함을 의미하였습니다. 희랍의 신화에서 보는 대로 희랍의 문화란 여러 가지 신들의 싸움판으로 엮어지고 있는데 시기와 질투의 신이 있는가 하면 미움과 전쟁의 신들이 있고 사랑의 신도 있습니다. 희랍의 세계에서는 항상 대립과 긴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싸움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런 긴장의 문화 속에서는 평화란 불완전한 휴전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전쟁만 없을 뿐이지 두려움과 공포는 늘 상존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의 조용함, 겉으로 보아서 전쟁이 없는 상태를 에이레네(평화)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계에서 분단국가로 살아가는 한반도의 평화는 휴전상태에 있는 평화, 바로 에이레네 평화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폭팔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잠시 조용함의 평화입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속에 원한 맺힌 감정은 숨기어 놓은 채 겉으로만 평온한 것처럼 위장된 평화는 바로 에이레네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와 우리 사회 안에서 이런 에이레네 평화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세상은 이런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2) 평화란 로마의 팍스입니다.

로마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후 로마의 독재자들이 즐겨 쓰던 용어인 평화는 "팍스"(pax)였습니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 "피스"(peac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팍스는 강대국 로마가 약한 이웃 나라들을 총과 칼의 무력으로 강제로 정복한 이후 이룩한 조용함입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이 평화는 약소국의 백성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숨죽여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의 총칼에 눌려서 입 한번 뻥긋 못하고 기죽어 살 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일본은 한국에 팍스가 도래했다고 선전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강대국 로마인들만이 활개를 쳤고 약소국들의 백성들은 종이 되어서 비굴하게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호수의 평화"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호수가 조용한 이유는 그 호수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다 죽었고 새와 잠자리와 귀여운 다람쥐도 모두 죽어 없어져 버린 호수였기 때문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모두 죽어버린 이후의 조용하고 고요한 호수 가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로마의 평화는 바로 그런 평화였습니다.

팍스라는 평화는 언제나 무력과 힘에 의존하는 평화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강대국이 부르짖는 평화도 이런 것이 되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3) 평화란 유대인들의 샬롬 입니다.

유대인들이 쓰던 "샬롬"은 단순하게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두고 말하지 않고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는 마음의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긴장이 없는 상태,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를 의미했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삶의 보람과 의미를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맛이 나는 세상, 하루하루의 삶에 생동감이 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샬롬은 육신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 모두를 갖춘 온전한 평안과 화평과 행복을 총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평안을 누리는 참된 평강이 바로 샬롬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팍스"를 거부하시고 하나님의 평화 샬롬을 선포하시고 또 그것을 실현하러 오셨습니다. 지금 지구촌 안에 팍스의 거짓된 평화를 거부하고 여호와 샬롬의 평화를 선포해야 될 때입니다.

한 역사학자는 말하기를 인간들의 역사 속에는 80%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운데서도 전쟁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가진 역사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중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입니다.
11세기 초 기독교 안에 분열이 심했는데 한편 당시 많은 유럽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예루살렘에 이슬람 국가의 힘이 퍼지면서 카톨릭 순례자들이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례자들이 교황에게 탄원을 보냈습니다.

이때 교황 우르반 2세는 공의회를 열고 성지회복의 전쟁을 일으킬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의 불명예입니다.

그런데도 유럽의 귀족들은 그 들끼리 싸움을 일삼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부의 싸움을 할 때가 아닙니다. 칼을 쓰려면 신앙을 위해 씁시다." 이에 참석자들도 외칩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성도들의 거룩한 싸움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자는 모두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그 보상을 받게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드디어 1차 십자군은 이슬람교들을 무차별 죽이고 진군하여 예루살렘 성을 탈환합니다.

예루살렘 탈환 후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거리에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에서는 사람의 머리
와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십자군 병사들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하였다. 신전이나
모든 벽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을 탄 기사가 잡은 고삐마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처참한 전쟁의 현장입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11, 12세기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교인들 700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의 씻지 못할 실수중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모슬렘 신앙인들을 서양의 기독교가 박멸하고자 했던 그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오히려 중동의 대부분의 나라가 이슬람 화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슬람 국가들을 더 힘 있게 뭉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빈 라덴의 테러 배후에도 따지고 보면 이토록 오래된 묵은 원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 교인들이 승리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들은 오히려 십자군과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기독교인 들이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슬람 국은 다시 재정비해서 기독교가 정복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난날 십자군 병사들이 그처럼 잔인했던 것에 비해 이슬람 장군인 살라딘의 보복은 뜻밖에 너그러운 것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약간의 돈을 받고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줍니다.
남자는 금화 열 닢으로 자유를 주고, 여자는 두 닢, 어린이는 한 닢으로 자유를 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줍니다. 또한 치안을 엄격히 해서 학살과 약탈이 없게 했습니다.
더욱 관심을 끄는 일이 있었습니다. 살라딘 장군의 아우는 형에게 몸값을 치루지 못하는 사람
천명을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자 "형님, 우리는 그리스도교도들처럼 사람을 무참히
죽여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포로민을 알라신께 바치는 뜻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합니다."
서양 역사가들은 이슬람 장군 살라딘을 오늘까지 너그러운 정복자로 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중동 지방 선교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기독교는 칼을 든 정복자인 반면에 이슬람은 너
그러운 정복자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의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영원한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난날 미국의 9.11 비행기 자살 테러로 엄청난 사람들이 비참하고 잔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무고한 생명들을 수천 명이나 죽인 테러리스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테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힘과 무력으로 보복전쟁을 통하여 테러를 막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보복 전쟁이후에 지구촌 전체가 테러의 공포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하철에 밀가루만 흘려도 테러가 아닌가 ?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왜 이슬람교들은 자신의 생명을 던지면서 그 엄청난 자살테러를 강행할 정도로 미움과 원한을 갖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빈 라덴은 전 세계에 충격과 경악을 안겨준 미국의 참사를 오히려 알라 "신께 감사했다"고  성명서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그에게 종교적 열광주의도 큰 몫을 했음이 분명하지만 미국을 그토록 미워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 하는 것입니다.

늘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중동의 가난한 이슬람국가를 대적하던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이 빈 라덴과 그 일파입니다. 그의 성명에서 "지금 이슬람은 부시가 이끌고 있는 새로운 십자군과 유대인의 공격에 맞서 성전을 벌이고 있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 역사 깊은 그의 원한을 알 수 있습니다.

빈 라덴에게 맺힌 한 속에는 가까이는 부시의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던 아픔도 있고 그리고 유대인들을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원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뇌리 깊이에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덴이 미국의 공격을 "새로운 십자군"의 공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슬렘들이 이번의 부시의 보복전쟁을 "제2의 십자군전쟁"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종교전쟁의 위험성과 문화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쪽에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저쪽에서는 이미 새로운 십자군이라고 해석하고 있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미국은 피의 보복을 다짐하더니 결국 보복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습니다.  

이라크에 엄청난 무기를 쏫아 부어 초토화 시킨 다음 결국 라덴이 숨어있다는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훈련장과 공항과 군대 본부 등을 미사일로, 폭탄으로 강타하고 말았습니다.

8, 90%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도들 가운데는 다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들에 대하여 피의 보복으로 테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에서 억류되어 있는 21명의 형제들과 두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우방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에도 다시 한 번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한국의 기독교가 십자군과 같은 정복자들의 모습으로 비추어 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선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무작이로 들어가는 것은 선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해외에 나간 선교 팀들이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이슬람교들 지역에 나가서 시장에서는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여행하는 차는 한 번도 타 보지도 못한 고급 버스로 운행을 하고 이것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선교사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복자들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억류된 형제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기도하면서 해외선교에 대한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구촌의 인류들은 평화의 세계를 꿈꾸었는데 평화에 대한 기대가 산산 조각으로 깨여지고 말았습니다.

20세기에 피로 물들었던 세계 제 1.2차 전쟁. 한국의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을 겪으면서 수억의 생명들이 참혹하게 죽어갔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받고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피로 얼룩졌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에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촌이 되기를 소망했는데 현재 지구촌은 전쟁과 테러 속에 공포와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빈 라덴이 보복을 당하면서 한말이 있습니다.

  자기네들을 보복하는 미국인들도 편안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이슬람교도들의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뉴욕의 테러 보다 더 무서운 생화학무기(독가스)에 의한 무차별 살상까지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고 크게 염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촌 안에서 평화를 위한다는 이름을 내걸고 보복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평화운동이라 할 수 있는 가 ?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평화운동일까 ? 고민해봐야 합니다. 미국이든 이슬람교도들이든 팍스의 평화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번의 전쟁에서 내건 평화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판별해야합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평화(pax Americana)가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를 보아야 합니다.

미국이 소련연방의 붕괴로 오만해져서 세계 전체를 자기네 마음대로 지배하려고 하다가 이런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부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내 걸었던 이른바 "MD"(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라는 것은 약한 나라들을 위협하자는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의 말을 안 들으면 군사 무기로 죽이겠다는 뜻을 그 계획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에 군수업자들을 배후에 두고 세계평화를 내세우면서 자국의 이익만을 노리고 있다는 지탄을 계속적으로 받아왔습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이 정복을 일삼았던 로마의 평화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속적인 평화 관을 옳다고 인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십자군전쟁의 실패와 잘못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하는데 실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번 미국과 영국 등의 군사 공격으로 테러가 지구촌에서 살아질 수 있다면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실제로 그와는 반대의 결과를 사람들은 우려하고 있습니다.

무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무력과 폭력은 인간의 심리를 더 비뚤어지게 만들고 있으며 내려 누르면 누를수록 더 무섭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바람과 태양이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는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주가 벗길 수 있나 내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강하게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더욱 단단하게 옷을 여미고 있었습니다. 바람으로서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겉옷을 벗길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태양은 따뜻한 햇볕을 따스하게 내려 쪼였더니 길가는 나그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말았습니다. 무력과 폭력으로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만이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이룩된 평화를 에베소 교우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멀리 도망쳤던 인간들을 화해시키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증언합니다.

원수된 관계를 풀어내는 방법으로서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전쟁으로가 아니라 힘으로서 아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당하시어 죽으심으로 용서와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들과 화해하시기 위하여, 총칼로 내리쳐서 복종시키는 희랍의 방식이나 로마의 방식이 아닌, 사랑의 방식으로 용서의 방식으로, 즉 십자가의 방식을 이용하셨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원수를 죽여 버리는 폭력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십자가로 원수와의 관계를 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샬롬의 평화를 만드는 그리스도적인 방식입니다.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 선생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어느날 방정환 선생 집에 강도가 들었습
니다. 선생은 부드러운 얼굴로 서랍에서 당시 적지 않은 돈 390원을 내주었습니다. 강도가 급히
돌아서 뛰쳐 나가려하자 선생은 그를 불러 세운 후 "이보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는 인사는 해
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요?" 하고 점잖게 꾸짖었습니다. 강도는 어이가 없었는지 "그래, 고맙다,
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그 강도를 붙잡아 방정환
선생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자가 댁의 돈을 훔쳤지요?"라고 경찰이 말하자 고개를 숙인 채 사색이 다 된 강도를 내려다
보며 방정환 선생은 말했습니다.
"나는 돈을 뺏긴 일이 없소." "아니 이 녀석이 제 입으로 390원 훔친 것을 다 불었단 말이요?"
그러자 방 선생은 웃으면서 강도에게 말합니다.
"이봐, 자네가 나한테 돈을 빌려 갈 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나?"
선생의 말에 경찰은 도둑을 풀어주었습니다. 이에 도둑은 크게 뉘우치고 선생을 흠모하게 됩니
다. 얼마 후 다시금 찾아와서는 선생 댁의 심부름꾼으로 오래도록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도 샬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도둑에게 샬롬을 선언 했습니
다. 도둑의 영혼 안에 샬롬이 싹트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칼을 들고 있기를 좋아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돕는다고 하면서 뒤로는 칼을 숨겨놓고 있기를 좋아합니다.  정의란 이름으로 칼을 자주 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참 기독교인들 손에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무력과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가져야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세상, 샬롬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시인은 자신이 샬롬의 전파자가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샬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지금 시편기자의 눈앞에는 황폐한 땅위에 불안과 공포를 안고 서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에게는 포로 해방의 기쁨도 잠시 황폐해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기가 막막합니다.
주변에는 아직도 원수들이 득실거리고 폐허 위에 다시금 나라를 재건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때 시편기자는 마음 속 깊이 확신이 솟아오릅니다.
시인은 황폐한 땅에 임할 하나님의 샬롬을 체험하고 선포합니다. 첫 번째로는 황폐한 땅 위에 서 있는 자기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샬롬의 선포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 땅을 엿보고 있는 원수들을 향한 샬롬의 선포 입니다. 샬롬이 연약한 민족이 번영하고 행복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무엇보다 샬롬을 이웃에게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해방 62주년을 맞이하는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남북의 정상이 다시 만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정상의 만남이 서로 힘이나 자랑하고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면 전쟁의 불안은 사라지지 아니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샬롬을 만들어 갈 때 남북한이 행복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지구촌 안에 마땅히 벌을 받아 죽어야할 저 이슬람교 테러들이라도 무력과 전쟁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이 지구촌 안에 샬롬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정복자로서의 팍스가 주는 평화가 아니라 진정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평화가 넘치는 샬롬의 세상은 칼과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지구촌 안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력이나 무력이 아닙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가 깨여진 세상은 피차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샬롬의 평화를 선포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박용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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